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11/20/14
김지환

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 (M. Div.)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Th. M.)
뉴저지 장로 교회 부목사
현재 멜본 한인 교회 부목사 (동사목사)
가을이다. 그런데 2월이다. 기분이 묘하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화상 통화를 하다 보면 계절이 다름을 느낀다. 한여름인데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계시는 모습을 화면에서 볼 때마다 '내가 참 멀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호주에 와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두 번 경험했다. 여름 휴가를 가서 텔레비전을 켰는데 각국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나오며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렸다. 소파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얀 눈, 눈 위의 발걸음, 화이트 크리스마스, 외투를 여미도록 추운 날씨, 실내를 따뜻하게 덥히는 히터, 핫초콜렛, … 한겨울의 크리스마스가 그리워졌다.
'나는 어디에 속한 것일까…?’호주에 와서 생각하는 질문이다. 미국에 있을 때는 미국인 줄 몰랐다. 2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니까 미국이란 느낌이 없었다. 그냥 내가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미국을 떠나 보니까 알 것 같다. '아, 그곳이 미국이구나! 내가 미국에 살았구나… 그리고 이곳이 호주구나'
호주에 온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시간은 참 빠르다. 그리고 앞으로 1년도 빠르게 지날 것이다. 호주에 3년 기약으로 왔다. 그 3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난 호주에 살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어가 익숙하지만, 법적 신분은 미국인이고, 사는 곳은 호주인 나의 상황… 솔직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모르겠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사는 곳은 지구이고… 그렇다고 하늘의 기쁨을 항상 누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아! 참 애매하다.
이민자들은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라고 한다. 태어나고 자란 모국을 떠나서 새로운 나라에서 사는 것이, 마치 나무가 뿌리 채 뽑혀서 다른 곳에 심기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나는 뿌리가 세 번은 뽑힌 것 같다. 캐나다로 갈 때 한번, 미국으로 갈 때 한번, 호주로 왔을 때 한번… 앞으로 또 뽑히게 될까? 아니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까…?
호주에 온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호주가 낯설다. 길을 걷거나 운전을 하고 나가면 낯선 느낌 먼저 든다. 차를 운전할 때도 (지금은 많이 익숙해 졌지만), 오른쪽에서 운전하는 것이 낯설다. 호주의 영어 발음도 낯설다. 미국 영어 발음에 익숙해 졌는데 다시 호주 발음에 적응하려니 마치 갓 이민 와서 영어를 배우는 것 같다. 호주 영어가 미국 영어와 얼마나 다른가 하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회의에 참석하려고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왔는데, 호주 영어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통역을 부탁했다고 한다. 미국 원어민도 이해하기 어려운 호주 영어를 이민자인 내가 사용해야 하다니…
호주에 내가 왜 있는지 아직은 분별 중이다.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호주에 온 것은 분명한데, 어쩔 때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나 혼자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호주에 와서 새롭게 경험한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호주는 내가 결정해서 온 첫 번째 외국이다. 캐나다도, 미국도 부모님들을 따라 간 것이지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호주는 내가 결정을 해서 내 의지로 왔다. 내가 원해서 내가 계획을 세워서 온 새로운 나라…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또 멜본한인교회는 모 교회를 떠나 처음 갖는 사역지이다. 미국에 갔을 때부터 뉴저지장로교회에 출석을 했고, 같은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안수도 받았다. 모 교회를 떠나 처음 갖는 사역지가 미국이 아닌 호주가 될 줄이야…
호주에서 경험하는 또 하나의 독특한 체험은 학부형으로서의 삶이다. 아들이 나이가 되어서 올해부터 prep에 들어갔다. (호주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1학년 사이에 prep 학년이 있다) 호주의 학교는 다 유니폼을 입는다. 그래서 유니폼을 구입하는 비용도 꽤 들지만, 귀엽고 작은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가는 아들을 보면 흐뭇해 진다. 학부형으로서 아들을 픽업하고, 선생님과 상담하고, 학부형 모임에 참여하다 보면 아빠로서의 나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호주 사람들의 삶은 미국 사람들보다 더 여유가 있다. 법적으로 1년에 4주 휴가가 보장된다.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교회의 교단도 4주 휴가를 보장한다. 또 나라에서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영주권만 있으면 몸이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경우는 없다. 또 사회 보장 제도도 잘 되어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기를 낳는 가정에는 $5,000씩 baby bonus 를 주었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이들이 많으면 (듣기로는 약 4명 정도) 일을 안 해도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도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정말 여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다.
호주에는 공원도 상당히 많다. 미국에도 공원은 많지만 호주는 더 많은 것 같다. 동네 곳곳에 정원같이 아름다운 공원들이 많다. 많은 경우 공원에 전기로 데워지는 BBQ 스탠드가 있어서 고기만 들고 가도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다. 또 곳곳에 수영장을 비롯한 체육관들이 많아서 생활 체육을 하는데 편리하다. 사용료도 비싸지 않아서 부담이 없다. 하지만 몇 가지 불편한 점도 있다. 먼저 물가가 너무 비싸다. 품목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물가가 미국의 두 배 정도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슈퍼마켓에 가서도 음식을 제대로 사지를 못했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유틸리티 가격이다. 특히 호주는 물이 귀해서 물 값이 비싸다. 미국에 있을 때는 피곤할 때마다 욕실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목욕을 하고는 했는데, 호주에서는 2년 동안 한번만 집에서 목욕을 했다. 또 상점들이 문을 빨리 닫는다. 왠만한 가계와 쇼핑몰은 평일에 오후 5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많은 호주인들도 5시 정도 되면 퇴근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호주 사람들은 저녁에 무엇을 하며 지낼까 아직도 궁금하다. 호주는 유난히 liquor store가 많은데 (왠만한 슈퍼마켓에는 liquor store가 하나씩 꼭 붙어 있다) 저녁 식사 후에 분위기 있게 와인을 들며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 가장 불편한 점이 있다면 멜본의 겨울이다. 호주가 더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지역은 열도와 가까운 북쪽 지역이고, 호주의 남쪽에 위치한 멜본의 겨울은 상당히 춥다. 물론 온도가 떨어져도 대부분의 경우 0도 미만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런데 멜본은 겨울이 우기라서 비가 많이 온다. 온도가 낮지 않아도 습기가 많으면 날씨가 으스스해 진다. 미국의 겨울이 살을 에는 추위라고 하면, 멜본의 겨울은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라고 할까… 그래서 겨울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닌다. 난방비가 싸서 히터라도 맘껏 틀어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난방비가 비싸서 히터를 마음대로 틀지도 못한다. 그래서 실내에서도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을 때가 많다.
요즘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소식이 호주의 인종혐오적 범죄이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한국 청년이 공원에서 여러 명의 백인 청년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드니에서도, 브리스번에서도 인종차별적 범죄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실제로 일상 속에서 느끼는 인종 차별은 미미하다. 내가 한인 교회에서 사역을 해서 백인들을 대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기가 막힐 정도의 인종 차별적 대우를 받아본 적은 아직 없다. 내가 만났던 백인들은 미국인들보다 오히려 더 여유있고 친절한 느낌이다.
호주에서 살 수 있다는 것… 나에게는 큰 축복이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인 멜본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사역지를 경험하는 시간이 분명히 특별한 축복이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삶이 새로운 도전을 주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미국에서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외로움과 낯섦 속에서 자신을 추스리는 방법도 배웠다. 지금은 호주에 있지만 앞으로 1년 후에 어디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삶과 사역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온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만나고 욕망을 끌어안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면, 어디에 있던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지구에 온지 벌써 41년이 지났다. 솔직히 말하면 잘 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잘 살 수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지난 삶에 후회는 많지만 그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인생을 80이라고 하면 반환점을 지났다. 믿기 힘들지만 이제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를 살아야 한다. '아, 내가 중년이 되었구나…'
한가지 다행인 것은 요즘은 시간이 갈수록 나 자신과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는 느낌이다. 한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조금씩 달라짐을 느낀다. 이렇게 중년이 되는 거구나… 호주에서 맞이하는 마흔 한 살의 가을 … 눈부신 햇살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