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5호 (Mar. 2012)

하나님이 내 인생에 마침표 찍으실 때까지...

11/19/14   최세나

뉴저지장로교회 부목사 ( 영아부와 장년부 )
서울소망교회 유치부전도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프린스턴신학교 (M. Div.)

2012 년 1 월 10 일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비행기 안에서 입국산고서를 작성하는데 직업을 쓰는 칸이 있었다 . 나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 목사 ” 라고 적어 넣었다 . 그리고 인천공항에 도착을 알리는 비행기 바퀴소리를 들을 때까지 , 혼자서 이런 저널 생각을 해보았다 . 나는 “ 목사 ” 라는 두 글자를 망설임 없이 쓸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은 신기하고 , 아직도 어색하고 , 하지만 감사한 …. 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을 조금이라고 함께 나누면서 ,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글을 통하여 소개하고 싶다 .

 

“ 하필 ” 외 저를 부르셨나요 ?

1993 년 겨울은 내가 선지동산이라고 불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교정을 처음 밟은 때였다 . 목회자의 딸로 스무해를 살았던 나였지만 신학교라는 공간은 내게 그리 익숙한 곳도 ….. 있고 싶은 곳도 아니였다 . 왜냐하면 …… ( 내가 신학을 처음 시작하게 된 동기를 아무리 아름밥게 설명하려고 해도 잘 생각이 나지 않기에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 전기대학에 실패한 후 후기로 장신대 기독교교육과에 입학했개에 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신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 함께 입학한 동기들 중 많은 친구들이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장신대 교정에 신학함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때 , 나는 항상 ‘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 하나님은 왜 하필 저 같은 사람을 이곳에 있게 하시나요 ?” 하는 질문을 하면서 내 인생에 소리없이 티나지 않는 소위 “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방황 ” 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 왜 소리없이 티나지 않는 방황이였을까 ? 그것은 아마도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나에게 있었던 ( 없어도 되는 ) 책임감과 자존심 때문이였던 것 같다 . 이쯤에서 대학교 3 학년때즘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든지 하는 감동적인 글을 써야 할 것 같은데 …. 안타깝게도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무런 소명도 , 어떠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냥 선지동산을 하산하고 말았다 .

 지금도 나는 장신대의 4 년을 “ 기적 같이 버티기 ” 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 나는 편의점에 가서 껌 하나를 살때도 치밀한 계획과 목적이 없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데 , 많은 몰사 후보생들 사이에서 아무런 부르심에 대한 확신없이 4 년을 지각 , 결석조차 거의 안하고 마쳤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신기하고 기적같다 . 하지만 이 기적은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 바로 나의 영원한 친구이자 , 동종업계 (?) 네 종사하신 나의 멘토 , 나의 아버지 [1] 최기석 목사님이다 . 조금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 아빠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 장신대의 8 학기 중 거의 6 학기를 아빠는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장자는 나를 깨워 “ 세나야 , 학교가자 !” 하시면서 나를 학교에 데려다 놓으셨다 . 그리고 학교가는 차 안에서 한국교회의 기독교교육을 위한 비젼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이야기해 주셨다 . 어느덧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매일 아침 아빠와 학교 가는 길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각하게 되었다 .

 비록 선지동산에서 내가 가장 많이 질문했던 “why me?” 하나님 , 하필 왜 저예요 ?” 라는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없이 졸업했지만 , 내가 질문했던 “ 하필 ” 은 지금 돌아보면 “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필요해서 허락하신 시간들 ” 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 선지동산에서 하나님은 한때 주도면밀하고 , 조급하고 , 야심많았던 나에게 “ 뚜렷한 것이 보이지 않아도 —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해도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 , 싫어도 그 자리를 떠나보지 않는 것 ,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자리에서도 끝까지 버텨보는 것 ” 을 연습하게 하셨다 . 그리고 18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계속 그것을 목회현장에서 연습하고 있다 . 나의 불평속에서 나온 “ 하필 ” 이면이 ..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필요해서 마련해 주신 시간이였을줄 이야 ….

부르셨다면서 왜 상황을 열어주지 않나요 ?

장신대 학부 (B.A.) 를 졸업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었다 .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는 날 다시 이 선지동산에서 기쁨으로 공부하겠다고 ….. 그래서 나는 신대원 (M. Div) 과정에 바로 입학하지 않았다 . 대신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독교교육가인 아빠가 공부하셨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 그러면서 1998 년 19 월에 첫 사역을 소망교회 유치부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 존경하는 선배 교역자님들 , 사역자보다 더 열정적인 선생님들 , 그리고 정말 맑고 순수한 눈방울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너무도 행복했고 감사했다 . 나의 토요일 전부를 설교준비 ( 유치부 사역이라서 매일 설교자료를 만드는 일이 많았다 ) 에 투자해도 내 청춘이 결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을만큼 즐거운 나날들이였다 .

 그런데 어느 따뜻한 주일 , 여느때처럼 유치부 친구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강단에 올랐는데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나왔다 .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모으는데 열중하는 아이 , 잘 모르는데도 제비처럼 입을 벌리며 열심히 찬양하는 아이 , 말씀을 들으려고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서 전도사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내 입술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 . “ 하나님 , 저 이거 하다가 지금 죽어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 저 하나님 만날 때까지 말씀 전하는 이일 해도 될까요 ?”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 하필이면 왜 나냐고 원망 섞인 질문을 했던 내 입술에서 이런 기특한 (?) 고백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이제야 방향이 뚜렸한 길을 찾은 것 같아서 감사했던 부르심의 순간이였다 .

 그때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 그런테 그것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 과거에는 그렇게도 뛰쳐나오고 싶었던 선지동산이었건만 , 신대원 진학을 위해서 이번에는 내가 그곳을 자원해서 들어가겠다고 입시의 문을 두드렸는데 결국 또 실패한 것이였다 . 그것도 매우 부끄러운 모습으로 …. 면접때 아빠를 잘 아시는 교수님이 나에게 ‘ 이런 것도 한번에 못붙고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 구나 ,” 하는 소리도 듣고 , 내가 사역하고 있었던 부서의 교사는 신대원에 진학했는데 , 교역작인 나는 떨어져서 에매한 상황속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도 겪어보게 되었다 .

 언제나처럼 나는 또 하나님께 원망섞인 질문을 했다 . “ 하나님 , 저 목회자로 브르셨다면서요 ? 제가 처음부터 한다고 한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맘잡고 주님 일좀 하려고 하는데 왜 저를 이렇게 부끄러운 상황에 두시는 거예요 ?” 이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보다가 다윗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 양을 돌보다가 들어온 다윗에세 사무엘이 졸지에 기름부어 왕이라고 했지만 , 그는 왕이 된 이후에 더 많이 도망다니고 , 때로는 이방나라의 왕 앞에서 미친척까지 해야하는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 라는 이 리얼이티 떨어지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그가 마냥 신기하고 부럽기만 했다 .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샐패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의 자세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하셨다 . 하나님이 진정 내게 원하셨던 것은 “ 하나님의 원하신다면 제가 그 일을 해드릴께요 .” 라는 적선식의 순종이 아니라 , “ 하나님 , 저 하나님의 일 정말 하고 싶어요 . 저 꼭 하게 도와주세요 .” 라는 소원을 갖고 순정하는 고백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

그가 나를 부르셨다

2003 년에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해서 1 학년을 마치고 난 뒤 내 인생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 바로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던 한 사람을 알게 되어 결혼사게 된 것이다 .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 정들었던 동료들과 성도들 , 어렵게 다시 시작한 신학수업을 다 내려놓고 2004 년 1 월에 미국 뉴저지에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잠시 내가 무엇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 버린채 … 그렇게 딱 1 년을 정말 신명기 24 장의 말씀에 의지하여 한가로이 집에서 쉬고 있었다 . 결혼한지 1 년이 되어 , 남편을 따라 출석하고 있었던 뉴저지 정로교회에서 유치부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 다시 사역을 시작하게 된 나는 마치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는 듯한 흥분과 에저니가 느겨졌다 .

 한국을 떠나오면서 , 내가 가슴으로 계속 되새겼던 히브리어가 있다 . “ 크라아니 ” 이말은 “ 그가 나를 부르셨다 ” 라는 뜻이다 . 신대원 1 학년 2 학기 히브리어 원전강독 시간에 이사야 49 장 1 절 말씀을 공부하면서 “ 여호와께서 태어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나를 기억하셨으며 —” 라는 말씀을 보면서 , 형광펜으로 몇번이나 줄을 그으며 내가 어느자리에 있든지 이 말씀을 기억하겠노라 결심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었다 . 미국에 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역하고 신학수업을 해야 할지에 대한 아무런 계획과 준비도 없었지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이곳에서도 나를 기억하시고 , 준비시키시고 , 일하게 하실꺼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익숙한 곳을 떠나는것과 하던 것을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나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

 자연스럽게 사역도 싲가하게 되었고 ,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M. Div 과정을 2 학년으로 전학해서 다시 학업의 기회도 얻게되었다 .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공부하다는 것은 예상보다 쉽지 않은 일이였다 . ( 지금은 이렇게 우아하게 말하지만 나는 프린스턴의 첫학기를 매일 눈물로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그런데다가 결혼생활 3 년동안 그렇게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생겨서 , 신학교 4 학기 동안 3 학기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유산까지 경험하면서 정신없이 보냈다 .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잠 못잤고 , 가장 자존심 상했고 , 가장 말수가 적었던 학교생활이 바로 그 시간이였다 .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사야 49 장 1 절의 말씀을 기억하며 “ 크라아니 ” 를 마음 되새겼다 .

 신학교 졸업 후 목사고시를 준비하면서 유산의 위험이 있어서 목사고시를 그 해에 포기 했을때도 ,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고 양육을 위해서 사역을 내려놓아야 했을때도 , 나는 아이에게 젖을 무리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억속에 내가 있음을 항상 잊지 않았다 . “ 크라아니 ” 다른 이가 아닌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

하나님이 내 인생에 마침표 찍으실 때까지 ……

2011 년부터 뉴저지 장로교회에서 다시 사역을 시작하면서 , 그 해 10 월 9 일에 나는 KPCA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 나 는 이제 막 목사된지 4 개월하인 “ 따끈따끈한 목사 ” 다 . 2010 년 한해동안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역을 쉬고 있었을 때 , 한국에 계신 아빠가 담낭암 수술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 나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갑자기 서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38 년을 하나님 일 하시느라 애쓰셨던 우리 아빠가 암이라니 …. 이제 은퇴하셔서 편하게 쉬셔야 할텐데 …. 평생을 주를 위해 충성한 결과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 그렇다면 나도 …?’ 그런데 아빠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평안을 주셨다 . 그리고 아빠의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어느 순간 나는 이전에 했던 원망대신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 . “ 요즘 세상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암에 걸린다고 하는데 … 한걸리면 좋겠지만 만약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 하나님 일 하다가 아프게 된다면 다른 세상의 나쁜일 하다가 질병을 얻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 내가 하나님 일하다가 죽는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 이것이 바로 내가 안수를 받기 전 하나님께로부터 최종적으로 점거받은 “ 삶과 죽음의 문제 ” 에 대한 부분이였다 . 그리고 암으로 투병중인 아빠에 대한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잠시 뒤로하고 병중에도 공동체 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시는 아빠를 존경하고 나도 그 삶을 따라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 89 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졌으면서도 다시 인도의 선교지로 나갔던 E. Stanley Jones 목사님의 고백처럼 “ 하나님이 내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실때까지 내가 먼저 쉼표를 찍지 않겠다 ” 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

항암제를 드시면서도 여전히 말씀보시고 , 무릎으로 기도하시는 아빠의 모습 속에서 다니엘의 모습이 떠오랐다 . 다니엘서 10 장에 다니엘은 더 이상 소년 다니엘이 아니였다 . 고레스왈 3 년를 살아가도 있는 다니엘 , 바벨론 포로기 70 년 이후 3 년을 더 보내고 있는 그는 못 먹어도 85 세는 족히 된 노년이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두렵고 떨림으로 듣고 , 스스로를 겸손하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 하는 “ 하나님 앞에서의 익숙함이 없는 신앙의 모습 ” 을 가지고 있었다 . 하나님은 그런 겸손한 다니엘이 필요하셨던 것이었으리라 ….. 나도 하나님이 나의 평생을 들어 필요로 하시는 종으로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시기전에 먼저 쉼표 찍지 않는 순종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주님의 종으로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

개신교수도원수도회 Protestant Abbey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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