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영성과 건전한 자화상
11/20/14
김영덕

연세대학교 신학과 B.Th
프린스턴 신학교 M.Div., Th.M
뉴저지장로교회 부목사
해외한인장로회 뉴저지노회 증경 노회장
목회란 어떻게 보면, 사람이 바뀌도록 돕는 일이다. 육적인 세계만 보던 사람이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고, 자신의 필요만 채우려던 사람이 남을 돌아 볼 줄 알게 하고, 자신의 꿈만 추구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하고, 지옥갈 사람이 천국갈 사람으로 바뀌도록 돕는 것이 목회이다(엡 4:12). 문제는, 사람이 좀처럼 잘 안 바뀐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를 받고 회개하기도 하고, 새롭게 살겠다고 결심도 하는 것을 보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행동과 습관이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니,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옛 모습이 불쑥 튀어나와 본인과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성경만 제대로 알면, 나도 바뀌고 사람들이 바뀔 것이라 믿었었다. 성경말씀에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닫는 것은, 안다고 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만큼 선하지도, 의지가 강하지도 못하다. 이스라엘이 일찍부터 율법을 받았지만,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성경 많이 안다고 그만큼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그 감동이 우리의 행동으로 자리잡기까지,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일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에 가깝다. 상승과 추락,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오랜 시간을 거쳐, 우린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
우린 너무나 사도 바울식의 180도 변화와 그런 간증에 익숙해 있다. 나도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믿음이 부족하여' 라며 자책을 한다. 목회하다보면, 하루 아침에 180도로 돌아서는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은 10중에 1명도 보기가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변화는 오랜 시간과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일어난다. 변화를 갈망하는 우리 마음이 '사도 바울표 갱신'을 만들어 내고, 모든 사람에게 맞는 제품이라고 강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브람은 75세에 부름을 받아 110여세가 넘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믿음을 소유하기까지, 긴 신앙의 여정을 걸어야 했다. 형의 발꿈치를 잡던 야곱이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 라는 인정을 받기까지는 20년의 타향살이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얍복강가에서 철야기도 한번 잘하는 바람에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이 아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리더가 되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양을 치며 지내야 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오랜 기간과 연단을 거쳐 변화되고 영적 성숙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순간적이고 극적인 변화에 대한 지나친 동경과 이상화는 우리 속에 조급한 마음을 갖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패배주의로 우리를 몰고 갈 수 있다. '그 사람은 됐는데, 왜 나는 안되지? 내 믿음은 가짜인가?' 분명, 극적인 변화는 있다. 제2, 제3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회심 자체만 보더라도, 다수의 사람이 급격한 회심 보다는 점진적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1978년 프린스톤 종교연구소에서 회심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1,000여 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33%가 회심을 경험했고, 그 회심자 중 약 18%가 급격한 회심을, 82%가 점진적 회심을 경험한 것으로 답했다. 종교심리학자인 Meadow와 Kahoe는 회심의 유형을 다섯가지로 분류하였다.
1)급격한 회심
2)점진적 회심
3)무의식적 회심 - 어린시절의 종교적 가치관을 점차 확대시켜 해석하며 수용하게 되는 경우,
4)재통합의 회심 - 특별한 경험을 통해 과거에 수용했던 종교적 신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경우,
5)인위적 계획에 의한 회심 -짜여진 프로그램이나 집회를 통해 특정 형태의 회심을 경험하도록 유도되는 경우이다. 모든 회심과 변화는 급격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회심이 이러할진데, 회심 후에 경험하는 영적 성장과 변화는 더욱 점진적이고 시간을 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급진적 내적 변화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이상화는 목회 현장에서도 일어난다. 그 결과물들이 성령을 내세운 무분별한 은사주의와 빠른 결과만을 기대하는 성과주의이다. 개개인에 대한 관심과 치유의 과정은 간과되고, 긍정적 통계와 바쁘게 돌아가는 프로그램, 몇몇 사람들의 이상화된 간증만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 그늘에 가려진 많은 사람들은 '믿음없는' 2등 혹은 3등 신자가 되어 살아간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소수의 슈퍼 플레이어들이 있고, 매 주 그들의 활동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야구장의 관객 같은 다수의 일반 교인들이 있다. 슈퍼 플레이어들은 늘 사람들의 기대와 존경을 받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처와 깊은 내면의 필요를 드러낼 수가 없다. 다수의 관객 교인들은 예배가 끝나면 바로 떠나기 때문에 역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지금은 현실적 영성이 필요한 때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상화한 소수의 영웅들을 부러워 하며, 그들과 같지 못함을 자책하고 비관하며 살아가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변화를 찾아서 그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모든 사람이 금 그릇일 순 없다. 그러나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갖자.
최근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얼마나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는가?'를 생각한다. 나는 늘 말하고, 가르치고, 지시하는 자였지, '집사님은 어떻게 자랐고, 무엇을 경험했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셨나요?' 라는 관심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 그분은 왜 용서가 힘든지, 왜 부부의 친밀함이 생기지 않는지, 왜 그렇게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는지? 전에는 단순히 '믿음이 없어서' 라고 일반화하던 내가, 이제는 깊은 개인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진정한 변화는 누구가가 내게 관심을 갖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때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2:6-8) 우리의 죄짐을 지실 수가 있었다. 주님의 심정으로 목회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기뻐하는 자들로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을(롬12:15)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도 서로를 대할 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사람은 짐승처럼 한 번에 여러 새끼를 낳지 못한다. 하나씩 낳아서 기르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 하나가 성장하는 과정이 길고, 그것을 돕는 양육자의 일도 긴 과정이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기에 하나씩 하도록 만드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