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추구하며 믿음으로 가는 길- “어느 과학도의 신앙고백”
11/19/14
박윤수

전 서울대학교,Johns Hopkins 대학 초빙교수 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 전북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워싱톤감리교회 장로
1. 나의 신앙고백 1962 년 12 월 24 일 ,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8 호의 승무원들은 달 괘도를 돌면서 , 전세계가 TV 생중계로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 창세기의 일부를 낭독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습니다 . 그 날 세 명의 승무원 , 월이엄 앤더스 (William Anders), 짐 러벨 (Jim Lovell), 프랭크 보먼 (Frank Borman) 이 읽었던 말씀은 창세기 1 장 1 절에서 10 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
Anders [ 창세기 1:1-4]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 ( 창 1:1)
Lovell [ 창세기 1:5-8]
“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 하루가 지났다 .” [ 창 1:5]
Borman [ 창세기 1:9-10]
“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고 하시고 ,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 ( 창 1:10)
이 처럼 , 이들은 지구에서 240,000 마일 떨어지고 , 달에서 60 마일 떨어진 , 우주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였습니다 . 얼마나 아름답고 존엄한 선언입니까 ?
저는 과학자입니다 . 영국의 저명한 진화론자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와 같은 많은 과학자들이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 저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과학을 통해서 해명해 보려고 하는 과학자입니다 . 저는 “ 창조주 하나님 ” 을 믿습니다 . 지난 82 년을 사는 동안 ,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의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살아 온 것이 , 제게는 가장 감사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을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 물론 과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 하지만 과학 역시 진리를 탐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진리를 증명하는데 있어 , 과학은 관측과 실험을 포함하고 , 종교는 신의 계시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 이처럼 과학과 종교는 같은 현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
이는 자연에 대한 조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 가령 , 과학자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화가 고갱 (Paul Gauguin), 음악가 베토벤 (Ludwig Beethoven) 과 구약의 다윗 왕이 각각 언덕에서 황혼의 태양 빛이 비치는 장대한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관찰한다고 합시다 .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금색 , 홍색의 구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습니다 . 하지만 , 분명 제 각기 다른 지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 먼저 ,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 운동과 구름의 조직을 설명하는 수학공식으로 가득한 종이를 내어 놓을 것입니다 . 둘째로 , 화가 고갱은 찬란한 색깔을 가진 저녁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캔버스를 보여줄 것입니다 . 셋째로 , 음악가 베토벤은 그의 전원 교항곡을 들려주며 , 그의 동료들에게 지긋이 눈을 감고 그것을 감상하게 할 것입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 구약의 다윗왕은 , “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 는 시편 19 편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진리를 찾는 그 방법과 표현이 다를 뿐이지 ,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찬미하고 , 피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차이점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
돌이켜보면 , 지난 50 년 동안 , 과학자로서의 저의 삶은 순수한 자연의 법칙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했던 , 참으로 분주한 세월이었습니다 . 실험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자연의 현상을 발견하였을 때의 그 기쁨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하지만 , 아무리 그와 같은 발견이 계속되어도 , 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난 자리잡고 있었던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 그것은 자연과 인류의 진리를 다른 방법과 다른 각도에서 추구해보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 구러면서 과학과 종교의 상호관계 , 특별히 양자가 가지는 세계관의 상이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 과학은 주로 “ 어떻게 ?(How?) 를 묻는데 관심을 가지는 반면 , 종교는 주로 “ 왜 ”(Why?) 를 묻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 예를 들어 ,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지구에 도착하였는가를 묻는다면 , 종교는 왜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를 묻습니다 . 즉 , 진리를 증명하는데 있어 , 과학이 어느 한 관점을 대표한다면 , 종교는 다른 한 관점을 대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이처럼 탐구하는 진리는 하나이나 , 과학과 종교가 가지는 관점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만일 누군가 이와 같은 서로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 그것은 과학과 종교에 대한 그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과학자로 차칭하고 있는 “ 창조과학자 ” 혹 “ 창조주의자 ” 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그들은 성서를 과학의 교재로 만들고 , 성서에서 과학의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 왜냐하면 , 창세기의 “ 창조설 ” 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 그런데 , “ 창조과학자 ” 들은 이와 같은 창세기의 목적을 무시한 채 , 창세기와 과학적 정확성을 융화하거나 또는 원시적 우주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이런 태도는 종교와 과학의 목적을 혼돈하는 것이며 오히려 종교와 과학에 대한 모독이며 , 성경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창조는 믿음입니다 .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진화는 하나님이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 그러므로 ,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믿는 창조신앙과 진화론 사이에는 아무런 분쟁이 없습니다 . 아무리 현대과학으로 무장한 과학자라 할지라도 , 이런 이해 안에서는 ,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데에 어떠한 장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
3. 기독교와 사회정의
저는 지금껏 신앙 안에서 자랐고 , 신앙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 부모님의 신앙의 영향으로 그리스도를 일찍이 주님으로 영접하였고 , 어린 시절에는 많은 목사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 저를 전쟁의 폐허에서 건져내어 1952 년 유학의 장도를 열어 주신 분도 한 목사님이었습니다 . 그리고 전쟁 속에서 저의 공부를 뒷받침 해 주신 분들은 캐나다의 젊은 기독학생들이었습니다 . 이처럼 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사람입니다 . 그러므로 로마서 8 장 39 절의 말씀을 제 고백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귾을 수 없으리라 .”
지금껏 이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 사랑을 받은 자로서 , 기독교인의 “ 사회적 책임 ” 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일은 , 마땅히 제가 해야할 책임으로 느껴졌습니다 . 그래서 1996 년과 2000 년 , 그리고 2004 년 미 연합감리교단의 총회대표로 선출 되었을 때 “ 교회와 사회 법률 제정 위원회 ” 에 참여하여 , “ 동성연애에 대한 문제 ”, 낙태에 관한 문제 ”, “ 인종차별 ” 과 “ 타 종교와의 교류 ”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 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한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eibuhr, 1892-1971) 는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입니다 . 저는 그의 “ 평온을 비는 기도 ” 가 모든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가 했던 “ 평온을 비는 기도 ” 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
“ 주여 ,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소서 .
그리하여 ,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
그리고 이 두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해주소서 !”
개인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만이 결코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부의 정책 , 나아가서는 교계의 정책에 항상 관심을 두고 “ 정의 ”(Justice) 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
4. 야고보서의 교훈
1989 년에 교회의 장년 성서연구반에서 3 개월 동안 야고보서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 사실 야고보서는 강해 없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 “ 믿음과 행위 ” 의 서신입니다 . 한 번은 존 스미스 (John Smith) 라는 목사님이 어떤 교회로부터 예배의 설교를 부탁을 닫은 적이 있답니다 . 교회에서 “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 라고 물어서 , 이 목사님은 “ 아고보의 편지 ” 라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 그래서 교회의 회중들은 그 날 설교가 야고보서에 대한 설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 하지만 ,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 스미스 목사님은 강단에 올라 야고보서 전체를 힘 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였다고 합니다 .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되었을때 , 거기에 성령이 힘있게 역사하셔서 온 회중의 마음이 움직였교 ,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아멘을 외치고 ,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감격의 찬양을 올렸다고 합니다 . 바로 그 일이 제게도 일어 났습니다 .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 야고보서를 처음 1 장에서부터 마지막장까지 일기를 거듭하였고 , 바로 그 때에 한 구절 한구절이 제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은혜를 주릴 수 있었습니다 . ( 저도 야고보서를 암송하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 모두 허탕한 노력이었습니다 .)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넓은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일반 교회와 단체공증 ( 회중 ) 에게 신앙의 격려를 하기 위해 기록한 서신입니다 . 그렇지만 , 과도기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적으로 격려해주는 종교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 이론보다 행동을 강조하는 실천적 도덕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 이 서신의 중요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성서학자가 야고보서를 ‘How-to-do-it-maual for the Christian Life’, 즉 ‘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는 안내서 ‘ 라고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 이는 야고보서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들 때문입니다 . 첫째 , 야고보서는 신앙은 곧 행동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 야고보서는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 이라고 강조하면서 , 신앙이 단순히 이론이나 지적 승인이 아니라 , 실천이며 행함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참된 믿음은 매일 매일의 실천적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 둘째 , 야고보서는 내적인 죄의 유혹과 싸우며 , 시련에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단과 인내를 권장해 주는 신앙격려의 서신입니다 . 셋째 , 야고보서는 사회적 복음 (Social Gospel)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기독교의 진리인 복음에는 계급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사회의 각계각층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결이 있습니다 . 이러한 복음 운동에서 평신도 운동의 이론적인 근간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 현대교회는 What to do?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 How to do?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 기독교는 신비주의도 아니고 , 이상주의도 아니며 , 신학적인 이론만도 아닙니다 .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행동의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야고보서의 중요한 강조점입니다 .
야고보서가 가지는 여러 정의 가운데 , “ 행도의인 (Justification by Works) 의 서신 ” 이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 이러한 정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 신앙의인 ” (Justification by Faith) 의 교리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 하지만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다만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 바울은 신앙없이 행동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고 야고보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인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 즉 , 야고보서가 문제 삼고 있는것은 윤리적 효과나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 야고보가 주장하는 행함이 바울의 말하는 신앙과 온전히 연결될때에 , 우리는 거기에서 바른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바로 거기에 기독교 윤리의 시작점이 있습니다 . 바로 여기에 , 야고보서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
야고보서가 기록된 당시에 , 크리스천들에게는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믿음과 행함의 조화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 당시 그들에게는 ,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라간다는 서약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 혼동과 방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스스로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고백했지만 ,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가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조화로운 삶을 산다면 우리가 굳이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 남들이 먼저 우리들 크리스천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시 말해 , “ 당신은 단순히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 라고 말하는 것이 야고보서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 그러므로 , 이 서신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수 있을까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
5. 곤경 속에서 얻은 믿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저를 어려운 시련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 하지만 , 저는 그 모든 어려움이 제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믿습니다 . 지난 2007 년 1 월 29 일에 저는 심장마비로 심장수술 (bypass) 을 받았습니다 . 하지만 그 후에 4 개월 반 만에 회복되어 , 그 때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이처럼 간증하고 있으니 ,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그 뿐 아닙니다 . 지금으로부터 6 년 전 , 2002 년 10 월 5 일에 이스트 랜싱 미시간에 있는 주립 대학에서 글로벌 코리아 상을 받으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 무려 4 개원이라는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2 년 반이 지나 완쾌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그리고 그 후에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연약함에 있었지만 , 2004 년 3 월 1 일 에 서울대학교에 초빙교수로 부임하여 2 년 동안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니 , 이 역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
2010 년 4 월 일에는 저의 집사람이 계단에서 떨어져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 하지만 4 번의 수술을 받은 후 , 치료를 시작한 지 13 개월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러다가 최근 지난 7 월 23 일에는 Stroke 에 걸려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 하나님의 은혜로 한 달 만에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 제가 병중일 때에는 제 집사람이 시중을 하느라 고생을 하였는데 , 이번에는 제가 집안 살림과 부엌일 을 하게 되면서 , 주부의 일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을 배울수 있었습니다 . 집사람을 회복시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이지만 , 이 일을 통해 남녀평등의 귀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주셨으니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
“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생길 때 ”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의 저자 Harold Kushner 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 고통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 이런한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 “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고 , 교회에서도 열심으로 봉사하며 섬기고 있는데 ,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런 화를 주실 수 있느냐 ” 고 원망을 합니다 . 하지만 , 우리는 그 재난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지시하고 계시는지를 물으며 ,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 고난 속에는 , 앞으로 있게 될 내일을 우리가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숨어 있디 때문입니다 . 지금껏 이 믿음을 주셔서 인생의 곤경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
6. 기쁨과 희망의 종교를 바라며
기독교는 기쁨과 희망의 종교입니다 .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이 우주를 정복케 하시고 다스리고 삶을 즐기도록 하셨습니다 . 창조는 삶의 선포입니다 . 그러므로 , ‘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 삶은 아름다운 것이며 , 그 안에는 선택의 자유 , 질서 , 출산의 기쁨 , 축제와 같은 행복의 가치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 산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닙니다 . 삶은 사랑과 관련이 되어 있고 , 자기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이웃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같은 존엄한 책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 삶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셨고 ,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며 , 기쁨의 종교입니다 . 기독교는 경건함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며 , 엄숙한 표정을 가지고 예배할 것만을 요청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 오히려 , 밝은 얼굴로 기쁨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는것 ,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
기독교는 원조로 시작한 종교가 아닙니다 .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가 이미 시작외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창조의 경륜은 범죄의 발생 이전에 이미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 기독교는 창조와 축복 (Original Blessing) 의 종교이지 , 죄의 종교가 아닙니다 . 기독교를 죄의 종교요 어둠의 종교로 만드는 신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 기쁨의 종교 , 축복의 종교 , 창조의 종교로 받아들일 때 , 우리는 이전에 없던 더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고 ,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로 인해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
타락과 속죄의 신학체계 속에서는 그 중심은 “ 인간의 죄성 ” 입니다 . 그러나 축복의 신학 중심에서는 , 이 우주에 이미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깃들어 있다는 고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창조의 축복이 죄보가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 우리는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한 이 우주와 세상을 사랑하고 ,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죄악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 오히려 그 안에서 선의 요소들을 찾고 , 주어진 삶을 즐겁게 영위해야 합니다 . 창조의 기쁨과 창조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최대의 특권입니다 .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모든 크리스천은 항상 새로워져야 하며 , 창조 (New Creation) 적이 되어야 합니다 . 그를 통해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것 (New Being) 이 될 수 있습니다 . ( 고후 5:17) 그러나 , 우리가 이처럼 새롭게 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그것은 우리가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 막 12:30-31) 는 신약의 두가지 계명 위에 확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