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1호

영성의 기본 : 하나님 앞에서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10/26/14   김에스더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과 (B.A.)
프린스턴 신학교 목회학 석사
예일대학교 신학부 신학 석사
드루대학교 신학부 목회학 박사
미국장로교 (PCUSA) Palisades 노회 소속목사
개신교수도원수도회 제2대 수도원장

개신교 수도원에 오신 여러 목사님들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개신교수도원 수도회(Protestant Abbey Mission)는 2010년에 김창길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뉴저지장로교회의 한 안수집사님이 10만 불을 헌금하심으로부터 잉태되었습니다. 5만 불은 교회에 선교헌금으로 나머지 5만 불은 김창길목사님이 원하는 데에 쓰시도록 지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다음해 안식년을 가지시고 그해 말 은퇴하신 김창길목사님은 기도하시며 평소에 관심이 있던 수도원사역을 은퇴 후에 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저와 다른 이사님 몇분이 join하셔서 2011년 1월 1일 개신교수도원 수도회(PAM)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년 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PAM을 시작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 사모님들, 그리고 관심 받지 못하고 있던 작은 자들을 섬기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은 영성의 기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팔복 중에서 첫번째 복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자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니 너희는 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라 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첫번째 의미는 복이 있다(blessed)라는 단어는 앵글로 색손어에서 고대 영어의 명사 blod(blood 즉 '피')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물건이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졌을 때 그것은 복을 받을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이 단어는 성화 또는 봉헌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복된 성체'(Blessed Sacrament) 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오늘날 음식을 앞에 놓고 하는 기도를 영어로 blessing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음식과 우리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의미는 영어 단어 blessed, 복이 있다는 라틴어 benedicere(베네휘체레 또는 베네휘케레)를 영어로 번역한 말인데 라틴어의 본래 뜻은 '좋게 얘기하다, 즉 칭찬하다'를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께 대해서 사용할 때는 찬양하다 라고 번역하고 사람에게 사용했을 때는 축복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하셨는데 원래 의미는 원수를 칭찬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고 모함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번째 의미는 bliss라는 의미 즉 행복, 천국의 기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bliss는 영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고 비신앙적인 기쁨을 나타내는 데는 blithe 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 일에 좌우되지 않는 영적인 행복으로써 세상에서의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우울한 사건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기쁨과 행복으로 넘치게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CEV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으로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도 얼마나 영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무엇을 복이라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불신자들이 구하는 것과 똑같이 물질이나, 출세나, 건강, 자녀 잘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있어야 되죠.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먼저 구하느냐 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지요.

이제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헬라어에 가난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페네스라는 단어인데 남을 도와 줄 여력은 없으나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상태의 가난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프토코스라는 단어인데 절대적인 극빈상태를 말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외부로 부터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철저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영적으로 자신이 파산 상태임을 아는 자, 자신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인 것을 인식하고 마음이 낮아져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파악하는데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속한 공동체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나는 누구인지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사회나 공동체 속에서 남이 인식하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성령의 빛이 비칠때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할 때의 마음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귀족이었고 웃시야왕의 사촌으로 고위직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고 난 후 그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이와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6:5-7)" 사회적으로는 잘나가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고 말 합니다.
또한 누가복음 5장에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노력하였으나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낭패와 실망가운데 빠져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그물을 내렸을 때 두 배에 가득 고기가 잡히게 되어 동무들까지 불러서 고기를 쓸어 담았을 때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하잘 것 없음을 깨닫고 그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연약함과 죄악 된 모습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면 죄를 깨닫고 회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또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몇가지 특징을 갖게 됩니다.
첫째, 겸손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화상을 갖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해지고 낮아지면서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인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됩니다. 깊은 상처가 있거나 실패를 반복하게 되면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화상을 갖기 어렵습니다. 출애굽기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가 애급왕자의 자리와 궁궐생활의 영화를 버리고 동족을 위해 살고자 했지만 동족과 애급인 모두에게 배척을 받게 된 것은 모세에게 참으로 비극적인 트라우마로 남게 됩니다. 그후 40년 동안의 미디안 광야 생활에서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찾았지만 수면 안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실패에 대한 상처가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는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부정적인 자화상에 갇혀 있는 것을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의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정결케 된 후(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고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이전에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며 '나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화상을 갖게 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총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계획이 있다 즉 자신을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하게 느낄 때가 어느 때입니까? 물론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을 알고 매일 쓰임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저는 수도원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시고 사용하시는 사랑을 매일 경험하는 기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자원봉사자로 여러분을 섬기고 계신 분들은 수도원 성경반에서 출애굽기를 공부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몇일 동안을 수고하시면서도 기쁨으로 감당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 나를 사용하시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아 가기 때문인 것을 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외치며 다윗을 칭송합니다. 다윗이 왕인 자신보다 더 인기가 높은 것을 알게 된 사울은 질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을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결코 남의 성공에 흔들리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인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계획이 다르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계획이 다르며, 각자에게 주신 은사도 다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훌륭한 점은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남의 잘하는 것은 배워서 보충하고 내가 잘 하는 것은 나누면 되기 때문입니다. 질투하는 대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은 피조물로 소중히 여기며 아껴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말은 마음이 부요한 자 즉 자만심이 많은 자라고 하겠습니다. 자기 의로 꽉 찬 사람이라고 보겠습니다. 자기는 신앙이 좋다고 의롭다고 잘 낫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눅18:9-14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이 토색, 불의, 간음도 하지 아니하고 세리처럼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일주일에 이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입니까? 그의 오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에 자만심이 생긴 것입니다. 비록 그런 나쁜 짓은 안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다른 죄를 저지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아무도 진정으로 남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불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순종하는 교만으로 가득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이미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만유가 존재하기 전에도 계셨고 시간과 공간과 만유가 다 사라질지라도 계속 존재하시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흠과 티가 없으신 하나님, 무한히 전능하신 절대적인 하나님,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 불꽂같은 눈으로 우리의 언행심사를 다 살피고 계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 평강, 희락(롬14:17)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지 않으면 마귀의 통치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통치 하에 있게 되면 불의, 불화, 슬픔 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초가집에 살거나 궁중에 살거나 어디를 가든지 천국이 그를 따라 다닙니다. 가는 곳마다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영성의 기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회개할 수밖에 없으며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새사람 만들어 주시는 은총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인 줄 알게 되어 하나님, 자신,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며 어디를 가든지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

개신교수도원수도회 Protestant Abbey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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