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4호 (Dec. 2013)

지속 가능한 환경과 사회를 위한 기독교 공동체

11/19/14   오화철

연세대학교 신학과 (B. Th.)
연세대학교 대학원 (Th. M. 기독교윤리학 전공 )
밴더빌트 신학대학원 (M. Div.)
현재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박사과정중
(Ph.D. candidate in Psychiatry and Religion)
현재 해외한인장로회 (KPCA) 뉴저지노회 소속 목사

존 캅의 과정신학을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위해서 인류가 그동안 착취해온 환경은 이제 이상기온과 환경재앙으로 인류에게 응답하고 있다 . 과연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과정신학자 존 캅은 앞날과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한 많은 변화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알려진 것처럼 , 과정신학은 변화하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창조적 활력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신 즉 살아있는 신을 지향하는 신학으로 볼 수 있다 . 캅은 현재 우리의 파괴적인 생산과 소비 형태들의 기세는 압도적이며 만약 지구의 장래에 관하여 깊이 염려한다면 , 우리는 절망에 빠진듯한 기분이 들 정도라고 밝힌다 . 최상의 것을 바라고 또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절망한다면 , 그 땐 참으로 희망이 거의 없을 것이고 ; 만약 우리가 절망한다면 우리는 꼭 성취되어야 할 필요가 잇는 것에 책임감있게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John B. Cobb, Sustaining The Common Good, p.3).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은 절망은 반대하며 ,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의 가르침은 곡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일에 책임있게 참여하도록 결려해야 한다 . 그렇지만 , 기독교의 가르침은 종종 그 의도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실패하는데 , 그 결과로 기독교에 대한 비평가들은 기독교적 교훈이 책임있는 행동을 방해했다고 분명하게 비난하였다 . 그것은 바로 두 가지 견해로 볼 수 있다 .

첫째로 , 기독교의 가르침은 희망의 장소에 대한 확신을 줌으로써 책임있는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다 . 만약 우리가 필수적인 절박성을 가지고 행동하려 한다면 ,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현재의 위기를 뜷고 나갈 열린 가능성들이 미래에 있음을 믿을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오히려 만약 우리가 사실 진정한 위험은 없으며 , 모든 것은 우리를 돌봐주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 그 땐 절박성은 사라지게 된다 . 믿음이 깊은 기독교인들은 만족스런 평온함으로 행동주의자들을 바라보며 , 그리고 걱정하는 그들을 꾸짖는다 .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염려를 극복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 우리의 각자는 우리의 본분을 다하여 한다 .

둘째로 , 많은 현대 기독교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 전적인 ” 책임을 지움으로써 책임있는 활동을 방해한다 . 우리는 하나님이 세계를 우리에게 양도했다고 믿는다 . 이러한 종류의 가르침은 , 이신론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와 그리고 우리가 행동해야 할 원리들을 창설하신 다음 , 우리를 이 세계에서의 자유로운 행위자로 살게 하셨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 이러한 경우에 무거운 책임이 우리에게 떨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도움도 없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 이러한 기초에 따르면 , 우리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 인간행동의 미래를 기대할 아무런 이유도 갖지 못하며 , 따라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희망이 없는 그 곳에도 여전히 책임은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희망이 없이 수행되는 책임은 너무 큰 짐이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요청되는 실행과 태도의 변화를 자극할 수 없는 것이다 .

존 캅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상황에 대한 한층더 복잡한 선반성적 이해가 이러한 단순화된 견해들을 조절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표현되어왔다고 지적한다 . 신적인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 기독교적 행동은 양쪽을 다 동반한다 . 피조물의 활동과 동떨어진 신적 활동은 없다 . 그러나 이와 똑같이 신적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에 있어서 희망의 원리인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어난 일들에 대해 책임이 많으면 많을수록 , 그만큼 인간의 책임은 적다거나 , 혹은 인간의 책임이 많으면 많을수록 , 하나님은 그만큼 할 일이 적다고 생각함으로써 , 우리는 행위에 대한 책임을 구분지을 수 없는 것이다 . 반대로 , 하나님의 활동이 가장 분명하게 식별되는 곳은 분명히 인간 행위들의 가장 자유롭고 또한 가장 책임있는 곳에서인 것이다 .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이러한 기독교의 직관들에 대한 개념적인 설명을 분명하게 표현하였으며 , 그리하여 그는 과정신학으로 하여금 책임있는 행위에 대한 사명을 수립하게 할 수 있게 하였다 . 과정신학에 있어서 미래는 진정으로 열려 있으며 ,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그들 자신들을 파멸시킬 수 있도록 현재 그들에게 허용되어져 가고 있는 모둔 수단들을 피할 수 있는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위험은 정말로 사실이며 ,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무서운 저 공포들을 막아 줄것이라는 신뢰의 태도는 신앙안에서 소극적 태도이고 무책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존 캅은 유태인의 대량학살 즉 아우슈비치 (Auschwitz) 를 “ 허용했던 ” 하나님은 피조물이 하려고 선택하는 어떤 것도 허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나란히 있는 또 다른 행위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오직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실 뿐이다 . 그러나 미래가 참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은 또한 자기 – 파괴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은 피조물들 안에서 그리고 피조물들을 통하여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 미래의 개방성은 단순히 미래가 요소들의 복잡성 때문에 , 혹은 요소가 그것에로 들어가기 때문에 , 지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미래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은 가능성들의 영역을 전부 고갈시키지는 않았으며 , 그리고 바로 하나님 때문에 아직 이러한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의 얼마는 그들의 구체화를 위한 효과적인 매력으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옛 관습들을 타파할 , 모든 사물들을 다르게 볼 , 그리고 아직껫 전혀 꿈구어보지 못했던 것을 상상할 기회들을 제공하신다 . 하나님은 다른 존재들을 새로운 통찰들에 응답하도록 개방케 하며 ,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활동하신다 .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행하시도록 허용하는 한 ,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의 근것인 것이다 .

이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라도 모든 것이 잘 되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다 .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현명하고 선하다는 확신이다 . 그것은 곧 우리자신들이 이러한 요청에 대해 민감하게 되는 일이며 ,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에 의해 안내되고 또한 인도될 수 있게 되는것을 말한다 . 그것은 우리가 바랄 만한 결과를 예견할 수 없을 때에라도 , 우리에게 익숙한 사상들과 관습들에게 경험하는 안전을 포기하고 , 그리하여 신뢰되는 삶의 모험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새로워진 자발적 의지인 것이다 . 그러므로 신뢰란 구체적인 상황에 , 그리고 그 상황안에서의 하나님의 매우 특유한 요청에 응답하는 능력이며 , 책임이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할만한 가능성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 하나님은 유혹하고 , 촉구하고 그리고 설득하신다 . 그리고 우리는 결정한다 .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실재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면 , 우리는 생명을 선택한 것이다 . 만약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기로 결정한다면 , 우리는 생명 전체를 통한 계속적인 죽음이고 또한 지구 전체의 사멸에로의 한 기여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 이러한 상황은 신명기 30 장 19 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긴급성을 찾아볼 수 있다 : “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 너희와 너희 후손이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선택인 , 생명의 선택은 그 자체가 최고의 자유이며 , 그리고 그것은 자유의 확장을위한 근거를 제공한다 . 생명에 대한 거절은 과거와 그리고 자신에의 속박을 나타내는 것이며 , 그리고 그것은 점진적으로 자유와 생명을 위한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킨다 . 희망은 응답하는 능력과 더불어 성장한다 ; 반면에 절망은 지평들에 대한 자기 – 선택의 폐홰와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다 (John B. Cobb, Sustaining the Common Good, p.46)

이에 관련해서 , 존 캅은 책임적이 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견딜 수 없는 짐을 떠맡는 일이 아니라 그것은 세계 안에서 신적 모험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 비록 그 결과는 결코 보장될 수 없지만 , 그리고 비록 그것은 향유의 많은 과거 형식들의 희생을 수반하지만 , 그 자체로도 그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 신적 생명 (divine life) 에의 이러한 참여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은 간절하게 성공을 희망하지만 , 그러한 유이한 보상은 바로 그 기쁨 자체안에 있을지도 모를 모험이라는 사실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또 한가지는 한 개인이 공동체에서 갖는 위치가 중요한만큼 전통사회와 공동체가 시장의 확대와 발전속에서 소외되고 파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 존 캅은 결국 한 개인을 시장과의 관계속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의 관계 즉 유기적인 존재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 한다 . 그리고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인간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실제로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하는 면도 있지만 , 그 외에도 첫째로 자기 자신이 확신하고 믿는 것에 투자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 두 번째로는 인간에게는 ‘ 공정한 감각 ‘(sense of fairness) 이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행동양태에 있어서 사물 판단과 행동근거에 있어서 공정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

오늘날 인류 문명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체해 처해 있다 .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를 외면한 무한성장신화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 그것은 , 생태 , 환경의 위기로 인해 파멸할지도 모르는 문화적 문명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 인간이라는 종 ( 種 ) 의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창백한 믿음 때문이다 . 사실 ‘ 현대성 비판 ‘ 이라는 이름하에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성에 대한 히스테리적인 불신은 인간의 자존심을 퇴보시켰고 , 인간성과 인간 이외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고 ,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자존심이라 할 이런 도덕적 능력을 빼앗아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인간정신은 고대 , 중세 , 근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 이 희망은 더덕적 사회적 인간성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다 . 종 ( 種 ) 으로서의 긴간이 보다 나은 도덕적 사회적 이법을 성취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은 급속한 탈도덕적인 시대인 오늘의 인간조건을 실로 ‘ 참담한 현실적인 위기 ‘ 로 느낄 것이다 .

새로운 천년의 시간을 맞이한 우리는 역사적인 인간성의 진보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인 메세지가 필요하다 . 어떤 점에서 존 캅은 과학 , 기술 , 자본의 진보를 믿지 말 것이며 , 어떤 고상한 도덕도 인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계를 지배하는 특별한 종으로 생각하는 타고난 오만 때문에 도덕은 인간을 자연과 결합시켜주기보다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악마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이제 인류는삶의 터전인 지구를 모든 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 그것은 특정 분야에 한정될 수 없다 . 경제 , 과학 , 종교 , 기술 , 문화 들 인류의 총체적인 노력만이 지구를 퍄멸의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다 .

이러한 시점에서 존 캅의 과정신학적인 새로운 인간이해를 통해서 자연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 또한 거기에 알맞는 적절한 시장과 경제의 규모가 논의 되어야 한다 . 존 캅은 과정신학자로서 전체 자연은 우리 인류안에 참여하고 우리는 자연안에 참여한다 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예를 들면 , 우리는 인도 농부의 불행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큰고래들과 돌고래들의 도살에 의해서도 , 심지어는 거대한 미국 삼나무의 수확에 의해서까지도 쇠퇴된다고 하는 것이다 . 이런 노력들은 결국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관을 요구하고 있으며 ,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며 , 신과학 운동과도 맥을 같이할 수 있고 나아가서 동양 사상과도 만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실제로 존 캅의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역사관과 경제관 그리고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회의를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다 . 무엇보다도 존 캅의 독특한 견해는 바로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이다 . 분명히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모든 경제활동의 시작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 존 캅은 이러한 인간이해를 너무나 편협한 인간이해라고 반박한다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존 캅은 인간은 ‘ 신념 (faith) 을 통해서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한다 . 즉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인간은 충분히 행동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 직접적인 자기이익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 또 하나는 인간에게는 공정한 감각이 있어서 모든 행동에서 공정성에 근거한 행동을 하고 무조건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결국 존 캅은 이러한 두 가지 또 다른 인간이해를 통해서 인간과 시장과의 관계보다는 인간과 공동체의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

존캅의 인간이해를 통해서 , 여전히 그 인간이해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성립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 현실일 수 있지만 , 인간에세 필오한 것은 환경이나 자연을 관리하는 방법론보다는 환경이나 자연을 바라보고 섬기는 ‘ 도덕 ‘ 이 팰요한 것임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 즉 ‘ 환경도덕 ‘ 에서 출발해서 생겨난 규범이 지금의 인류에서 필요한 것이다 . 결론적으로 존 캅은 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으며 교회의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 존 캅은 궁극적으로 자연을 인간친화적이고 하나님앞에서 동등하게 축복받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 아울러 ‘ 경제제일주의 ‘ 와 ‘ 무한성장신화 ‘ 에 젖어 있는 인류에게 ‘ 지구중심주의 ‘(Earthism) 을 강조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 주고 있으며 삶의 터전인 지구의 소중함과 생태학적 지구의 현실을 경고하면서 지속가능한 인류의 ‘ 생명공동체 ‘ 를 지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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