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4호

나의 목회 여정 (2) 능력의 본체 [빌 4:13] -개신교수도원 은퇴목사 집회 2014. 2. 26 (수)-

07/29/14   김종원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구세군 사관학교 졸업
구세군 부정령으로 은퇴
Good News 한글판 편집인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말씀은 지난해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에서 내가 뽑은 성구입니다.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면 이 말씀은 그대로 내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은퇴하고는 옛날 일들을 많이 돌아보는데 그러나 앞으로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함을 느낍니다. 나는 장로교회에 13년간 신앙의 바탕이 형성되고, 구세군에서 53년을 계속 사역하고 있습니다. 구세군에서는 구세군 평신도와 직분자로서 7년, 사관학생으로 2년, 사관으로 한국에서 20년간, 미국에서 현직에서 13년간 사역하고 은퇴 후 11년 동안 계속 재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13년 장로교회에서 신앙 확립 (1948-1961)
나는 경북 의성군 단북면에서 13대 독신 할아버지의 장손으로 교회가 없는 작은 마을에서 불교신앙의 가정에서 출생(1938)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면소재지로 이사하여 집 가까이에 있는 안계장로교회에 다녔으며, 1952년에 안계교회 주일학교를 졸업한 후에 학습교인이 되고 주일학교 보조반사로 사역하였습니다.
1954년 상경하여 미션스쿨(경신고)에 진학하고, 마포 공덕교회에 잠간 다니다가, 서대문 충정교회에 다니면서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의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자녀들을 서울에서 대학 공부시키겠다고 상경하여 고생하시는 불신의 부모님께 신학교 간다는 말은 못하고 대학교 신학부로 간다고 허락받고 1957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하였고, 교회에서는 찬양대원으로, 청년회 임원으로, 유년주일학교 총무로 봉사하였습니다.
1959년경 장로교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질 때 충정교회는 합동이고, 내가 다니는 신과대학은 에큐메니칼이라고, 신앙적인 이질감을 느끼게 되어서 집 근처에 있는 전경연 박사께서 개척한 기장 경서교회로 이전하였습니다. 경서교회에서는 학생회 지도교사와 기장서울노회 청년교육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공군 3년, KSCM 5년 그리고 구세군 병사와 하사관 (1962-1969)
1961년 대학 졸업 후에 신학과 관련된 일 대신 세상의 일을 하기 위하여 다른 분야의 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공군입대 하였습니다. 당시 주변에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여의도 공군부대에 배치되면 야간에 종로나 명륜동에 있는 대학에 다니도록 공군부대에서 자동차편까지 제공하고, 대학 졸업생들은 학사 편입하여 다른 학문을 공부하고 제대쯤에는 대학도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공군에 입대하여 여의도로 와서 대학에 학사 편입하여 2년간 다른 학문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세상으로 들어가서 살 목적으로 공군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여의도비행장(K-16 공군기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때는 인간의 계획대로 잘 되는 듯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5.16 이후 하사 이하는 매일 외출이 금지 되었습니다. 결국 3년간 공군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여의도 기지교회에 다니면서 군목을 만났는데 그분은 공군 대위이면서 구세군 사관으로 서대문 독립문 근방 구세군영천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을 만남으로 구세군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마치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3일 후에 니느웨로 가서 사명을 감당한 사건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집이 서대문구 안에 있었으므로 구세군 영천교회까지는 도보로 갈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나는 다행히 보급대대본부 행정계에서 근무하므로 매주 말에 외출해서 교회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첫 주부터 구세군 영천교회에 출석하였으나 구세군의 용어, 군복, 성만찬 등으로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군군목인 구세군 사관과의 대화로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구세군의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구세군 사관으로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때 알게 된 구세군의 특징은 지금까지 기억하면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신 중에 하나는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고, 죄지은 자를 깨끗케 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3 S 정신'[Soup, Soap, Salvation]이 있고, '구원 받은 것은 구원하기 위함'(Saved to Save)이며, 구원 받은 것은 봉사하기 위함'(Saved to Serve)이라는 목표로 사역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구세군은 사관학교 입교부터 천국입성까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사역에 헌신적으로 일만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취업을 위하여 염려할 일도 없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당시 신학대학은 졸업했지만 교단 배경이 애매한 관계로 구세군에 가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존경하는 교수님과 목사님 몇 분과 상담했었는데 구세군에 대하여 좋은 반응을 보인 것도 구세군으로 옮기는데 작용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구세군 교회에 다니면서 장로교회에서 배운 예정론에 대한 의문은 다소 해소되고, 만인 구원론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공군 제대 후에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M)에 간사로 5년 이상 학원선교의 현장에서 사역하였는데, 생애 첫 직장이었습니다. 당시 총무는 손명걸 목사였고, 나는 전국고등부와 사무행정 담당간사로 사역하였습니다. 이때는 한국내 20여개 도시에 있는 회원고등학교와 지역학생연합회를 위한 후원과 지도력 양성을 위해 부지런히 다녔으며 겨울과 여름에는 수련회를 준비하여 학원 선교에 최선을 다하였는데 그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던 학생들이 현재는 뉴욕지역에서 교협회장으로 봉사한 분들도 있습니다. 손 목사께서 사임한 후에는 민주화운동에 힘을 쏟으신 박형규 목사께서 총무로, 다음에는 임시로 오대원 목사(예수전도단)께서 총무로 오셔서 모시면서 사역하였습니다. 1967년도에 잠시 동안 진로에 대한 갈림길에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관석 목사께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로 취임하신 후에 나에게 KNCC 청년부와 행정부간사로 오라고 할 때 가느냐? 고민하였고, 또 Chicago Ecumenical Institute에서 1년간의 장학금과 월 20-25불 용돈까지 제시하는 초청이 왔을 때 시카고로 가느냐? 아니면, 구세군 사관으로 가느냐? 고민하였습니다. 결국 구세군 사관학교로 가기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특기할 일은 구세군 교회에서 현재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하고 사관으로 함께 헌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세군 사관은 부부가 함께 구세군사관학교(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육과 훈련을 받고 사관으로 임관(안수) 받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거부하면 사관이 될 수 없는 제도입니다.

한국 사관으로 20년 사역 (1971-1986, 1992-1996)
1969년 한국 구세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년 후에 영국 구세군만국사관학교에 편입하여 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1971년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안수)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첫 임지로 대전 삼성교회 담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목회뿐 아니라 교회 내 병설 시설인 유치원이 있어서 원장으로도 사역하였습니다. 대전시 교육청에서 원장의 자격증이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어서 마침 공군에 있을 때 문교부로부터 받아 놓은 고등학교 철학과 준교사 자격증을 들고 갔습니다. 상급학교 자격증이라면서 원장으로 허락하였습니다. 18개월 정도 열심히 목회하던 중에 군국본영으로부터 전근통지가 왔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본부의 필요에 따라서 본인의 의견과 상관없이 전근 임명을 하는데 이러한 제도가 때로는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하거나 교회가 원할 때에도 전근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삼성교회 직분자 몇 분이 군국본영에 가서 전근을 취소해 달라고 항의 하였는데, 당시 사령관인 영국인 사관은 자리를 떠나서 만나지 못하고, 서기장관이 잘 설득해서 귀가했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서 구세군 교단 전근에 대한 도전으로 기록되었지만 사관에 대한 교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 일이었습니다.
본영에서의 직명은 청년부주임이었는데 원래 청년부서기관이라 하는데 당시 부위 계급의 젊은 사관이 임명됨으로 서기관의 일을 하면서도 명칭은 주임이라 하였습니다. 7년 이상 사역 때에는 전국 6개 지방의 청년사업을 지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때는 겨울과 여름에 모이는 청소년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출장을 많이 다녔으며, 거의 매월 2-3회 각 교회를 방문하여 청년들을 만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개인 자가용은 생각도 못하던 시기였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장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고 기억됩니다. 더욱이 사관이 호텔 출입은 상상도 못하고 출장지의 사관 주택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니 얼마나 고생했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꿈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인간관계는 더욱 두터웠던 것 같습니다.
청년부는 후보생부 라고도하며 구세군 사관학생을 선발하는 일을 담당하기 때문에 청년들과의 접촉은 대단히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구세군 사관학교 입교는 일반대학처럼 학교에서 시행하는 입학시험에 의한 것이 아니고, 면접과 시험 외에 신앙생활과 교회에서의 봉사와, 담임사관과 제직들과 지방장관 등의 추천으로 이루어지고 전체 선발업무는 본영 청년부에서 관장합니다. 내가 청년부서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2년에 한 학기씩 모집하던 제도를 매년 모집하는 제도로 변경하였는데 매년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선정에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중요한 일 하나는 한국 구세군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창립회원이며 거의 모든 교회연합기관에 회원교단으로 참여하는데 대한기독교교육협회(KCCE)에는 가입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입되었습니다마는 당시에 가입을 신청 하였을 때 KCCE 총무와 교단 파송 이사들이 회의한 결과 구세군의 용어, 제도, 의식의 문제로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세군에서는 당시 모든 교회가 사용하던 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간하는 주일학교 통일공과 사용을 중단하고 구세군 자체로 주일학교 1년 교제, 동기와 하기학교성경학교 교제 등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다른 교단에서도 계단공과 등 자체 주일학교 공과를 발간하게 되어 결국 통일공과의 생명이 약화된 일입니다.
1979년경 구세군의 사역은 전도와 봉사 그리고 교육이라고 강조한 지도자는 세바퀴 자전거의 사역을 비유하며 나를 교육부서기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본영에서의 두 번째 임명이었으나 이때는 몇 가지 사역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세군 부평교회 안에서 운영하던 부평고등공민학교교장으로 겸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진학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중학교 과정인데 자격이 있는 교장이나 교사를 임명하기는 구세군 자체도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므로 고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제가 교장으로 인천시 교육청에 신고하여 허락 받고 취임하였습니다. 다행히 현재 학교가 있는 지역의 대지를 구입하여 학교와 직업훈련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부평학교교장과 직업훈련원장으로 신축을 위하여 기도하며 연구하던 중에 독일 개신교 해외후원 단체인 EZE에서 한국 여러 기관에 후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관계담당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났고, 1980년에 독일 EZE를 방문하여 구체적은 후원을 요청하고, 직업훈련원과 학교 신축 프로젝트를 준비하여 제출한 결과 330만 마르크(백만 불 이상)를 무상으로 도움 받아서 학교와 훈련원 건물을 1982년 신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동차, 배관용접, 비서학과(타자에서 컴퓨터로 변경)로 시작했으나,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직업훈련원은 더 이상 운영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학교로만 운영되어 현재 정규 인평자동차정보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80년에는 부평학교 안에 교사들과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산곡교회를 개척하여 2년 반 정도 목회하고, 학교 건축 후에는 전임 교장과 훈련원 원장이 임명되고 나는 본부 교육부서기관으로 학교와 훈련원 감독자로 사역하였습니다. 1984년도에는 구세군 부천교회를 개척하여 2년 여간 겸임 사역하였는데 부천 개척 시에 3-4세 된 여자 어린아이가 우리 부부가 구세군 군복을 입고 심방을 가면 엄마에게 “엄마 하나님 왔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 구세군 사관학교 강사로도 16년간 봉사하였습니다.
1986-1992년까지 미국 뉴욕에서의 구세군 교회 개척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여 경북지방장관으로 1년 7개월 사역하고, 다시 군국본영 사회부/섭외부서기관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기획국장으로 임명되어 사역 중 1995년에는 러시아 브라디보스톡 구세군 한인교회 개척을 위해서 현장 방문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20년간 사관으로서의 대전과 대구에서 3년간, 서울 군국 본영에서 17년간의 사역은 능력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참으로 보람된 사역의 기간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사역 13년 + 은퇴 후 11년  (1986-1992, 1997-현재)
1986년 구세군 뉴욕한인교회를 개척하여 6년간의 사역 기간은 한국 구세군에서의 주로 행정직에서 현장 사역자로 변화 즉 섬기는 종의 사역을 실천한 기간이었습니다. 뉴욕 개척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한국에서 구세군 다니던 교우들과 미국 구세군 지도자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미국 구세군 본부에서는 집회장소, 주택, 자동차, 각종 보험, 생활비 등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제공하였습니다.
1986년 5월 13일에 뉴욕에 도착하여 두주 후 6월 1일에 Flushing 구세군 부스기념병원 강당에서 개척예배 드렸습니다. 초창기에 여러 환자들을 무상으로 도와주었더니 어떤 분이 몇 달 교회 출석한 후에 "그만큼 나와 줬으면 되었지요?" 하였습니다. 1987년도에 아스토리아 구세군 현지인교회로 이전함으로 자연히 환자들을 돕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전공한 한인을 채용하여 한인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추진하였으나 한인들 보다는 지역의 여러 민족을 위한 사역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구세군 사관의 권위로 영주권 문제를 해결한 일입니다. 본 교회에 잠시 다니다가 중단한 이 모 씨(시민권자)가 어느 날 전화로 울면서 남편이 한국으로 영주권 인터뷰하러 갔는데 자녀가 없으니 아마 계약결혼으로 알고 거절되었는데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했더니 국회의원의 추천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알고, 부탁할 수 있느냐하고 고민하는 중에 마침 매일 오는 서신들 중에 지역 의원 한분이 자신의 지역사회 봉사업적을 알리는 안내지를 기억하고, 거기에 나오는 의원에게 "이 모씨 부부는 본 구세군 교회 교인으로 그동안 부부로 신앙생활하며 미국에서 살아 왔는데 한국에 영주권 인터뷰 갔다가 생이별하게 되었는데 가능하면 부부가 성탄 전에 만나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그분에게서 자기는 뉴욕주의원이므로 힘이 없고, 지역 연방의원에게 의뢰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그 연방의원이 한국 주한미대사관으로 연락했다는 소식이 왔는데 그 내용은 이 씨건 어떻게 되었는가? 라는 극히 간단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인터뷰 날자가 다시 잡혔고, 얼마 후에 영주권을 받고 미국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주의원이나 연방의원도 구별 못하던 구세군 사관의 싸인이 있는 서신 한 장이 영주권을 얻는데 작용한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인들이 지역주민에 대한 관심에 놀랐습니다.
당시 구세군 사관이 해외에서 사역의 임기는 4년이었는데 한번 연기하여 계속 뉴욕에 있으라는 본부의 부탁이 있었으나 2년만 더 연장 근무하고 1992년에 귀임하면서 자녀들은 계속 뉴욕에 그대로 있게 하였습니다.
1997년 다시 미국사역의 임명을 받고 뉴욕에 왔습니다. 미동군국본영으로부터 군국한인사역컨설턴트와 필라델피아에 구세군 한인교회 개척의 임명을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필라델피아는 대부분의 교회가 장로교입니다. 어느 아는 분이 필라에는 장로교회 외에 다른 교파는 성장이 아주 힘들다고 이제 구세군이 개척되면 되겠는가? 하면서 많이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임명된 이상 중단할 수은 없는 실정이었으며, 구세군 한인교회 개척을 알리는 광고를 내었더니 한국에서 구세군 다니던 남매 두 가정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분들을 만나서 5-6명이 모여서 개척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고, 1998년 5월 정식 창립예배를 드리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필라에서의 사역은 영혼 구원은 물론 사회봉사사역으로 개척사역에 도전하였는데, 매년 2회 노인잔치를 개최하고, 사회복지를 전공한 직원을 채용하여 구세군 봉사센타 운영하고, 7년 동안 필라한인교회를 섬기는 동안에 대필라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도 하였습니다. 교협회장 때에 어느 목회자가 구세군 다니는 교인에게 구세군 이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목회자는 구세군 교인보고 "어찌 그런 교회에 다니느냐"했답니다. 구세군 교단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미국 사회에서 구세군에 대한 이해와 협조는 대단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200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사위원회 사회복지 관련인사 22명이 미동부 사회복지시설 견학 방문 시에 20여 명이 미국 입국 비자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1명은 본인의 거짓기록으로 불가능했음) 당시 미국입국비자는 한국 종교인들에게 많이 거절되든 때였으나 구세군의 이름으로 첨부한 편지를 보고 주한 미대사관에서 전원에게 입국 비자를 발급한 것입니다. 제가 구세군 동군국본부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사회복지시설 관련인사들이 동부 구세군 시설견학요청이 왔으니 허락해 달라는 서신과 군국본영에서 허락한 서신 2매가 미국 입국비자를 받는 초청장의 역할을 하여 길게는 10년, 짧게는 3개월까지 입국비자 받은 것입니다. 인솔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단체로 입국 비자를 받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면서 미국에서 구세군의 신뢰가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필라에서는 변경된 구세군의 해외 사역기간 3년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가야하였지만 미국 구세군의 은혜로 미국 사관으로 신분이 변경되었고, 은퇴 후에 현재까지 재가사역중입니다. 현재는 동군국한인사역컨설턴트와, 한글 Good News! 편집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Good News!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연10회, 한글로는 연 4회 계절별로 발간됩니다. 현재 구세군에서 한국 밖에서 발간되는 유일한 한글 문서이므로 미동군국에서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크게 공헌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내가 한 일은 모두 구세군의 권능으로 되었습니다. 구세군의 권능은 능력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된 것을 고백합니다.
내가 들은 설교 중에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 사람, 즉 거미, 개미,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거미에게 먹히는 강도를 당하는 일도 있었고, 내 주변에 개미 같은 사람이 지나가기도 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꿀벌이 되는 이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이웃이 었는가를 많이 생각합니다. (201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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