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던 해 1940년은 우리나라를 일본이 강점하고 있을 때였다. 내 이름 나정용은 오하라 미스마찌로 불리며, 한참 세계 제2차 대전 중일 때 아버지 나석필 대전 제일감리교회 장로님과 최갑례 권사님의 다섯 아들 중 넷째 였다. 아직 학령 전이었던 우리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밤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읽게 하셨다.
1945년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해방의 기쁨을 채 알기도 전 1950년 우리는 또다시 6.25전쟁을 맞아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아직 해방이란 것, 공산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간도 못하던 어린 나이에 소풍가듯 등가방 하나씩 메고 떠났던 피난길. 다시 고향에 돌아왔지만 집은 포탄에 맞아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아직도 버티고 있던 공산당과 함께 3년이란 혼란스럽고 어두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토록 힘써 지켰던 교회당은 불에 타 버렸고, 사랑하던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져 만날 길이 없었지만 한 가지 할수 있었던 것은 밤마다 숨죽여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서슬 퍼런 내무서원이 지나 갈 때면 행여 기도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숨죽여야 했다. 언제나 큰 소리로 마음껏 찬송하며 예배할 수 있을까? 마음조리며 하늘만 바라보는 세월이었다.
전쟁은 끝내 우리 아버지를 빼앗아 가고 말았다. 하늘 같았던 우리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빠알간 몸둥이 우리 5형제를 남기시고 전쟁 중에 4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슬픔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뿐이랴! 통곡과 몸부림으로 밤낮을 지새우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께선 홀연히 절규하시는 기도로 맡겨진 현실을 끌어 안으시는 것이었다.
어김없이 새벽 4시면 시작되는 우리 어머니의 기도는 그대로 절규었다. 그 절규하시는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먹으며 우리 5형제의 뼈는 굵어져 가는 것이었다. 고통하시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이었기에 모두 둥근 밥상 하나에 둘러 앉아 공부하곤 했다. 다섯 아들 모두 1등 성적표를 받아오는 종업식 날이면 우리 어머니는 공연히 대전시내를 한바퀴씩 훨훨 돌고 들어오시곤 하셨으니, 그것은 우리 어머니를 번쩍 일으켜 세우는 신나는 홈런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석 때가 되어 사내 아이들 다섯이 우루루 몰려 들어와 밥 먹고 나간 자리엔 흙모래만 수북했었다 하시던 어머니! 꿈을 세듯 쏟아진 모래들을 치우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때 우리 할머니가 늘 하셨던 성화는 이제 까지도 오르내리는 정겨운 추억이다. 손자들이 공부하는 밥상 한 가운데 켜 놓은 등잔불의 기름이 문제셨다. "왜 지름닳 쿼. 돈 들어 가는구먼." 등잔불을 켜기 위해 지름(석유 기름의 충청도 사투리)을 사야 하는데. 결국 돈이 들어간다는 말씀이었다. 그 시절, 우리들은 할머니의 호령이 떨어지기 전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언제쯤 등잔 말고 호롱불을 환히 밝혀놓고 의자에 앉아서 공부해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어머니를 도와 가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다. 형님들은 대전역에서 '지겟꾼'도 했고, 나는 구두통을 메고 대전 인동시장에서 신사들의 구두를 닦기도 했다. 첫 달 번 것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첫 열매는 그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며 몽땅을 다 교회에 헌금하시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지만 "네 평생 다 하도록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져 주실것이다" 하시던 어머니의 축복은 그때로부터 여태까지 생생하게 살아 증거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는 중 우리 어머니의 기쁨은 영글어 갔다. 큰 형님은 대전 사범을 수석 졸업하게 되어 대전 시내에 있는 학교에 발령을 받게 되어 집안의 가장이 되니 어머니께서 한숨을 놓게 되시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대전에서 잔뼈가 굵은 나를 인천으로 옮기신다. 대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인천 수상 경찰서 신흥동 파출소 급사로 일하게 하셨다. 그러나 주일날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여 HLKY 기독교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교회 예배 실황을 들으며 예배드렸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전쟁직 후 극도로 무질서 해진 한국사회! 그 당시 경찰들은 밥먹고 살기도 어려우니 이런 저런 부패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현실속에 스며있는 아픔들을 나도 고스란히 당해야 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음식점들을 돌며 그날 그날 파출소 경찰들의 무료 점심 먹을 곳을 벌어 놓아야 했고 또 수인선(수원-인천간) 철로를 따라 길게 뻗어있는 휘발유 송유관에서 미군 MP들의 눈을 피하여 휘발유를 뽑아내는 신흥동 주민들 속에 끼어 함께 기름을 흠쳤던 일 등. 이럴수 없다! 나는 기름통을 들고 도망가지 않고 일부러 미 MP에게 붙잡혀 버렸다. 초죽음이 되어 군 재판장에 서게 되었을 때다. 내 차례가 되어 죄목이 드러나고 있을 때 갑자기 뒷편에서 누군가가 나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 소년에겐 정죄할 수 없다. 이 소년에게 죄를 묻는다면 먼저 이 혼란한 사회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참 극적으로 무죄로 풀려 나오게 된 나를 신흥동 주민들은 무슨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하더니 그 후로는 그 동네 휘발유 도둑질이 없어졌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휘발유 도둑 소탕전에 어린 나를 뽑아 쓰셨구나 싶다.
원래 아버지께서는 나의 이름을 정도(正道)라고도 하여 주셨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속에서 정도를 걷는다는 것은 큰 어리석음 (大愚)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시는게 아닌가.
동인천역 앞에서 파는 중앙강의록을 사다가 틈틈이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정규 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 교통고등학교!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 돈을 내지 않을뿐 아니라 하루에 250환씩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학교! 어려운 형편에 있는 나 같은 아이들이 몰려들어 그 경쟁률이 무려 51:1 이나 되었다. 벽보에 나 붙어있는 나의 수험번호 3699번! 합격! 합격!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하였다. 3600번 줄에는 3699번밖에 없었다. 몇번이고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보고….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부담되지 않고 내 힘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그 감격에, 또 중구 쌍림동에 있는 광림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그 기쁨 감사에 하늘을 나를 듯 했다.
광림교회 고등부 담임 이셨던 미 연합감리교 선교사 Rev. & Mrs. Pinkston에 이끌려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고 있던 은평천사원에 발을 딛게 된 첫 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과연 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르치는 것 뿐이었다.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은평공민학교를 세우고 가르치기를 시작했다. 그 일이 은평천사원과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었다.
물리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해병대 입대를 결정했다. 무엇보다 해병대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 나를 죽이는 훈련만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 싸워 이겨라! 지면 죽어라.
진해 해병사관학교에서 훈련이 시작되었다. 여러 번 주일이 지나가도 주일예배를 허용하지 않았다. 편안치 않은 마음에서 어느 조회시간에 용기를 다해 발언을 하게 되었다. "13번 나정용 후보생 질문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든 나는 후보생들을 주일날엔 교회에 보내 달라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 발언을 항명죄로 처리한 중대장은 무자비한 '빳따'가 그 대답이었다. 대답은 또 있었다. 상당 기간의 훈련이 진행 되던 중 상남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마친 직후, 아직도 내 총구에선 화염이 가시지 않았는데 나를 퇴교시키는 퇴교식을 거행한다는 것이었다. 진실로 책임 있고 훌륭한 대한민국의 해병장교가 되고자 하는 나를 퇴교시키다니…. 참으로 황당했다. 퇴교 당해 집으로 돌아온 후 해병대 빳따 후유증으로 몸이 뒤틀리며 고통하는 아들에게 어머님께서는 한마디로 아들을 일으키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너를 다른 일에 쓰실 계획이신가 보다" 였다. 그러실지라도, 이글이글 불타는 한참 청년기의 가슴이 안정을 찾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쉽지 않은 '시련' 이었다.
얼마 후, 나는 공군장교 후보생 시험에 응시. 물론 합격이었다. 공군기교단에서 훈련이 시작되었다. 해병대 사관학교에서 이미 다져진 몸 이었기에 공군훈련은 어렵지 않았다. 뿐 아니라 공군 기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영적 충전을 받을 수 있었으니 여간 감사한 게 아니었다. 어느 주일이었다. 설교하시는 목사님 뒷편에 있는 십자가에서 보혈이 뚝뚝! 떨어 지더니 나를 향하여 흐르기 시작했다. 점점 엄청난 양의 피는 나를 완전히 덮더니 이를 갈며 복수심과 싸워 오던 내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늘 끓고 있었던 증오 원망은 전혀 싸-악 흔적도 없고 오히려 내게 무제한의 빳따와 퇴교처벌을 내렸던 이(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죽었다)가 얼마나 불쌍하던지 …. 지금 까지 불쌍하다. 내게 '용서'의 사건은 그런 것이었다. 엄청 크고 무거운 짐에서 풀려난 듯 편안하며 말끔히 씻겨진 새 사람 새 세상이 아닌가!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찬송과 함께 날 위하여 제물 되신 주님, 성 어거스틴의 'non posse, non peccare'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되니, 아직도 그에 대한 불쌍한 연민의 마음을 떨칠 수 없다.
노방전도에 나선다. 공군 중위 때는 김포 제14전투 비행단 Base Operation 선임장교여서 주말엔 종로교회 학생부를 맡을 수 있었다. 참으로 길 거리에서 전도지를 전하는 원시적인 전도방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열심을 축복하시어 많은 결실을 보게 하셨다.
공군 복무 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한다. 박대선총장께서 수석 졸업자에게 주시는 금 뺏지를 받으며 졸업하던 날, 북아현동 꼭대기 - 하늘만 보이는 산동네! 문패도 없는 비둘기 집에는 노오란 급전보가 속달로 온다. 내일 아침 9시까지 대한중석회사에 입사하라는 통지였다. 취직이었다. 자연스레 나의 노방전도의 무대도 회사가 있는 명동 10번지. 편안해진 생활 가운데 출퇴근 할때 나 점심시간 틈을 타 전도지를 전하지만 날이 갈수록 뭐랄까 편안함 가운데 불편함이랄까? 그냥 편안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이 더 해 가고 있었다.
드디어 회사측의 만류에도,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편안치 않은 삶을 택하기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전심 전신을 고아원으로 옮겼다. 그렇게 아들들을 대견해 하시던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살려면 결혼이나 하지 말던지 자식들이나 갖지 말던지 할 것이지 …." 하시며 말리셨다. 또 어쩌지 못해 억지춘향으로 고아원 특수목회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던 아내도 사실상 그곳 사역 중에 턱없이 고된 상황들을 겪으면서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뜻 택 할 수 없는 시련을 통해야 만 얻을 수 있는 비밀한 것, 즉 산다는 것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현장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때를 거르지 않고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하여도 저들은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목마름으로 뻥 뚫린 멍든 가슴들인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깨달아 가게 되었다. 그랬다. 영원한 목마름은 반드시 알아야 할 나의 영적 아버지-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질문이지 않은가. 나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이해 되고 풀리게 되는 것을.
비록 늦은 나이었지만 Drew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부족한 것을 부르시고 Passaic KUMC(지금의 아콜라감리교회)를 시작케 하셔서 처음으로 교회 개척의 기쁨을 보게 해 주셨다. 4년 후 교회로써의 모습이 되자 아이언 감독이 오셔서 정식 UMC 교회로 인정하는 'Chartered' 예배를 드렸다. 7년째 되는 해 , 감독의 파송에 따라 Belleville에 있는 2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영어회중인 Wesley UMC 93대 목사로 한국인인 내가 가게 되었다. 부족한 영어지만 오직 성실과 열심으로 10년을 하루같이 영어회중을 섬기던 중 오후 시간에 한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번째 개척하게 된 한국어 회중 교회였다. 전통적인 미국인 교회를 치리 하면서 동시에 한국어 회중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두 회중간의 인종간의 이해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 또한 커다란 과제였다. 거기서 타민족이 함께 공존 할 수 있는 목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점에 집중하여 Drew 신학대학원 D. Min 과정의 논문을 썼던 것이다. 일마다 때마다 내 삶의 하나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오직 그분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이제야 말로 내게 맡겨주신 선교의 현장임을 깨닫게 되었으며, '선교사' 로서의 사명을 더 느끼게 될 즈음, 메이 감독께서는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 12개의 소수민 교회를 구상하고, 그 중 워싱턴 디씨 근교에 불어나는 한국 이민자를 위하여 한인교회 개척을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에 응하였다. 예배드릴 처소 '교회'를 찾는 것이 어려웠으나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던 중, 한 음식점을 빌리게 되었다. 사방에 음식 가격표만 붙어있는 환경에서 예배를 드렸다. 소식을 들은 연회는 온통 감격이었다. 우리의 예배 실황을 찍어, 연회에서 발간하는 성경책 앞머리에 실었다. 나는 내 후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으로 2권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이것이 미국에 와서 세번째 개척한 교회이었다.
미 중남부 Jurisdiction에서 8주(텍사스, 루이지애나, 캔사스, 알칸사, 오크라호마 ,미조리, 뉴멕시코, 느브라스카) 16연회를 돌며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기존 한인교회를 후원하는 사역 담당자인 선교감리사 모집에 원서를 제출했다. 12명의 search comm.는 기꺼이 나를 뽑아 주었다. 텍사스 주는 자동차로 다니며, 그 외의 타주는 주로 비행기로 다니며 밤도 낮처럼 열심을 다하며 텍사카나 연합감리교회를 비롯 5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북 텍사스 연회에서 달라스 남부에 위치한 KUMC 하나가 13년이 되어도 제구실을 못하여 교인수는 8명으로 줄어들고, 도저히 장래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 문을 닫으려 한다는 소식은 나로 하여금 그냥 편안하게 은퇴하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그 교회를 맡겠다고 자원 하여 2년간 열심을 다 해 섬긴 후 내 아들보다 더 젊은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나는 은퇴했다. 지금 그 교회는 꾸준히 성장, 아담한 교회당까지 마련, 이번 봄에 입당예배를 드릴 예정이라는 승전보가 왔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던 것이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일러주며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신 하나님!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 입니다.(빌 3:10)"하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나도 따라 하게 하신 하나님!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를 열창케 하신 하나님! 감당키 어려운 시련 중에도 부르심을 기억하게 하신 하나님! 찌그러진 헛간 하나 없을 지라도 때마다 필요를 채워주시며 응원하신 하나님! 만 입으로도 다 감사할 수 없다. 이제까지 거쳐 온 별별 일들, 순탄치 않고 구차한 일들까지도 다 하나님을 증거케 하셨으니 지나 온 길, 머물렀던 곳, 소중한 마음들, 힘 겨웠던 일… 등 살아 온 모두가 다 기적이고 은혜였다. 돌아보니, 아 - 신나는 행진이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