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나타난 수도원의 흔적 (3)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이유는?
11/20/14
김유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 드루 대학 신약학 박사 (Ph.D)
조이플장로교회 담임목사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고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왜 아라비아로 갔으며 아라비아는 어떤 곳일까? 바울은 그 아라비아라는 곳에서 무슨 일을 했으며, 아라비아에서의 체류가 바울의 신학과 목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본 소논문에서는 그러한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바울은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
그 해답은 16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만일 '혈과 육' 이 인간을 상징한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바울은 오직 하나님과의 교통을 하기 위하여 갔을 것이 자명하다. (Burton)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을 통해 바울이 추구한 건 무엇일까? 본 저자는 그것이 '계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한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2) 이 계시는 일차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을 말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에서의 처형이 인류 구원의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포함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신학적 사고 안에는 구약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규명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신학적인 계시만 바울은 말하는 게 아니고, 그의 삶의 모든 부분과 그의 목회 활동을 주관하시는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지시와 인도를 표현하는 용어로도 '계시' 를 사용하고 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갈 2:1~2)
이런 표현을 연장하여 나는 바울이 예수님의 인도하심으로 아라비아로 갔고 거기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계시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바울 자신 개인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이전에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음으로, 뭔가 혼자 곰곰이 생각하며 심리적 사회적 재정립을 시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바울이 무슨 특별 계시를 받았는지, 어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는지 알 길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 갈라디아서의 다른 구절을 통해 추측하자면 그것은 이방인 선교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비중에 관한 것이 아니었나라고 나는 추정한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걸 계속 따라서 읽다 보면 맨 마지막 부분에 '아라비아'라는 단어가 다시 한 번 더 등장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갈라디아서 4:24)
그렇다면 혹시 구-예루살렘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예루살렘,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의 대조로 표현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관한 통찰력을 바울은 아라비아 체류 당시에 계시로 받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100%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아라비아라는 광야를 갈라디아서에서 2번이나 언급함이 어떤 우연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있지 않을까? 만일 나의 추측이 옳다면 개신교에서 루터가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꼽은 '이신칭의'의 교리는 바로 이 아라비아라는 수도원 같은 곳에서 태동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전도활동에 힘쓴 것을 강조하는 경향성이 있다. 그들은 1장 16절의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라는 표현을 그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즉,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바울은 즉시로 하나님의 뜻이, 자신으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론에 대하여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바울이 그렇게 이방인 선교를 즉시로 깨달았을까? 나는 차라리 그것보다는 바울이 일단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이 없는 아라비아 같은 곳으로 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하다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자신을 부르셨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Moo)
최근 신학자들이 바울의 아라비아에서의 전도 활동을 추측하는 이유는 고린도후서에서의 어떤 언급 때문이다.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린도후서 11:31~33)
현대 학자들은 바울 당시의 '아라비아'라고 명명된 지역은 다메섹에 근접한 도시인 나바태아 왕국(Nabataean kingdom)을 말하며, 그 당시 그 곳의 왕은 아레다 4세 (Aretas IV: 9 BC - AD 40)이었다고 주장한다. (F. F. Bruce) 그리고 바울 당시는 다메섹도 역시 정치적으로는 그 나바태아 왕국의 치리 하에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적어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인접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바울은 다메섹 인접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에 부닥치고 다메섹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다메섹까지 따라와 바울을 해하려 했다는 것이 고린도후서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아라비아가 유대와는 상관이 없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Witherington III) 혹은 "아라비아에는 사도도 없고 교회도 없음으로 그 곳에 개척 교회를 세우러 바울이 그곳으로 갔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Hengel and Schwemer)
나는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전도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일는지 몰라도, 원래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을 가지고 아라비아로 갔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의 연관성 문제가 아주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단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기도와 묵상과 말씀을 숙고하다가 전도를 했을 수도 있고, 전도하는 중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규명하는 신학이 태동되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라비아'라는 말은 그 히브리어의 어원으로 보면 '건조한 땅', 내지는 '광야'같은 곳이다. (De Boer)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간 곳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나 엘리야가 간 곳이다. 그렇기에 신학자 중에는 바울의 아바라비아에서의 체류를 앞으로의 대대적인 선교 활동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보는 자도 있다. (Timothy George)
결론적으로 나는 바울의 아라비아 체류를 3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 바울이 간 아라비아는 실제로 광야는 아니지만 그 명칭이 상징하는 바에 의하여 광야의 수도원과 같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울은 그 곳에서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만난 체험을 다시 되새기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의미하는 바를 깊이 묵상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이다. (갈 1:13)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이나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서 복음을 갑자기 전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바울에게는 뭔가 자신의 삶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나 계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바울은 그런 영적 작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들과 의논하고 그들에게 의지하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여기에 엿보인다. (Dunn) 이것을 목회에 적용하자면, 모든 목회자/성도는 그런 아라비아 (광야의 수도원) 같은 곳에서 자신의 영적 체험이나 자신의 부족한 삶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배운다. 물론 바울이 교회의 인간 지도자들을 무시했다고는 볼 수는 없다. (Lenski) 바울은 그들을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이라고 존중하고, 결국은 그들과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둘째, 갈라디아서의 핵심은 결국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내용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보듯이 베드로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경우, 복음의 기본 사실인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하심에 대해서는 바울과 일치하지만, 율법 없는 복음에 대해서는 바울처럼 첨예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갈 2:11~16) 그렇다면 바울은 그러한 특별한 확신을 어디서 얻었을까? 나는 그것을 바울을 기본 태도, 즉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만 의존하는 태도로부터 발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라비아는 그 언어가 상징하듯, 과거 모세가 율법을 받은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과연 과거 구약 시대의 계시와 어떤 깊은 관련을 가지는지에 관해 바울은 확실한 통찰력을 얻었다. 어디서 얻은 것인가? 혹시 아라비아 (광야 수도원)가 아닐까?
셋째, 바울은 물론 아라비아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바울은 3년 후에야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만나러 가는데, 그것도 역시 계시에 따라 움직였다고 한다. 즉, 바울은 수도원의 영성으로 오직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민감하게 움직였고, 하나님의 지시가 없으면 일하지 않은 것을 본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이방인 전도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을 가능성도 있다. 바울은 그런 실제 선교 활동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적에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고 하는 것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선포해야한다는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것 같다. 그렇다면, 수도원 영성은 조용히 지내면서 오직 기도와 묵상과 말씀 연구로 하나님과만 같이 지내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그런 게 아니고, 전도와 선교를 함께 하면서 그런 목회 실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체적인 새로운 영적 통찰력을 얻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