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1호

구약의 영성(7) 바벨론 포로기의 영성: 회복을 향한 출발(이사야 40장)

11/19/14   하홍표

부산대학교 상과졸업 , Harvard University 신학석사 , Drew University 에서 구약학 박사를 (Ph.D.) 취득하였고 , 해외한인장로회 (KPCA) 뉴저지노회 소속인 높은뜻교회에서 부목사로 현재 섬기고 있다 .

바벨론 포로기의 영성을 다루면서 이사야(40-55장)의 영성을 간과 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이 그려내고 있는 '삶의 자리' 를 통해 당시 유다 백성들이 포로민으로 바빌론에서 살았던 모습을 보게 된다. 시대가 다르지만 '왕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포로라는 삶에서 고민하고 부르짖었던 '질문'들을 듣게 한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고 난 후 줄곧 던지는 한가지 공통점은 고난 가운데 '왜'라는 질문을 내뱉는 다는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해답이 성경 속에 있음을 믿는 사람들을 '신앙인' 이라고 부른다. 단지 본문에서 발견되는 고난, 위험 등과 같은 동일한 단어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삶의 고통이 어디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회복을 배우는 것이 신앙인의 영성 과제이다. 이제 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면 유다 포로민들이 처한 삶의 자리로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삶의 자리

본문은 유다라는 나라가 바빌론이라는 제국의 침입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삶의 터전마저도 옮겨져 살아가게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시드기야 왕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그의 눈이 뽑히는 참혹함을 당하는 것을 경험한다. 왕이 그런 수치스런 모습을 당했다면 하층민들의 아픔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들은 그런 자유를 박탈 당하고 살아 가야만 하는 신세이다. 우리는 열심으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 경제적인 부도 축적하며 신분 상승도 허락 받는 가능성의 땅이다. 하지만 유다 포로민들에게는 절망의 땅으로 여겨질 뿐이다. 모든 것이 거절되고 가능성은 제로지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지금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굳어지게 된다. 더구나 하늘로부터 소리마저 선지자를 통해 들려오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의 신으로부터도 '왕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민족이 바로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유다 포로민들이다.

 

1절에서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소리에서 포로민들의 삶의 자리는 위로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누구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는 처지이다. 믿음의 대상인 야웨도 그들을 버렸는데, 다시 그들을 찾아와 위로해 줄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하는 형편이다.
바빌론 사람들이 그들에게 살도록 허락한 땅은 비옥한 땅이 아니었다. 강의 범람으로 폐허가 된 땅에 그들을 정착시키고 힘든 노역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2절). 느부갓네살 왕은 바빌론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잡아온 포로 기술공들을 몇 달씩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고 노역을 시켰다.
광야에 길을 내고 강의 수로를 내어 경작지를 다듬는 일이포로민의 일상생활이 된다.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오래 전에 미리 뚫어놓은 수로가 막히지 않도록 갈대를 잘라내는 작업이 이어진다. 그때 상한 손과 발의 상처의 아픔을 누가 치유해 주고 싸매줄 수 있는가? 이곳으로 잡혀 오기 전에는 손에 물도 묻히지 않던 그들이다. 이제 남의 나라에서 종처럼 시키는 일에 노역을 하고 있는 처지가 너무 슬프기만 하다.
노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다시 이르기를 바라지만 단지 소망일뿐이다. 시드는 들풀을 보며, 광야의 마른 꽃을 보며(6-7절) 자신들의 인생처럼 느껴져 더 비애감마저 드는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죽고 싶어도 돌아가면 자신을 기다리며 함께 이곳까지 온 자식들과 아내가 못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죽지도 못하고 겨우 연명하며 자존심 죽이며 살아가는 포로민의 삶의 처지이다.

질문

이런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큰 저항은 불신과 염려들이 섞인 질문들이다. 포로민들의 생각에는 바빌론 신이 야웨를 이기고 자신들을 이곳까지 끌고 와서 이방인의 발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보다 이방 신이 더 우위에 있지 않는가(18-20, 25-26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야웨가 바벨론 신 마르둑 보다 더 약해 보인다. 왜냐하면 신전의 규모도 바빌론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믿는다면, 바벨론 사람들은 더 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 신의 수가 더 많을수록 더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구원을 부르짖지만 반응하지 않는 것은 분명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무능한 신이 아닌가(27-31절)?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이 제국의 압제로부터 구속해 줄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실망만 안겨주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 속에 야웨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질문으로 쏟아지는 현실에서 선지자는 무엇을 답으로 제시할지 기대된다.

해 답

이사야 40장은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1-2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오지만, 사실은 하늘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의 소리'는 존재와 그 존재의 활동을 의미한다. 야웨가 바빌론의 신들이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쓰러져 죽은 것이 아님이 우선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여전히 야웨가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재확인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분의 위치가 변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유다 포로민들은 그들이 믿던 야웨가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고 바빌론 신들이 그 자리를 이미 차지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웨는 힘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포로민들에게 관심이 없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향한 무한한 관심으로 여전히 세상의 주관자가 되어 천상회의를 주관하고 계시는 것이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선언은 오직 야웨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졌고 그들을 위한 행동이 시작됨을 하늘에서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자연히 모르는 일이 된다. 아직은 알지 못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드러나지 않았기에 '신비한 것'이 될 수 있고 '새 일'이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움직임이 확인되었다. 포로민의 삶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숨어 계시는 하나님' 사45: 15), 하늘에서는 포로민들을 향한 그분의 쉬지 않고 활동하시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단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시인하라는 강력한 촉구이다. 오히려 그분은 포로민들을 향한 미래를 계획하시고, 백성들을 위로할 계획을 세우시는 '일 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불신으로 가득 찬 포로공동체에게 그분의 위로가 확실히 전달되기 위해 하나님은 두 번 반복적인(1절) 표현으로 포로민들에 대한 구원 계획을 강력히 피력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너희의 하나님'과 '내 백성'이라는 표현에서 1인칭과 2인칭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가장 친밀한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1절).
특히 '내 백성'과 '너희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이 먼 옛날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며 들려오던 그 소리가 아닌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관계를 상기 시키고 있다(출6: 7). 포로민들에게 아직 그들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지 않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비록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포로의 신분이 되어 이방 땅에 거처하고 있지만,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아직 파기되지 않고 유효함을 인식시키고 있다.
다시 사막을 건너 자신들의 땅이며 그들의 조상들에게 허락 되었던 땅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언약이 언급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내산 언약이(출애굽기19-24장) 비록 조건적이지만 회복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인식시킨다. 조건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사함을 받고 복역의 때가 마쳐질 때 다시 회복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조건적이긴 하지만 지속적인 계약의 성격이 부각 된다. 그러므로 시내산 계약은(출31: 16) '영원한 계약'(berit 'olam)인 것이다. 계약이 파괴 되었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선지자는 충분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다.
언약을 통해 그들의 죄 사함의 은혜가 선포된다. 포로기간인 70년에 대하여 선지자는 2절에서 '저희들의 죄에 대한 복역시기'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죄인가? 얼마나 많은 회개를 필요로 하는 죄가 그들 속에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얼마나 목이 곧은 백성들인가를 또한 보여주지 않는가?
죄 사함의 선포가 있는 후 회복의 구체적인 모습이 3절에서 그려진다. 행진 대로가 만들어진다. 그들이 잡혀 온 길이 있었다면 돌아갈 길도 있을 것이고, 지금 그 길이 예비되고 있다.
잡혀 오던 그 길은 광야 길이었고, 너무 험해서 고르지 못했고, 언덕이 있어 너무 그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기억뿐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살던 고향으로부터 잡혀오던 그 험하고 긴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오지 못하고 도중에서 죽어갔다. 성인 남자가 한달 이상을 걸어가야만 하는 먼 길을 어린아이들과 여인들 그리고 노인들이 함께 그 길에 있었다면 더 많은 인명을 손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걸어온 길은 눈물과 아픈 기억들만이 남는 길이다. 이제 다시 그 길을 가야 하지만 전에 걸었던 길과는 확실히 다를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 포로민들을 위해 준비하는 회복의 길은 높은 곳은 낮아지고 험한 곳은 평지가 되는 놀라운 것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4절). 야웨의 백성들이 사슬에 매여(렘52: 11) 동물처럼 취급 받으며 잡혀 오던 길과는 달리 이제 야웨의 영광을 노래하며 돌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5절).
삶의 자리에서 고민하며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해답을 선지자 이사야는 던져 주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죄 문제가 해결 되고, 그들에게 찬란한 미래의 희망을 던져준다고 해도 실제로 그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 올 수 있을까? 그리고 야웨는 그런 능력을 잃지 않고 아직도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을 6-8절에서 주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꽃처럼 일시적으로 영광을 나타낼 때가 있지만, 인간들의 일시적인 영광을 시들게 하는 것이 바로 야웨의 기운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흑암과 혼돈과 공허만이 자리 잡고 있는 그 곳에 불었던 하나님의 바람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야웨는 창조 때와 같이 지금도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야웨의 창조주 되심과(사 40:21, 22, 26, 28) 이방 신들과의 비교를(40:18-20) 통해 줄곧 그분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야웨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고 믿음을 회복하는 노력이다. 70년 동안 야웨가 바빌론 신들의 주먹에 맞아 기절해 쓰러져 있다는 생각을 던져버리라는 도전이다.
'70'이라는 수는 너무나도 포로민들의 믿음을 회복하기에는 어려운 난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안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문제에 즉각 답을 주시며 다가오셔야 되는데 답이 늦어졌다는 불만이다. 그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 우리를 떠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9절에서 '그렇지 않다'라고 선언한다. '그들의 해석이 틀렸다'라는 것이다. 영어성경의 정확한 번역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어떤 동사로도 그분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존재의 'be' 동사를 사용한다. 이 의도는 '그분이 존재하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될 수 있고, 또 '안 움직인다고 해서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영어번역(NIV; NASB)은 "Here is Your God" 으로 번역하여 여전히 존재하며 가까이 있는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개역과 개역개정("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공동번역은("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더 강조하는 면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온다'라고 번역하면 이미 그들을 떠나가신 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지자는 be동사를 사용해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더 강조하고 있다(새 번역은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로 번역).

하나님이 안 움직임으로 기절하여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무능력한 신으로 때로는 생각하지만, 그분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곁에서 넘어져 있는 우리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주시는 분이시다. 선지자는 포로민들을 향해 야웨가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함께 있어도 능력이 없는 야웨라면 함께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선지자는 야웨의 구원의 능력의 모습을 10-11절에서 야웨의 강한 팔에 안긴 양떼들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린양을 자신의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인도하심은 야웨가 목자처럼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심을 나타낸다(11절).
하나님의 백성은 야웨의 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야웨의 품에 안을 것이다. 야웨는 이제 강한 능력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시며 대적하는 모든 적들을 패하실 것이다(10절). 싸움에서 야웨가 얻은 대가는 그분이 품에서 내어 주었던 포로민으로 상징되는 암양과 양떼를 도로 찾는 회복이다(11절). 야웨의 팔은(사 40:11; 51:9; 53:2) 그분의 강함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야웨가 아님을 그분의 팔이 스스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야웨의 강한 팔의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발견된다(신 4:34). 그때 야웨의 팔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능력의 팔로 나타났었다. 애굽인들에게 억눌려 고생하는 것을 굽어 살피시고,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의 증거로서 야웨의 강한 팔을 뻗어 온갖 기적을 행하시며 애굽인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었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신 26:5-9, 6:21-25 참조).
하나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을 강한 팔로 돌보심이 강조되고 있다. 누가 그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능력의 팔을 가진 야웨는 분명 바빌론의 종살이(포로)에서 그들을 구원해줄 분임을 확인시키는 도구가 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억인자에 저장된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나게 만든 것이다.
이제 야곱으로 불리는 유다 포로공동체는 영원하신 하나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그분의 위대함을 노래하기 시작한다(28절). 그 분은 포로가운데 힘을 잃은 자들에게 새 힘을 주신다(29절). 포로민들은 야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소망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새로운 출발을 드디어 준비하기 시작한다.
먼 여정을 떠날 사람들에게,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확신과 신뢰를 줄 수 있기에 충분하다. 왕따들을 이제 설득하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 시작됨을 알린다. 이 모든 것은 출발일 뿐이다. 출발은 긴 여정의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그들은 긴 여정에서 다시 넘어지고 힘을 잃기도 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는 야웨로 인해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힘을 공급받게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복'인 것이다(29-31절).
사람들은 실수와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자신만이 숨을 수 있는 공간에서 머물기를 원한다.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리는 왕따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왕따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먼저 액션을 취한다. 그것을 우리는 그분의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왕따로부터, 숨은 곳으로부터, 부끄러움의 장소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올 수가 없다.
그분의 흘러넘치는 은혜에 밀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오게 되고,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회복'이라고 부른다. 이사야 40장의 들려주는 포로기의 영성이 당신을 왕따에서 다른 존재로 바꾸는 시발점이 될 것을 믿는다. 왕따들이여! 이제 새 출발을 선언해 보자!

[1] 이사야 40-55장의 포로시기의 작품이라는 주장과 다른 연대에 관해서는 P. D. Hanson, Isaiah 40-66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5), 2 그리고 J. Blenkinsopp, Isaiah 40-55 (New York: Doubleday, 2002), 93; 104등을 참조하라.
[2] 최근 바빌론 포로시기의 연구에 대한 자료는 O. Lipschits and J. Blenkinsopp, Judah and the Judeans in the Neo-Babylonian Period (eds. Winona Lake, Indiana: Eisenbrauns,2003) 을 참조하라.
[3] 실제 고대근동 역사에서 전쟁포로에 대해 앗수르 Sargon II에 의해 실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쟁포로들은 코에 고리가 걸려 (저자의 강조) 끌려와서, 한 사람은 무릎을 꿇어 애원하는 모습과 동시에 그의 눈을 창으로 찌르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A. Parrot, Babylon and the Old Testament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56), 97(Illustration XXXVI: Sargon II putting out the eyes of defeated enemies).
[4] 고대근동지역에서 왕들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 물을 끌어들이는 것이 경작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강들에 수로를 내고 그것들을 유지 관리하는 일을 그들의 주요임무 중의 하나로 여겼다. Parrot, Babylon, 124.
[5[ 에스겔 공동체가 정착하게 된 곳을 3장 15절에서는 히브리식 발음으로 Tel-Abib(mound of ears of corn), 그러나 바빌로니안 발음으로 Tel-Abubi(mound of the flood)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빌론 제국이 포로민들을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된 장소에 이주시켜 수로를 만들어 경작을 할 수 있는 촌락을 형성하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스 2:59; 8:15 참조).
[6] 이런 반복은 이사야 40-66장에서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난다(사 51:9, 17; 52:1, 11; 57:14; 62:10). Westermann, Isaiah 40-66, 34.
[7] 버나드 W. 앤더슨, 구약신학 (최종진 옮김; 서울: 한들 출판사, 2001), 151.
[8] Westermann, Isaiah 40-66, 35.
[9] 예루살렘에서 바빌론까지 대략 1500 Km 정도라면 하루에 군인들이 30Km씩 이동을 해도 1달 20일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러나 여인들과 아이들이 함께 동행했다면 석 달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10] 고대근동에서 전쟁포로에 대한 잔인함은 J. Oates, Babylon (London: Thames and Hudson Ltd, 1979), 28, 31을 참조 할 것. 주전 8세기경 앗수르왕 Tiglath-Pileser III의 전쟁 모습에서 궁수들이 활을 당기고 있고 왼쪽 상단 위에는 전쟁포로들을 발가벗겨 나무에 목을 꽂아 죽이는 잔인한 모습이 보인다(British Museum).
[11] Blenkinsopp, Isaiah 40-55,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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