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을 만나다 (HITORICAL TO HISTORIC)
11/17/14
오제근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학과 졸업1999 (MA)
Pratt Institute, NY (major in communication Design)2003 (MS)
Freelancing graphic designer
현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
현 수원 온누리교회 English Ministry 담당 전도사
내가 1990년 대학에 입학할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하였다.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뒤범벅된 학교에서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선배들의 이념교육이었다. 민주화, 노동해방, 통일, 반미 등등 학교 구석구석에는 대자보들로 도배되었고 내가 생각했던 그런 낭만과 자유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뭔가 찾으려는 고민들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각종 사상과 이념에 관련된 학회와 그룹들이 많이 있었고 역시 기독교성경 모임도 많이 있었다.
지금은 카자흐스탄에서 자비량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그때 당시 사회학과 선배(현재 선교사)와 함께 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에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 2절이 내 삶의 방향을 보여준 말씀이 되었다. 이 말씀에 소명을 처음 가지게 되었지만 도대체 내게 '복'은 무엇일까? 분명히 돈이나 명예는 아닌 그런 복인데 왜 이 말씀을 주셨을까?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삶과 사명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해야 했다. 아브라함의 삶을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그런 삶이 바로 선교사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분명한 소명은 있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삶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분명하였고 무엇보다 나의 삶의 가치관과 주인이 하나님 이라는 확신이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는 것이 바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주시는 길로 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무튼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는 것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길로 간다는 '막연한 확신' 혹은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일찌감치 어린 시절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임재, 즉 내 삶 가운데 어떻게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머릿속에만 남아있던 아브라함. 그리고 하나님과 언약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 그대로 묻힌 채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시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다. 그 때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듯이 나에게 '그 언약'을 들고 나를 찾아 오셨다. 잊고 있던 사명을 가지고 이번에는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닌 오제근의 하나님을 만날 차례였다.
"하나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할 한달 간의 이스라엘 선교여행을 1999년 여름에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사역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삶이 바로 나의 길임을 확신하였고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받은 여권으로 간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땅, 그리고 언약의 땅! 그러나 내가 보게 된 것은 성지의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찢어진 마음과 그 자녀들의 고통소리였다. 이제 나에게 새로운 소명,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소망이 생기게 되었고 나의 인생 목표는 더욱 분명해 졌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그리고 소명과 사명으로 같이 인생길을 가게 될 아내도 만나게 되었다. 내 아내도 사모로서 헌신하려는 준비와 기도를 하는 가운데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이 불과 1년 안에 이루어 지게 되었다.
솔직히 당시만 해도 목회를 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다. 그때 당시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평신도 사역 혹은 제자운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UBF같은 경우 대다수가 평신도로 선교와 전도, 설교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공부는 전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평신도 자비량 선교가 더 효율적이고 목회자 신분으로는 모슬렘 같은 닫힌 선교지는 힘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때만 해도 목사, 전도사하면 시커먼 성경책 끼고 심방다니는 것으로 생각 했기 때문에 신학교 간다는 것이 좀 부끄러웠다. 더구나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디자이너들의 세계에서 다시 '신세계 신학교'로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신학생 전도사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그림 같았다. 사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후 제일 큰 고민이 바로 나의 '정체성' 문제였다. 혹시 노방전도 시 혹은 길거리를 가다가 아는 동창들이라도 만나면 "너 여기서 뭐해?" 이런 질문을 받을 까봐 혹시라도 주위를 살피곤 하였다.
그리고 뉴욕에서 공부를 하며 내 생활에 묻혀 있는 동안 유대인 사역은 조금씩 잊혀져 갔고 앞으로 은퇴 후 사역을 계획하기로 하였다. 물론 뉴욕은 유대인들(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에게는 예루살렘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나의 비전과 소명을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또다시 나의 삶 속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은 희미해졌다. 더구나 교회에 대한 실망 또한 컸다. 아내가 성악을 전공한 관계로 여러 미국 현지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뒤에서 보면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물론 대도시 교회는 이민자들이 세우고 물려받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들의 모습이 앞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나 같은 7~80년대의 부흥을 경험하고 신앙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세대만이 썰렁한 한국교회를 지키지 않을까. 교회의 타락으로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에서 나와 내 가족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망해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더 이상 소망을 둘 필요가 없었다. '부흥 2000', '평양 대 부흥'과 같은 의미 없는 메아리만 외치는 교회에 뭘 더 바랄까? 조용히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미경이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은퇴 후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은퇴 후 은행구좌에 돈을 마련할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고… 더구나 아브라함의 약속은 그의 4세대가 지나서야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겨우 믿음의 유산이자 자녀인 이삭만 남겨둔 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은 딸아이 미경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내 세대에서는 이룰 수 없는 언약인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만큼 나에게 사역에 대한 소명과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게 된 것이 있었다. 일제치하 식민지 기독교인들과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 그의 제자 김교신, 그리고 오산학교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선각자들이 일본 유학당시 우치무라 간조를 통해 듣게 된 복음을 받아들여 개종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배운 것은 일본의 기독교가 아닌 '조선의 기독교'이며 오직 예수복음만이 조선민족의 혼을 깨우칠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고 오산학교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오산학교의 민족교육, 곧 예수복음으로 조선을 뒤집어 놓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순교자 소양 주기철, 고당 조만식을 비롯하여 교회는 물론 조선의 사회, 정치, 문화까지 오산학교를 빼고 조선의 독립을 말 할 수 없었다. 정말 오늘의 교회가 다시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한국교회의 부흥이 교인의 부흥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혼을 깨우는 부흥이 아닐까? 우치무라와 그의 제자들처럼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
그러던 중 민권운동으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쓴 마틴 루터 킹은 또다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명을 일깨우게 된다. 당시에 나에게 교회라는 존재는 단지 ‘신앙의 모임’이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무기력한 교회에서 조용히 신앙생활이나 하고 나의 딸에게 믿음을 잘 전수 하는 것이 '아브라함'으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사역자로 길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교회가 너무나 무기력하고 패배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교회자체가 전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부흥'에 대한 '망상'을 꿈꾸는 것 같았다. 이런 교회에서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기회를 보게 된 것이 마틴 루터 킹이었다. 그동안 자유민주주의 나라 미국에서 50년 전 있었던 일들을 알았을 때 나에게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처음 워싱턴 디씨에 있는 미국사 박물관 입구를 장식하는 'Lunch Counter'를 보게 되었다. 60년대 초 한참 인권운동이 활발할 때 당시 용감한 흑인들이 '겁도 없이' 백인들만이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남부에서 발생하였다. (물론 남부는 가장 예수복음에 열심이며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들과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물러나기를 거부한 '용감한 흑인들'은 야만적인 폭력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최소한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소중한 목숨까지 잃는 일도 많았다.
이러한 비열하고 야만적인 인종차별과 더구나 교회가 흑인들에 저지른 죄악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교회와 세상의 변화를 이끈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사역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접어두었던 사역의 꿈을 되새김질 하게 되었다.
알라바마에서 그의 첫 번째 사역은 버스 보이콧이었다. 백인은 앞자리 흑인은 뒷자리에 앉아야 하며 만일 백인이 뒷자리로 오더라도 흑인은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이것은 법이었고 어길 때는 형법으로 처벌 받았다. 이것인 기독교국가 미국이라니! 한국에서 알고 있던 자유와 정의의 나라,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라고 교회강단에서 칭찬이 자자한 미국이라니! 한쪽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주권을 경멸하는 인종차별을 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이 됐다는 신화를 그것도 한국교회에서 성경처럼 믿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흑인들의 '시민 불복종'은 결국 백인들의 흑인교회에 대한 폭탄테러로 이어졌고 대다수의 남부 백인교회는 침묵했다. 마치 한국의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에 침묵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그토록 선망하는 미국교회가 그러하였고 또한 소위 빛깔 좋은 '복음주의'라는 한국교회는 세상과 담쌓고 세상이 어떻게 거꾸로 가고 절망가운데 살더라도 제자훈련 잘하고 부흥하면 하나님 은혜요 축복인가? 좋은 영향은 고사하고 온갖 모욕과 조소를 한 몸에 받는, 더구나 그 와중에도 세계선교와 교세를 자랑하며 부흥을 꿈꾸는 한국의 교회에 대해서 정말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나? 차라리 무교회주의자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 (사실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탈권위,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아주 적극적인 '교회 살리기 운동' 이었다.) 교회를 계속 다닐까? 말까? 이런 생각 중에 신학교를 입학하여 목사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을 바꾼 것은 유명한 정치인도 (당시 아이젠하워와 케네디는 흑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까지 동원하였지만 인종차별을 완전히 철폐하지 못했다) 사상가도 아닌 바로 알라바마의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시골교회였다. 하나님은 바로 교회를 사용하셨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남부의 시골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셨다. 다시금 하나님의 소명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다시 소명을 확인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일에 대한 성취와 욕심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내일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일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소명'을 다시 확인 시켜 주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게 하시고 인도하신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분명한 그분의 계획을 기억하게 하였다. 다시는 광야의 길을 헤메지 말고 하나님이 가라고 한 길을 분명히 가라고 권면하였다. 솔직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역을 하면서 '은퇴 후' 평신도 사역이 아닐까? 정말 이 길인가? 나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약속인가?
올해 두려움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난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렘 16:14~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여전히 과거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만 하나님을 생각했지 오늘날 함께 그들과 역사하는 하나님을 알 지 못했다. 마치 야곱이 얍복에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 곧 지금 야곱과 함께 일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알게 된 것처럼(창 32:28~30) 바로 3000년 전 아브람함의 하나님이 아닌 바로 오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영어이름은 JJ였다 (MONEY TREE, 은행이름; 일단 돈을 많이 벌 것 같은 좋은 이름 같기도 했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쓰기가 쑥쓰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3000년 전 믿음의 조상이고 당시의 어차피 나의 약속은 내 세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을 것 같으니까 아브라함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신학교에 입학 후 (지금 다니고 있는 횃불트리니티는 영어로 수업하는 INTERNATIONAL SEMINARY) 에이브(아브라함애칭)을 쓰게 되었다. 다시 내 이름을 회복하였지만 여전히 나의 MENTALITY에는 3000년 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남아 있었다. 마치 야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고도 자신과 씨름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 본 것처럼 나 역시 '오아브람함'의 '존재감'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 나와 일하시고 언약을 성취하시는 '오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의 머리 속에 마치 역사적 사실이 동화처럼 전설처럼 내려오던 조상들의 출애굽 하나님이 아니라, 흩어져 포로된 백성을 회복하시는 '지금의, 그들의, 현재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은 처음이 아니었다. 맨처음 이말씀을 받았을 때는 하나님께서 전세계 흩어진 유대인들을 모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리라는 절대회복의 예언적 말씀으로 받았지만 이제는 이 말씀이 바로 나의 사명과 하나님께서 3000년 전 일하시는 HISTORICAL GOD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일하시고 이루어가시는 현재의 오아브라함의 하나님, HISTORIC GOD으로 오신 것이다! 오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하셨던 분일 뿐 아니라 현재 나와 함께 3000년 전 아브라함 보다 더 큰 놀라운 계획과 섭리로 일하시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불확신과 방황은 없다. 나의 하나님, 현재 나와 함께 일하시는 HISTORIC GOD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4세대가 지나서 성취하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닌 현재 이루시고 나의 세대에서 보여주시는 '지금의 오아브라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며 나의 삶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루시고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그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