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0호

딸, 아들과의 만남

11/19/14   유숙자

현재 중국연변대 과학기술대학 간호학 부장
가톨릭대학 간호대학 명예교수, 전남대학교 교수
한국 정신 간호학 회장, 한국 정신 보건 간호사회 회장,
한국 간호과 학회 이사, 한국 정신사회 재활협회 부회장,
한국 호스피스 완화 의료학회 부회장
1963년 서울대 간호대학졸업
1991년 서울대학원 간호학 박사
서소문교회 권사

네 번째 만남 : 배 아프지 않고 낳은 첫 딸 박애련(가명)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우리학교)은 신입생이 입학하면 그 학과의 전체교수들이 학생들을 나누어 지도교수가 된다. 그리고 4년 동안(졸업할 때까지) 그 학생의 멘토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연변에 와서 2년 동안 열심히 학부장으로 행정만 보고 개인 학생들 지도는 맡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 학생들이 없고 보니 내가 양육할 제자가 없었다. 자식이 없는 부모가 쓸쓸하듯이 나도 양육의 기쁨을 맛볼 수 없었다. 그래서 3년 전부터는 신입생이 입학할 때 마다 3명의 학생들을 내 제자로 받아 9명의 제자가 생겼고, 다른 교수가 맡았다가 이곳을 떠난 4학년 학생들 까지 현재는 12명의 제자가 내 자식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자식 많은 엄마처럼 든든한 교수가 되어 매주 학년별로 4차례 집에서 모여 지도하고 있다.

내가 처음 만난 애련(가명)이는 내가 지도학생이 없을 때 만난 첫 학생이었다. 다른 지도교수가 이 학생을 맡고 있다가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나에게 의뢰된 학생이었다. 그녀는 3세에 부모가 이혼하여 아버지는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12세 때 엄마마저 언니와 애련이를 외삼촌 집에 맡겨 놓고 멀리 떠나 버렸다. 이들은 고아아닌 고아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우리대학까지 오게 되었다. 애련이 지도교수가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끔은 애련이에게 망상도 있고 환청 비슷한 증상도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내가 정신간호학이 전공이라 나에게 의뢰된 것이다. 그녀는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삶에 아무런 의미도, 의욕도 없는 상태인 것 같았고, 묻는 말에 무책임하게 아무렇게나 대답을 내 뱉는 학생이었다.
예의 없는 태도에 은근히 화도 났다. 그러나 아무튼 문제아인 것은 확실하기에 인내를 가지고 그와 첫 만남을 가졌다. 신학기 초였다. 나는 고교 동기동창인 친구에게 이미 애련이에 대해 말하고 장학금을 마련해 가지고 왔으므로 그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하여도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계속 공부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생각해 보고요"라고 답을 하고 이틀 후에야 와서 장학금을 받겠다고 하였다.

우리의 초기 만남은 정말 많이 힘들었다. 거의 일방적인 관심과 짝사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 하지 않았다. 애련이의 경우 이런 비정상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그녀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12세부터 부모 없이 자란 아이가 어떻게 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부터라도 애련이를 내 자식처럼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집에 초대하여 밥도 같이 먹고 때로는 시장도 함께 나가고.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애련에게 무조건적인 허용과 관심, 인정이 그를 차차 변하게 하였다.
그녀의 지도교수가 그녀를 위해 늘 열심히 기도하며 가끔 용돈도 주곤 하였다. 그는 차차 자기가 받은 은혜에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어하여 청소를 부탁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깨끗이 청소를 하였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애련이 만큼 청소를 깨끗이 잘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애련이가 변한 것 중 가장 큰 것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일이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아무튼 하나님 밖에 붙잡을 것 없는 애련이가 원색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다. 힘들게 졸업을 하고 지금은 시내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에 취업하여 환자들에게 칭찬 받는 간호사가 되었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교수님, "제가 월급을 받으면 학부에 1/10조를 내겠어요". 하기에 1/10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네가 너무 어렵게 공부하였으니 앞으로 너도 돈을 모아야지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애련이는 지금도 수입의 대부분을 후배들 전도에 다 소비하는 것 같다.
애련이는 졸업 후에도 매주 목요일마다 학교에 와서 철야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학교를 위해 기도 제목이 있으면 말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철야하는 곳이 너무 추우니 전기난로가 있으면 달라기에 내가 사용하는 것을 내 주었다.
요즘 애련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며칠 전 찾아와 교수님 내외분이 보시고 OK 하면 계속 사귀고, NO하면 즉시 그만 두겠다고 하여 그를 만나 보았다. 아무튼 양부모인 우리가 애련이의 결혼문제도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외과에 근무하는 의사인데 우리마음에 흡족한 사람이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애련이는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그 청년의 눈에 애련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면 우리도 마음에 들것이다. 배 아프지 않고 얻은 우리 딸이 이제 얼마 있으면 결혼도 하게 될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의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고 그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것 같다. 연길에 와서 얻은 내 첫 딸 애련아,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을 받기 간절히 원한다.

다섯 번째 만남: 첫 아들을 얻게 됨

연변과의 인연으로 믿음의 청년 철수(가명)를 아들로 삼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총장님으로부터 의무실에 근무하는 젊은 의사를 한국의 의과대학에 석사과정을 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즉시 내가 몸담고 있었던 가톨릭대학에 알아보아 당뇨병연구로 유명한 교수 한분을 소개 받아 그분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철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와 어린 아들 한명 모두 세 식구였다. 등록금은 100%장학금으로 하고 월 백만원 정도의 생활보조비를 받게 되었다.
서울에서 백만원 가지고 3식구가 산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나는 철수를 위해 김안순권사님을 만나 그의 딱한 사정을 말씀드려 영락교회 등대회에서 졸업할 때까지 월 20만원씩 후원을 받도록 하였다. 삼성의료원, 서울성모병원 등 간호부장들에게 말하여 옷을 여러 상자 얻어 그들이 필요한 옷을 고르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신앙이 얼마나 좋은지 모든 것 감사하며 살았다. 가난이 그들에겐 더욱 기도의 삶을 살게 하였다. 1년이 지난 뒤 아내도 한국에 와있는 동안 석사과정을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중국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 와서 아이를 맡기고 한사람이 공부할 때 한사람은 벌고, 한사람이 공부가 끝나면 공부하라고 하였으나 그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어렵게 살면서 석사 공부를 함께 하였다.
철수는 철저한 신앙인으로 가대병원에서는 견디기 좀 힘들었다. 기독교가 술을 금하는 반면 가톨릭은 술을 허용하는 문화라 실험실에서 근무하며 함께 연구하는 석사생들과 술도 함께 하는 자리가 많았으나 술을 입에 절대로 대지 않는 그로서는 남들과 어울리는데 많이 힘들었다. 공부하는 일도 힘들지만 인간관계가 더 힘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의 믿음을 잃지 않고 10Kg이상 살이 빠지며 공부를 마쳤다. 그후 아내가 공부 끝날 때 까지 한국에 있다가 북경으로 돌아와 의사생활을 하였다. 북경에 있는 동안 그는 '북경기독의료인단체'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1년 다시 연변과기대 의무실로 돌아와 학생들과 직원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연길에서 병원에 근무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그에 비하면 아주 박봉인 월급을 받으며 이제 네식구가(작년에 딸애를 낳음)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부귀, 영화 다 버리고 오직 믿음만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그는 오늘도 믿지 않는 동료, 후배 의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비빔밥 한 그릇을 대접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가난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신의 가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며칠 전 북경에서 열린 '중국기독의료인단체(CCMA)'에서 개최한 2013 Health Care Fellowship Annual Meeting에 참석하여 연변과기대를 알리는 연설(강의)을 하여 많은 기독의료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나를 찾아와 말하였다.
가난하지만 떳떳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철수와 그 가정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만남을 주선해 주시고, 오늘도 그 아들로 인해 얼마나 내가 행복한가를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여섯 번째 만남: 눈물 많은 성애(가명)

성애와의 만남은 성애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용정에 있는 모 고중(고등학교)에 간호학부 홍보를 위해 나갔다가 3학년 주임을 만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갈 수 없는 아주 착한 학생이 있는데 간호학과에 입학하면 장학금을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성애는 우리학과에 1등으로 입학하였다. 독서가 취미라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었다. 나는 성애가 들어오던 해부터 지도학생 3명을 받기로 하고 성애를 내 지도학생으로 삼았다. 집이 가난하여 남보다 활발하지는 못했으나 모든 일에 열성이 많았다. 그는 어려서 심한 병으로 항생제를 많이 사용하여 청력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며 그 환경을 극복하려 애썼다. 약속대로 성애에게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기숙사비, 생활비 보조 등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나는 이 대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지도학생을 맡게 되어 그들에게 내 온 정성을 다 쏟아 부었다. 다른 교수들처럼 나도 제자를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며 그들의 생활도 열심히 들어주고 장래에 대한 꿈도 키워주곤 하였다. 성애 외에 두 학생은 엄마들이 여러해 전에 한국에 나가 엄마 없는 학생들이라 그들의 엄마역할은 당연한 일이다. 1년간 좋은 교제를 가지고 2년 째 부터는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현재 3명 모두 교회에 나가고 있다.
그중 특히 성애는 공대교수 사모님과 우연히 만나 1학년 때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하였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그러나 성애네 가정은 자주 부모님이 다투시고 그럴 때 마다 성애에게 전화하여 울면서 집으로 달려가던지 아무튼 성애가 전화로라도 부모님의 싸움을 중단 시켰다. 대부분 싸움의 원인은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때리고 매 맞는 심한 싸움으로 번진다.

나는 성애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 먹었다. 용정에서도 30분 이상 더 버스를 타고 가서 또 내려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아주 깊은 산골마을이었다. 농사를 지으며 사는 그 마을엔 여자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성애 밖에 없다고 어머니는 딸 자랑을 하며 어려서부터 받아 모아 둔 상장들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정말 교수님이 아니면 우리 딸이 대학은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이라고 감사한 마음을 표하였다.
아버지도 생각보다 아주 얌전하신 분이 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들 한명을 데리고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 성애를 낳았다. 가난과 그 아들 문제로 늘 그 가정에 불화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학생을 제자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부모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기 바랐다. 그 가정의 문제는 돈으로만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서로 믿고 함께 노력하며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몇 번의 방문으로 성애의 부모와는 가까워졌으며 성경을 읽게 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을 받아드릴 마음의 문은 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싸움의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한동안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성애는 벌써 3학년이 되었다. 지난 겨울방학엔 한국에 나가 알바를 하여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하여 2개월간 우리 집 방 하나를 내어 주고 생활하면서 알바를 구하게 하였다. 4학년이 되면 8개월 동안 병원에 임상실습을 나가는데 그때 필요한 돈을 집에서 받을 수 없어 자기가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에서 번 돈이 충분치는 않으나 조금이라도 자신이 노력하여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였다.
성애는 연대에 실습을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귀가 잘 안 들리는 문제 때문에 교수님들은 연변에서 실습하기를 권하신다. 만일 이 문제로 실습에서 문제가 생기면 타지에 가서 어떻게 교수들이 도울 수 없기 때문에 연대는 가기 힘들겠다고 하였으나 성애는 고집스럽게 연대에 가서 자신의 약점을 열심히 극복해 보겠다고 한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보겠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겠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찰을 받고 보청기를 끼려 하는데 돈이 없다.
성애는 오늘 아침 또 울면서 내게 왔다. 오빠가 갑자기 폐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시골집을 팔아도 진찰비도 안 나올 형편인데 치료는 생각하기도 어렵다면서 한참을 울었다. 왜 이렇게 성애에겐 끝없이 문제만 생기는가? 해결할 길이 없다. 지도교수인 나로서도 그를 어떻게 도와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하나님! 성애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이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잘 넘김 수 있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빨리 시간이 흘러 졸업하여 돈을 벌어 가족을 도울 수 있을 때까지 이모든 고민과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깁니다.

개신교수도원수도회 Protestant Abbey Mission

234 Tenafly Rd. Englewood NJ 07631
Tel: 201-408-4756, 201-655-0199   Email: estheryskim4@gmail.com
Copyright © Protestant Abbey Mission.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Intonet Solution

VISIT COUNT: 132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