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향한 새로운 태도: 한(恨)의 변형가능성에 대해서
07/25/14
오화철

연세대학교 대학원 (Th. M. 기독교윤리학 전공 )
밴더빌트 신학대학원 (M. Div.)
현재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박사과정중
(Ph.D. candidate in Psychiatry and Religion)
현재 해외한인장로회 (KPCA) 뉴저지노회 소속 목사
들어가며
필자는 한의 변형 가능성에 대해서 상관관계 방법론을 통해서 접근하고자 한다 . 특별히 하인즈 코헛 (Heinz Kohut) 의 자기 심리학 , 한국의 도심리치료 , 김지하의 흰그림자 이론 그리고 융의 그림자 이론을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 상관관계방법론은 종교가 사회현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답을 줄 수 있고 , 동시에 사회현상도 종교에 반응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 알려진 것 처럼 , 한국인의 한 이라는 정서는 외부의 억압에서 기인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해되어 왔다 . 한의 근본적인 원인을 외부환경과 타인의 억압이 그 발생원인이라는 점 때문에 한국인은 그동안 정치 , 경제적 외부 환경 발달에 집중해 왔다 . 그러나 , 한국인은 여전히 한의 변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쉽게 말하면 우리의 한을 푸는데 환경적인 변화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 고통의 문제가 외부상황의 변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현재 한국은 OECD 국가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고 , 그 자살의 형태는 한국사회의 모든 연령대와 계층에 골고루 나타나고 있다 . 초중고생 , 청년 , 중년 ,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 그런 점에서 필자는 여전히 한국인들이 또다른 형태의 한을 경험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 여전히 풀리지 않는 아픔과 고통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 고통은 대를 이어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시점에서 비록 한이라는 개념이 이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로 알려져 있지만 , 이제는 한의 내재적 가치를 심리학적 , 종교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 한의 변형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 70 년대 , 80 년대의 신학자들은 한을 사회적 , 정치적 억압의 산물로서 평가했다 . 그래서 한이 많은 한민족은 사회구조와 정치 , 경제구조를 변화시켜야 된다고 믿어왔다 . 물론 필자는 민중신학이 말하고 있는 한의 정의에 동의하며 , 사회적 , 경제적 발전이 한많은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 한가지 더욱 중요하게 떠오르는 문제는 한많은 민중들과 개인안에 심리학적 , 종교적 고찰을 통해서 스스로 한을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외부환경의 변화에 집중하면서 결국 높아지는 자살률과 우리 내부의 암울한 정신적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비극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예를 들면 , 한국의 철학자요 시인인 김지하는 한을 좋은 에너지와 비전으로 승화하는 것이 우리 한 민족의 국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
한류 : 심리학적 , 종교적 접근
1999 년도 중국에서 한류 라는 말이 등장했다 . 중국의 젋은이들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매료되어서 생겨난 말이다 . 어떤 면에서 한류는 한국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시키고 높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오랜 세월동안 외침을 받았던 우리 민족이 이제 주변국가로부터 우리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를 이해받는다는 것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다 . 역사학자들에 따라 의견에다소 차이가 있지만 , 우리는 적어도 1 천번 이상 주변국으로부터 외침을 당했고 , 김지하 에 의하면 , 우리 민족은 태고적에 부여 , 영고 , 동맹 이라는 세 부족이 삼일 낮밤을 축제를 벌이며 놀던 독특한 놀이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 그 말은 집단적으로 함께 놀며 회복하는 문화가 우리의 정신세계 안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 그 전통이 수많은 외침들 때문에 수천년동안 좌절되었고 , 그것이 한으로 남아서 우리안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 한은 주변국에 대한 적대감으로도 존재하지만 , 풀지 못한 억눌린 정서는 우리 내부안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비극을 가져오기도 했다고 국문학자 이어령은 말한다 .
분명 한류는 우리 민족의 억압된 정서를 풀어헤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 한류는 우리 민족문화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더 이상 고통속에서 존재하는 한국인의 마음이 아닌 , 높은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 김지하 의 표현대로 우리는 최근 2002 년 월드컵을 통해서 수천년만에 많은 군중들이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적인 축제를 즐겼으며 이 현상은 한국인의 한을 풀어내는 상징적인 축제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
자기 심리학자 (self psychology) 인 하인츠 코헛 (Heinz Kohut) 은 Group self( 집단적 자아 ) 라는 표현을 그의 저서 The Search For the Self Vol. 2. P 837 에서 제시하고 있다 . 개인의 자아가 공동체의 자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한 코헛의 생각을 통해서 , 한국은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 정신적인 면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공동체로 보았을 때 , 한 개인의 아픔이 공동체 전체에 쉽고 빠르게 전달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 동시에 한 개인의 상처도 공동체 전체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한을 품은 한 개인은 결국 한을 품은 공동체와 개인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일종의 정서적 연대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하인즈 코헛은 집단 (group) 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역동은 자기애적인 모티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 자기애적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자신의 문제에 집중해서 사는 사람이다 . 사실 , 코헛은 narcissism( 자기사랑 혹은 자기 중심주의 ) 에 대해서 획기적인 정신분석적 상담치료의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다 . 심리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크는 자기 사랑이 강한 Narcissism 환자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방법은 주로 언어치료 (Talk Therapy) 였고 , 그 언어치료가 핵심은 자유연상 (Free Association) 과 저항 (Resistance) 을 분석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 자유연상은 환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상담가에게 표현하면서 우의식에 내재해있는 문제를 발견해가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으며 , 저항은 환자가 최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애기하도록 상담가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 환자의 저항을 관찰하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자기애적인 환자는 자신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 자신의 문제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자유연상과 저항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상담이 어렵다고 판단했으며 , 동시에 자기애적인 환자는 Transference( 전이 ) 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 전이 란 환자가 상담가를 보고 과거의 지나간 기억과 경험들이 현재 상황에서 상담가의 관계속에서 재연되고 나타나는 것인데 , 프로이트는 그런 전이현사이 자기애적인 환자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았다 .
러나 하인즈 코헛은 자기애적인 환자도 나름대로의 자기애적인 전이를 발생하고 있다고 보았다 . 이 말은 결국 Narcissism 을 비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 나르시시즘도 인간의 정신과 인성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점에서 한을 품은 사람은 자신의 문제에 깊이 천착해 있는 사람이다 . 자신의 정신에너지가 한을 푸는 데 집중해 있다 . 그것은 마치 물속에 배구공을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서 공을 물안에 있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 공이 물안에 있는 한 공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지만 , 그 삶은 공을 잡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하고 , 그 외의 일은 하기 어렵다 . 그러나 , 언젠가 힘을 쏟아야 하고 , 그 외의 일은 하기 어렵다 . 그러나 , 언젠가 힘이 빠지면 , 공은 물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 한의 문제가 그렇다 . 한의 문제를 개인의 삶안에서 혼자 해결해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 결국 개인은 지치고 , 문제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 그 좋은 뎨가 바로 위안부 문제였다 . 90 년대초반부터 조금씩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아름과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그것은 오랜 세월 한많은 고통가운데 사람들에게 드러내개 쉽지 않는 정신적 고통이었다 . 물론 90 년대이전부터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조사를 하면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고 , 아직도 고통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상담치표 서비스를 해주면서 , 드디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이 드러난 것이다 . 90 년대초부터 시작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어린 외침은 결국 일본정부의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게 되었고 , 드디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간에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대화의 계기가 되었다 . 필자는 최근의 일본 대지진 사태당시 어느 위안부 출신 할머니가 어려운 결심을 하고 나와서 일본대지진을 위해서 겅금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한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그 모습을 통해서 이미 그 위안부 할머니의 한이 어떤 형태로 해결되고 변형되어지고 있다고 보였다 . 그렇다 . 우리가 외부환경의 변화를 언제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 우리 안에 있는 한을 스스로 먼저 직면하고 , 변형 (transformation)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위안부경험을 고백했던 초창기의 수백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젠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이제 극소수만이 남아서 여전히 일본대사관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 이 사실만 보아도 , 우리는 외부의 환경변화보다 한 개인의 주체적인 결단이 한을 푸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급박한 일인지를 볼 수 있다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 인생이 곧 끝나가는 데 더 이상 외부환경의 변화만을 기다리지 않고 주체적인 결정을 한 위안부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자기주도적으로 한을 푸는 방법을 볼 수 있다 .
어떤 면에서 , 아직도 한국사회는 유교적인 전통이 강한나라이다 .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누군가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 많은 아시아 민족들처럼 , 한국도 여전히 shame-based society 로서 체면을 지키고 브끄러움을 피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덕목중에 하나이다 . 어떤 점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은 우리 한민족이 갖고 있는 한많은 아픔중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그러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은 한님족의 한을 상징하는 대표적이 사건이기도 하다 .
니즈 코헛은 그의 책 “The Search for the Self Vol. 2, p. 843 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 “ 공동체니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공동체 구성원간에 적절한 심리적 재이해가 필요하다 .” 이말은 우리의 정신이 외부의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 아픔과 고통의 역사를 아픔과 고통의 역사로만 가억할 것이 아니라 , 새로운 미래를 여는 힘과 에너지로 승화해야 함을 알려주는 심리학적인 교훈이 담겨있다 . 비폭력과 평화를 사랑했던 인도의 간디는 , “ 우리가 적 (enemy) 을 적으로 명명 (name) 하지 않고 , 적을 동등한 상대방으로 (opponent) 명명할 때 비로서 상호적인 이해와 협력을 추구할 수 있고 , 동시에 서로가 진리와 화해를 향해서 나아 갈 수 있다 .” 라고 말한다 . 이것은 우리 심리 내부안에서 적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문제해결에 방향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실제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먼저 일본정부에 손을 내밀고 비난보다 함께 이해하고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화해와 사과을 요구한 것은 한국과 일본 정부의 대화의 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 동시에 위안부 할머니가 지신들의 정체성을 밝혔을 때 , 놀랍게도 일본과 한국에서 성적으로 학대당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자신드의 어려움을 당당히 호소하게 되었고 사회전체가 이를 인정하고 받다들일 수 앗는 폭넓은 인식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 이런 위안부 할머니딀의 결정은 빅터 프랭클 같은 실존주의 상담학자들이 말하는 Paradoxical Intention( 역설적 의도 ) 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 유태인 수용소에서 죽음에 직면한 빅터 프랭클은 사람이 절대위기와 고난속에서 창밖의 별을 보며 인생을 동아보고 , 으미를 부여하면서 감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유태인들을 보았다고 고백하면서 , 빅터 프랭클은 고난에 대해서 역설적인 태도과 결정을 통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며 그 역설적 결단은 현실을 압도하는 인간의 정신적 힘이라고 보고 있다 . 위안부 할머니들의 결정은 역설적이지만 , 결국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을 풀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
하인즈 코헛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문제에 집중해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분석치료요법으로 네가지 전이를 설명하고 있다 : Idealizing transference ( 이 상화전이 ), mirroring transference( 거울 전이 ), merger transference( 흡수전이 ), twinship or alter-ego transference( 쌍둥이전이 ).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전이는 환자가 상담가를 통해서 느끼는 정신역동으로서 아직 해결되지 않는 감정들이 상담가와의 관계를 통해서 재현되고 발생하는 환자의 정신상태를 말해준다 .. 한인즈 코헛이 자기애적인 환자를 통해 이 네가지 전이를 분석함으로써 치료했던 것처럼 , 한많은 사람들도 이 네가지 전이를 통해서 그 분석이 가능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우선 한이 많은 사람 (han-ridden person) 은 상담가인 상대방을 쉽게 이상화할 수 있다 . 자신의 정신적 결핍을 채우고자 한다 . 거우전이 역시 상대방이 나의 모습을 잘 반영해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담겨있는 저이로서 인정받고 싶은 결핍은 드러내는 좋은 예이다 . 흡수전이는 환자가 이상화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대상에게 완전히 몰입하고 경우라고 볼 수 있다 . 마지막으로 땅둥이 전이는 상담가와 유사해지려는 욕구가 담겨있는 전이로서 인정받고 싶은 결핍을 드러내는 좋은 예이다 . 흡수전이는 환자가 이상화한 대상과 자신을 도일시해서 대상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겨우라고 볼 수있다 . 마지막으로 쌍둥이 전이는 상담가와 유사해지려는 욕구를 환제에게 있음을 알려준다 . 이 네가지는 한이 많은 사람들이 상담가의 관계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정신적 역도현상이다 . 이것을 하인즈 코헛은 통틀어 self object transference( 자시대상의 전이 ) 라고 명명했다 .
본적으로 하인즈 코헛은 자기대상 현상을 성이기에 어떤 대상을 통해서 유년기의 가지애적 결핍을 재방문하고 만족시키려는 환자자신의 치료적 정신현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코헛 의 치료방법중에 또하나 중요한 개념은 Transmuting Internalization( 변형적 내면화 ) 이다 . 상담가가 한자의 아픔과 절망에 공감하는데 실패할 때 , 상담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가운데 , 계속해서 환자에게 공감 (empathy) 을 보여줌으로써 , 환자 스스로 자아구조가 강화되고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코헛은 변형적 내면화 라고 부른다 . 이 과정에서 한자는 optimal frustration( 최적의 좌절 ) 을 경험하게 되는데 , 그 죄절은 환자 스스로 자아구조가 강화되고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코헛은 변형적 내변화 라고 부른다 . 이 과정에서 환자는 optimal frustration( 최적의 좌절 ) 을 경험사레 되는데 , 그 좌절은 환자 자신의 자아구조를 강화시켜주는 적절한 수준의 좌절이 됨으로써 , 되려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코 헛은 보았다 . 이 변형적 내면화 (Transmuting Internalization) 는 상담적이면서 윤리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 우선 그 어떤 상담가도 완벽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 그것은 마치 그 어떤 부모도 아이들앞에서 완전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코헛은 바라본다 . 그리고 상담가의 연약함이 되려 환자의 정신세계를 건강함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요소가 될구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이 부분은 기독교적인 인간이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 인간 앞에서 때때로 솔직하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 되려 신안인은 더 강인한 신앙생활에 몰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 부모도 자녀앞에서 늘 강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 연약한 모습을 드러낼 때 자녀들의 독립성이 강화되기도 한다 .
이것을 우리의 일상의 대화에 적용해보면 이렇게 말해볼수 잇다 . “ 당신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어요 .” 라고 말할 때 , 상대방은 위로받드면서도 , 누구도 나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주지 못하지만 , 나스스로 독립적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갖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 일상의 대화로 예를 들었지만 , 실제 우리 일상의 대화가운데서 적요해보면 , 상다히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 많은 경우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전제하고 , 잘 안다고 말하면서 되려 상처를 주는 경우가 먾다 . 어떤 점에서 한이 많은 사람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일상생활속에서 이런 대화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 이런 대화법은 단순히 겸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 상대방의 고민에 분명한 방향 (direction) 을 주지 않고 , 반대로 무방향 (non-direction) 으로 반응함으로써 , 상대방이 스스로 고민해서 방향을 정하도록 해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 앞서 말한 프로이트의 전통적인 정신분석치료의 방법중 자유연상과 저항분석을 통해서 하는 심리치료가 바로 non-directive( 방향을 제사하지 않는 ) 방법론으로 볼 수 잇다 .
차라리 아픔과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을 치료할 때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말이 없는 것도 역시 무방향이기 때문이다 . 필자는 예전에 병원에서 인턴목회자로 사역 할 때 , 암투병중에 조금전에 남편이 사망한 어느 중년잭인여인을 만난적이 있다 . 자도 모르게 얼마나 힘드냐고 하면서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해버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 나중에 병원 원목이신 수퍼바이저와 그 케이스를 놓고 토론하면서 큰 실수를 했다고 지적받은 경험이 있다 . 요점은 , 그 누구도 그 부인의 입장이 되보지 않는 한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차라리 “ 미안합니다 .” 라는 말한마디라고 수퍼바이저 목사는 알려주었다 . 아니면 차라리 침묵하고 그냥 옆에 있으면서 함께 해주는 것 (supportive presence) 이 좋다고 한다 . 지금 생각해보면 ,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되려 위로보다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떤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오랜 세월 아픔을 간직해 온 분들은 말보다는 누군가의 따듯하고 애정어린 시선이 필요하다 . 한이 많은 한민족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발달보다는 , 정시적인 안정감과 충만함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될수 있다 . 그럼 점에서 우리 개신교는 메시지를 통해서 방향을 정해주는 오랜 전통을 심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 우리의 말도 이젠 몸으로 , 삶으로 나아가랴 할 시점이다 . 말에서 그치는 신앙인들에게 더 큰 혼돈을 가져올 수 있다 . 차라리 ,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자세를 신앙인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팰요하지 않을까 ? 종종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화하면서 답을 주기보다는 , 답대신에 질문으로 답을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우리안에 답이 있다 .
프로이트에 이어 심리학의 정초를 놓은 융 (Carl Jung) 은 인간정신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는 정신과의사였다 . 그의 주장은 Psyche is quickening in us( 정신이 우리내부에서 태동하고 잇다 )” 라고 주장한다 . 정신자체가 스스로 치유와 회복을 향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은 마치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피가 나고 , 시간이 지나면 피가 멎고 상처를 보호하려고 딱지가 않는 것처럼 , 인간의 정신도 스스로 보호하고 건강을 회복하려는 복원력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갖고 있는 본래의 능력을 신뢰하자는 것이다 . 필자는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으면 감사하고 , 때로 응답이 없거나 지체되면 좌절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 어쩌면 우리기독교의 가장 큰 과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소중하게 지어주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하나님이 이미 사람을 지으실 때 , 탤런트를 주시고 , 삶을 살아가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방향을 우리 인생 가운데 심어주셨다 . 이것에 우리가 혹시 무관심하다면 , 자칫 우리는 세상이 주는 방향과 관심을 이루려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 이 사실은 동시에 , 우리가 그동안 누려온 문화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한다 . 필자는 신학교 학부시절부터 늘 고민하던 것중에 하나가 , 나는 한국사람으로서 예수를 믿는 것이지 , 백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 게다가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 베드로의 고백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 이런 생각은 나를 한국기독교인으로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돌아보고 , 이미 내가 갖고 있는 문화적 전통위에서 하나밍을 만나는 그 모든 과정에 다시 한번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
재 서양문화는 그 정점과 한계에 도달해 있다 . 심리학과 상담학도 예외가 아니다 . 그래서 일찍이 융도 서양의 사상이 동양적인 안목과 결합햬야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다고 예언한 바 있다 . 서양심리학과 동양사사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도심리치료 (taopsychotherapy) 이다 . 도 (Taoism) 는 한국의 전통문화인 유교와 불교에서 한군인의 심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가치와 덕목들을 다시 한번 점검할 수 있는 체널을 열어주는 분야이고 , 서양심리학은 한국인의 심성을 좀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 실제로 도심리치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명성 (meditation) 이다 . 기도와 명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 무엇보다 명상은 기도보다 방향이 다르다 . 사실 명상은 방향이 없다 . 그러나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보는 내재적인 가치가 있다 . 서양의 심리학자들은 도심리치료의 가능성을 여기서 보고 있다 . 서양의 심리학자들은 도심리치료의 가능성을 여기서 보고있다 . 상담가와 환자의 일애일 관계를 벗어나서도 , 혼자서도스스로의 정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심리치료의 가능성을 도심리치료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서양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 상담가의 분석적인 안내를 통해서 , 내안에 직면하기 어두운 감정들과 정서들을 바라보는 것도 무척 중요한 작업이다 . 도심리치료는 한을 nuclear feeling( 핵심감정 ) 으로 명명한다 . 도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한국의 이동식 박사는 핵심감정을 “ 우리 가슴에 맺혀있는 그 어떤 느낌 ” 으로 정의한다 . 핵심감정은 의식적이기도 하고 , 무의식적이기도 하다 . 마치 한의 정서가 우리가 의식하는 정서인 동시에 , 무의슥으로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처럼 말이다 . 우리가 어떤 힘든 감정을 다시 새롭게 명명 (re-naming)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 그것은 새로운 대안을 창출할 수 있는 창조적인 문제해결의 열쇠를 주기 때문이다 . 이동식 박사의 도심리치료는 결정적으로 상담가의 인격이 결국 환자의 치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 그것은 마치 추운 겨울날 밖에서 떨고 있는 환자에게 따스한 햇살을 비춰주는 것과 같다고 이동식 박사는 말한다 . 아무리 좋은 상담훈련과 기술도 결국 상담가의 인격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어떤 면에서 정말 환자를 사랑하는 상담가는 환자를 위해서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희생정신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 심리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도 가난한 환자에게는 돈을 조그만 닫고 상담해주고 , 심지어는 상담이 끝나는 시점에 환자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면서 힘을 내라고 했다던 애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상담가는 환자의 문제뿐만이나 그 환자의 삶까지도 사랑하고 애정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도심리치료는 강조한다 .
2011 년 연말에 세워진 서울 일본대사관앞의 “ 평화비 ” 동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 . 저고리를 입은 작은 한국인소녀가 맨발로 의자에 앉아 있고 , 그 옆레 빈 의자가 있다 . 그 모습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기다리는 어느 위안부 한국인소녀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 위안부문제가 물질적 보상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 우리 민족전체의 한을 상징하고 있으며 ,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누구에게나 직면하고 싶지 않는 기억 , 감정 , 사람들이 있다 . 그러나 , 심리학자 융은 그림자 (shadow) 를 직면할 때 , 인생의 참다운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 7 년동안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마치고 , 융정신분석가인 이부영 교수에게 심리치료를 받았던 김지하는 자신이 비로소 7 년동안의 고통스런 독방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 기래서 그는 흰 그림자 (white shadow) 를 말한다 . 그림자 안에 흰 부분을 가능성을 묘사한다 .
김지하는 우리 전통의 판소리에서 그 예를 찾기도 한다 . 한국의 지방에는 귀명창들이 참 많은데 , 그들은 창을 들으면 곧바로 그 소리가 진짜인지 아니지를 가려 낼 수 있다고 한다 . 그 기준이 바로 그림자 라고 한다 . 그 노랫가락가운데 부르는 이의 깊은 그리자가 느껴지면 그 소리가 비록 세련되지 못해도 , 그 그림자는 그의 아픔과 상처가 담겨있고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 반면 아무리 세련된 노래라도 그 안에 그림자가 없으면 노래에 영향력이 없다고 한다 . 김지하는 우리 민족문화안에 그런 흰그림자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 물론 한 개인의 삶가운데도 그런 흰그림자가 있다 . 그림자를 직면하고 대화할 때 , 고통이 수반 되지만 , 그 그림자 안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 특히 동아시아를 여행하면서 김지하는 그의 저서 “ 예감 ” 에서 한의 본래 의미는 “ 영원한 푸른 하늘 ” 이었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 본래 한은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였는데 , 우리 민족이 아픔을 겪으면서 어렵고 힘든 의미를 한데 모두 투사해서 집어 넣은 것이라고 한다 .
나아가며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한의 본래 의미였던 원대한 하늘과 푸르름을 회복해야 될 때가 아니던가 ?
필자는 그것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믿는다 . 그 한 예가 바로 한류라고 생각한다 . 김치가 발효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 우리 민족이 그동안 겪은 아픔과 상처의 시간이 길었지만 , 발효되어서 이제 열매를 맺는 시간이 다가오고 잇는 것이다 .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한은 더 이상 어둡고 힘든 감정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 회복과 비전을 향한 좋은 에너지와 끔으로 이해되고 변형되어야 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