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여정에 하나님이
11/19/14
박범식

1984 년 University of Toronto, Engineering Science 졸업
현재 Research In Motion 에서 Software Development Manager 로 근무
현재 토론토 디모데장로교회 (EM) 출석
1975 년 12 월 말 , Vancouver 에 도착해서 정착지인 Toronto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대합실에서 기다리던 동한 호시심찬 눈에 사방이 흰 눈으로 덮인 처음보는 Canada 땅이 신기해 출구문을 여는 순간 , 들이마신 공기가 어찌나 차갑던지 채 다 열리지도 않은 문에서 뛰쳐 돌아서야 했다 .
가끔 여쭙잖은 시를 쓴답시고 되지않은 몇자를 긁어 보기도 하고 청치 경제 수업전 선생님과의 10 분 시사토론을 즐기며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불의을 성토하고 , 또박또박한 글씨로 선생님들의 학적보를 대필해 드리고 , 월말고사 중간고사 채점도 도와드리고 , 교실 환경미화판에 글자판을 중간고사 채점도 도와드리고 , 교실 환경미화판에 글자판을 만들어 붙이고 , 교내 신문반에 소속되어 어설픈 책임감에 심취되던 , 감수성 강한 사춘기 16 세 소년의 이민생활은 Vancouver 공항에서 본 수은등 밑의 퍼런 얼음덩어리처럼 그렇게 차갑게 시작됐다 . 나중에 Korea Town 이 주위에 형성된 Christie Park 을 지나 학교에 걸어가야 하는데 arctic wind chill 을 동반한 Canada 의 첫 겨울 바람은 왜 그리 매서운지 두번이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댓가를 치르게했다 .
5 월이 다 되서야 피는 늦등이 나뭇잎을 보며 시작한 이민생활은 , 머리가 아직 채 기르지도 않은 서울 촌 학생에겐 여간의 culture shock 이 아닐수 없었다 . 아침 이슬 머금은 토란잎처럼 싱그럽고 , 뒷머리가 납작해서 예쁘장 하다던 소년은 불과 한두달 사이에 수은등 밑의 퍼런 얼음덩이마냥 온 몸이 긴장으로 얼어붙어 , 옆 책상 학생의 연필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슴 저려하며 , 방과후 작은댁 grocery store 일을 도와 주고 밤늦게 사전 찾아가며 읽어가는 Grade 10 Biology text book 은 왜그리 안 넘어 가는지 , 엄마가 자주 걱정하시던 것 처럼 튼튼치 못한 몸은 작은댁 living room 에서 형과 동생이랑 셋이 추운 새우 잠을 자고나면 세수할때 허다하게 코피를 흘리곤 했다 .
그러던 중 , 버스 한번 타면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에 한국교회 ( 토론토 한인 장로교회 ) 가 있는 것을 알고 , 식구중 나 혼자 그냥 찾아가 보았다 . 서울로 처음 전학해서 배정받은 중학교가 mission school 이였기에 교회가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 원래 시골시러 기질에 수줍음이 있던터라 언어와 문화차이로 이곳 high school 에 전혀 소속감을 갖이 못해 상대적으로 학창시절이 자연히 교회 중심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 친한 교회 친구도 생기도 , 실컷 한국말로 애기하고 , 예배후 근처 park 에가서 소리치며 운동도 하니 일요일이 기다려 질수 밖에 없었다 . 주말이면 ( 금 , 토 ) convenience store 에 가서 part time 을 시작했는데 , 특히 토요일은 오후부터 저녁도 안먹고 11 시 closing 때까지 cashier 를 하고 30 여분 동안 청소와 뒷정리를 하고나면 온 몸이 땀에 흠뿍 젓어 세번 버스를 갈아 타고 집에 가려면 겨울엔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 하지만 다음날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나고 , 끝나면 같이 짜장면 사먹고 운동하는게 너무 좋아 주말에 집에서 놀며 TV 보는 아이들이 부럽지가 않았다 .
그러는 동안 , 현재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 (PAM) 원장님이신 김창길 목사님 지도하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청년대학생으로 transform 되어 가고 있었다 . 대학 진학반이 되었을 때 목사님께서 우리들에게 ‘ 너희는 이제 공부가 제일이야 ” 하셨던 말씀이 , 수십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도 그때의 친구들과 애기하곤 한다 . 내가 토론토 대학교 (University of Toronto) 에 입학 했을때엔 , 목사님께서 지난 30 년 동안 시무하셨던 New Jersey 장로교회로 떠나가신 후 였고 , 목사님 결혼후 한국에서 오신 에스더 사모님 ( 현 PAM Director) 께서 창세기를 체계적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지금도 그 시간들이 기억에 새롭다 . 단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몇 친구들과 어울려 사모님과 함께 목사님 이사짐을 싸야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
그후 대학생활은 목사님 말씀대로 공부밖에 할수 없었다 . Engineering Science 가 어렵다곤 들었지만 해도 해도 뒤떨어지며 따라가기만 바빴다 . 고교시절부터의 학교생활 스트레스와 불안정한 이민생활의 압박감과 이곳저곳 part time 하면서 불규칙한 식생활 때문인지 소화기관 ( 위장 ) 이 몹시 나빠져 있었고 , 무거운 학과 중압감까지 더해져 좋아하던 짜장면 ( 밀가루음식 ) 을 소화 못시키고 다들 좋아하는 cola 도 마실수가 없어졌다 . 그래서 몸은 내 자신이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로 말라 가고 있었다 . 설상가상으로 , 1 학년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집에 감당치 못할 충격이 왔다 . 집에서 빗자루 한번도 들어 보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고된 공장일과 이민생활의 stress 때문이였는지 위장암으로 3 개월 선고를 받으셨다 . 이를 물고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이민생활 중이어서 그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 나는 마침 campus 가 병원 근처라 1 학년 2 학기는 절반 정도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 종일 도서관에 붙어 있어도 뒤떨어지던 참에 제디로 될수가 없었다 . 심리적 중압감이 더해져 내 소화기관은 더욱 더 나빠져갔다 .
아버지는 의사 말대로 3-4 개월 후 힘든 이민생활을 접으셨는데 , 주위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터라 이제 23 살에 가장이 된 형과 같이 내가 출석중인 교회에 말씀드려 여러 장로님 , 집사님들의 헤아릴 수 없는 도움으로 생전 구경도 못해본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
교회 친구들 중 운구위원도 해주고 학생부 중창단의 조가도 아직 눈에 선하다 . 그후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 심방와서 부서진 엄마의 마음에 큰 힘이 되어 드리는 것을 보며 , 비로소 나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
1 학년 2 학기말고사를 바로 앞두고 장례를 치르느라 모든 시험을 아예 안보았다 . 준비도 전혀 않된 상태이니 나도 모르겠다 싶었다 . 다시 1 학년을 repeat 할 생각롸 함께 , 학교에 시험을 못 보게된 이유 ( 설명서 ) 를 내었더니 , 나중에 온 성적통지서에 “pass with aegrotat” 이란 들어보지도 못한 문구가 왔었다 . 2 학년으로 진급을 하라 해서 다음 학기에 시작을 했지만 몸과 위장은 갈수록 허약해져 더이상 work load 를 감당하기 없을 지경이 되었다 . 그래서 2 학기가 끝나는 대로 휴학하고 한국 시골에서 교사를 하는 큰 형님집에 1 년 휴향을 가게되었다 . 여러 친척들이 자기일처럼 안스러하시며 몸에 좋다는 보약들 온 정성으로 돌보아 주시는 모습을 보며 “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 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 1 년을 쉬는 동안 여러음식도 소화해 낼 수 있을만큼 많이 회복이되어 3 학년으로 복학해서 본과인 computer engineering 을 택해서 다시 학업을 시작했지만 , 혹시나 또 감당치 못하게 될까봐 불안했지만 견디어 낼수 있을것 같았다 .
겨우겨우 , 정말 근근히 졸업을 했지만 recession 중이라 job 을 잡기가 쉽지가 않아 여름이 지난 후에야 아주 작은 회사에 , 그보다 더 적은 보수로 humble 하게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 이젠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을 필요없고 교화과정의 중압감도 없고 한가지 일 만하면 되니 상대적으로 얼마나 쉽고 재미까지 있던지 … 이때는 손위 형이 결혼해 나간 후라 자연스래 내가 나머지 식구의 caretaker 비슷해졌다 . 몇 년후 , 한번 나와보라는 큰형의 권유도 있고해서 여행삼아 한국에 다시가 보게 되었다 . 8 년 전 휴양왔을 때에 비해 마음의 부담도 덜해 생각같아선 여행도하고 reflection 할 시갖도 갖으려 했지만 , 도착과 함께 잉여 (?) 의 몸이 되어 선보러 다녀야 했다 . 그중 현재의 wife 를 만나 , 내 자신도 믿기어려울 만큼의 짧은 시간에 결혼을 하게되었다 . 대학을 갓 졸업하고 병원약국에서 약사로 근무중이던 서울 깍쟁이 아가씨 , 첫날 탈탈 털며 일어나 관례로 되었던 식사도 않고 가버린 사람과 결혼이 이루어 진 것은 두 당사자 감만의 일이 아니였다 . 아내는 배우자 기도중 술 담배를 안하는 신앙인을 top priority 로 두었던 중 , 기존 한국 남성 대부분이 결격사유 ( 술담배 ) 가 있는 터라 , 나느 그냥 어부지리 격으로 wife 를 만나게 되었다 . 내 몸에 가시 ( 약한 소화기관 ) 가 없었던들 나도 술밤배를 안했으리란 보장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미리 막으시고 준비시켜 기다리던 배우자에게 보내 주셨던 같았다 . 몇 번 만나지 않은 낯설은 남가앞에서 행상아주머니에게 과일 값 깍아달라고 옆에서 참견하는 모습이 참 의외였다 . 설령 내가 몇 백원 깍자고 흥정을 하더라도 창피하다며 멀리 물러설것 같은 그 시절의 stereotypical 한 젊은 여성상과 많이 달라 보였다 . 그러나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고 무던히도 싸우고 오래갈 것 같지 않았지만 사사로운 것까지 참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
직장생활은 자의건 타의건 많이 옮겨 다녔다 . 아주 작은 회사에호 홀로 software department 를 해보기도하고 닷컴 (dot com) boom 시절엔 venture 회사에 들어가 혹시나 하는 경험도 해보고 , Nortel 의 melt down 도 체험해 보았다 . 그러는 동안 , 때에 따라 훈련시키시고 , 생각만 해도 가장 적절한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 좋았다 . 현재 Blackberry brand 의 스마트 폰 만드는 Research in Motion 이란는 회사에서 software development manager 로 일하고 있지만 , 또 언제 어디로 보내시려는지 두렵지 않고 그때 그 순간에 맞게 허락하실 것을 믿기에 걱정되지 않는다 .
이민자로서의 삶이 늘 긴장의 연속이고 , 왠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세월의 흐름을 잘 감지하지 못하지만 , 돌이켜 헤아려 보니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 특히 , 지난 여름 New Jersey 에 들러 김목사님과 에스더사모님을 다시 재회한 것이 30 년 만이였다 . 마치 산등성이에 뿌려진 빗물 이 땅속에 스며들어 미궁의 알수 없는 물길을 따라 골속골속 흐르고 흐르듯이 , 우리 삶도 내가 예측할수 없는 , 내가 통재할수 없는 어떤 경로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각자 가는 길은 다르더라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을 turn-by-turn 간다는 것을 세월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
소년에서 소년의 아버지로 바뀌어져 있는 나를 돌아보며 또 한가지 하나님께 감사함은 이민생활을 통해 “ 절제 ” 라는 성령의 열매를 값없이 맺게 해 주심이다 . 절제된 생활엔 죽음을 부르는 욕심도 없고 , 분냄과 시기와 방탕과 술취함도 없고 날마다 스스로를 낮추며 , 연약한 자 편에 서며 , 내가 손해보는 삶을 살 수 있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 맑은 초가을 하늘을 보며 , 산상에서 외쳐 가르치신 팔복 중 하나를 되새겨 본다 — “ 마음이 청결한 (pure in heart)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