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으로 회복하는 교회
10/16/14
이종범

토론토 영락교회 집사
토론토 대학 철학사 (B.A. hons.) 및 윈저 법학과 (J.D.) 졸업.
KCAB 국제 법 중재인(Arbitrator) 및 국제변호사 협회회원
현 Cobalt Counsel Law Firm 파트너 변호사
내가 1975년 이곳 토론토에 이민 왔을때 즘 김창길 목사님께서 내가 출석 하던 교회에 부목사로 청빙되어 오셨다. 나는 한창 감수성과 열정이 많은 사춘기를 지나는 시기 였던 막 이민온 1.5세의 학생이었다. 학교 생활은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이질감 속에서 자존감의 상실과 행동반경의 위축 때문에 그저 출석하던 한인교회에서 외로움과 박탈감을 만회하고 위로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 오던 때였던 것 같다. 중. 고등부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나름대로 신앙심 깊고 도덕적인 측면에서 사뭇 세상의 친구들과 다르다는 거룩한 구별됨(?)을 은근히 자부하며 교회 출석을 열심히 했었다. 교회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고 나의 존재감을 충족 시키고 친구들을 사귀며 행사를 통한 열정의 충족을 더욱 더 채우기 위해 주일 뿐 아니라 주중에도 일부러 행사와 봉사 거리를 더 만들어 교회에 더욱 더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때 김목사님은 어느날 우리들을 따로 불러 모아 우리의 열정과 신명난 교회 생활에 찬물을 끼엇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 훈계 내용의 말씀은 거의 35년이 지난 오늘 날 까지 잊여 지지 않는다. 그 때 하신 훈계의 말씀은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이며 기를 죽이는(?) 말씀이셨다. 왜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허구헌날 교회에 와서 생활 하냐는 것이었다. 즉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가 되려고 열심히 생활하지 않고 교회에 밤낮으로 나타나 봉사하고 예배 본 답시고 그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냐는 꾸지람 이셨다. 오히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을 열심히 살아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라는 교훈이었고 그 교훈은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 시간 때 자주 18번으로 반복해 등장 하는 설교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훈께를 들었을 때 우리 모두는 충격적으로 반응했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교회에 무조건 열심을 다해 봉사하고 자기 희생을 통해 교회 (당시의 학생부)의 발전과 부흥에 공헌해야 된다는 정당성 있는 논리를 깨들이는 말씀을 딴 분이 아닌 목사님으로 부터 듣다니, 당연히 충격적으로 받아 들일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 성인이 되었어도 목사님의 교훈은 지극히 평범한 평신도인 나의 교회론에 아직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성인이 된 후 토론토와 한국, 그리고 다시 토론토에서 생활하며 교회에 출석 하고 있다. 그러면서 평신도로서 주간적이고 비전문적인 평가 일지 모르나 고국의 교회들이 사회에서 간혹 비판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통감 하고 북미 교포교회의 많은 아픔과 상처를 보며 내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발견해 간단히 서술하고자 한다.
우상화 되는 교회
나는 한국에서 90년대 초 부터 약 15년간을 살았다. 그 때 이미 한국의 교회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폭팔적인 성장과 부흥을 거듭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선교사를 인구비율로 따져 제일 많이 세계 곳곳에 파송하는 일등 선교국이 되어 있었다. 한국의 개신교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대단하다. 공동체적인 교회를 위해서라면 희생하며 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위한다면 혼신을 다 한다. 교회는--특히 복음적인 보수 신앙의 개신교 교회--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아 내세에 가는 천국의 모형으로 간주 해 현세의 천국으로 승화 시키는 믿음으로 헌신히고 봉사 한다. 교회는 되도록이면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을 내세워 교인들을 교회에 더욱 더 집중하게 한다. 그래서 어느정도 크기가 되는 교회는 거의 매일 교회에서 행사가 있고 항상 봉사와 각종 프로그램 참여로 분주한 교인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기에 다양한 프로그램과 날로 늘어가는 교인을 더 많이 그리고 편리하게 수용하기 위해 더 큰 부지를 사들이고 더 큰 교회건물을 건축 하려 한다. 물론 이런 대형화 된 교회의 지속적인 발전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교회와 목회자들을 양성하게 되었지만 큰 교회는 더욱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거나 문을 닫는 곳이 많아지는 지극히 양극화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2000년도를 들어 서면서 그 화려한 부흥과 발전이 서서히 추락 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개신교 신자가 오히려 줄고 있으며 사회에서 종종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된것 같은 느낌이다. 왜 그럴까? 사실 교회를 평생동안 출석하는 평신도로서도 현대의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것이 그 어느때 보다 피곤함을 느낄 때가 많다. 현대 교회는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로 가득 차 있다. 불과 20여년전까지만 해도 부흥할때의 교회들은 영성에 집중 하였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프로그램과 행사로 인해 예배나 기도 시간은 그 진정성과 열심을 잃게 되었고 영적인 모임과 행사 보다는 그 것을 빙자한 여러가지 친교와 이밴트에 온갖 정성을 더 기울리는 것 같다. 한마디로 교인들은 외형적인 교회, 즉 그 건물, 공간, 교인친교, 문화행사 등이 우상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한국의 한 대표적인 대형교회는 제자도 교육과 훈련 커리컬럼을 한국으로 처음 도입해 교계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근대 최근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곳중의 토지를 매입하여 왠만한 기업도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교회를 건축한다고 해 교계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게 큰 대형 건물을 지어야하는 이유를 그 교회 대표들은 제자도의 세계화를 위해서라 한다. 즉 큰 교회건물을 지어 최 첨단의 시설과 공간을 마련해 훌륭한 예수의 제자를 더 많이 배출 한다는 것이 그들이 밝히는 정당성 이다. 그 웅장한 교회 건물이 완공 되면 많은 사람들이 크고 화려한 건물의 교회를 보며 탄성을 지르며 기뻐 할것이다. 하나님을 영의 눈으로 보지 않고 교회의 건물과 그 영향력과, 교세와 자랑이 하나님을 대신 할 것이다. 교회가 우상이다.
하여튼 그런 자랑(?)스런 교회의 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공동체적인 교회의 우상화에 빠지기 쉽다. 모든 관심과 신경이 교회의 발전과 많은 프로그램 및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 많은 숫자가 모이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성실히 사회에서 땀 흘려 노동하고 주일 하루만이라도 교회에 와 참 회계와 성도들과 함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일주일에도 몇일 씩 교회에 와 교인들과 지속 적으로 사귀며 각종 행사에 봉사하고 참여 하며 자기 사업과 가족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공동체적인 교회의 발전과 부흥이 있으면 진정한 교인이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그 사이 개인적인 영성 생활은 당연히 줄어들고 영적성숙 과 사회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이는 노력과 몸부림은 관심의 대상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희생하며 일하는 자들을 교회의 빛과 소금으로 여기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에 걸맞는 직분의 명예로 보상을 받으며, 세상에는 당연히 소홀하게 되어 십자가를 지고 복음의 전파와 선한 행동의 빛과 소금역활은 그 만큼 상대적으로 소홀 해 지기 시작 한것이다. 교회 봉사가 우상이 되고,직분이 우상시 되어졌는 지 깊이 생각 해 볼 문제다.
평신도로서 교회의 발전과 부흥에 매달리다 보면 여러 면에서 정신적으로 피곤해 지는것을 경험하게 된다. 당연히 영성의 지속적인 관리도 교회의 여러 행사 속에 제자리를 겨우 지키던지 아니면 뒤로 쳐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참 부흥하던 우리나라의 60년대와 70년대의 교회 생활은 매우 단순 했던 것 같다. 물론 분란과 내분은 어느정도 항상 존재 해 왔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는 예배와 기도회, 그리고 성경공부로 대부분의 교회생활을 하던 때 였다. 매일 새벽기도, 삼일기도회, 금요철야, 그리고 주일이면 아침예배를 시작으로 저녁에 또 예배를 드리는 영성의 집회가 끈임이 없었다. 별도의 영성집회라던지, 영성 신학이라는 단어 조차도 들어 보지 못했다. 대부분 새로 믿는 분들은 교회에 들어 오기만 하면 예배나 기도회를 통해 눈물을 흘리며 회계했고 기존의 신자들은 자연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전도하며 제자도의 생활을 하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지금 같이 알파 프로그램, 전도폭팔, 제자도, 아버지/어머니학교, 부부성장 훈련 등등 이 없었어도 오히려 전도가 더 훨씬 더 잘되고 날로날로 교회는 자연히 부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좋은 화려하고 편리한 건물과 시설을 차려놓고 또 많은 프로그램과 교육커리컬럼 및 행사로 새신자를 초대해도 잘 오지 않으며 오히려 기존 교회 교인들의 수평이동만 왕성히 이루어져 잘 차려지고 편이시설이 많으며 각종 문화/사회활동과 행사, 사람들의 친교활동이 많아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사회적인 활동을 재미나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러지 못한 교회를 떠나 편안하고, 즐길 수 있으며 골치 아프지 않는 대형의 "좋은"(?) 교회로 모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때 많은 캐나다 교회들이 이런 사회적 편이시설을 마련해 교인들에게 충족을 주는 곳이 많았다. 즉 Community Church라 하여 예배 후 식사 대접은 물론이고, 많은 예산을 써 체육관을 건립하고 친교실을 크게 만들어 교회에 오면 예배 드리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활동 및 친교를 병행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크고 시설이 잘되어 있는 교회 들이 텅텅 비어 있고 박물관으로 쓰이며 급기야는 운영이 되지 않아 이슬람이나 힌두교 단체에 팔려 나가는 곳도 생겼다.
작금의 모국의 교회나 북미주의 한인 교회 모두 공통점의 문제가 하나 있다면 위 언급 했듯 공동체적인 교회가 우리도 모르고 있는사이 우상화가 되어 가지 않는가라고 고민 되어진다. 일단 성도들이 공동체로 들어 오면 진정한 예배를 찾아 드릴 수 있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자기 죄성의 고백과 회계하는 기도의 영적 분위기가 우선적으로 요구 되어진다. 행사와 프로그램이 다 의미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도와 예배의 영성보다 더 우선 되어 질 수 없지 않은가.
영성 중심의 교회
나는 평생 평신도로서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또 영적교육을 받아 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공동체적 교회가 교회의 부흥과 숫적 성장을 추구 하면서 수 많은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를 새로 도입하며 그 와중에 많은 피곤함을 경험하고 있다. 다시 모국의 교회 및 교포교회들이 예전 부흥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 영성을 추구하는 교회로 복고 되어 지기를 소망한다. 영성의 회복을 위한 공동체적인 교회는 우상화를 단절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영성회복을 원하는 교회는 바로 영이 살고 육이 죽는 교회라 생각한다. 교회를 지칭하는 진정한 의미가 각 개인적 성도 및 그 성도들이 모이는 파라다임이라면 당연히 영이 살고 육이 죽어아 한다고 생각 한다. 성경은 영이 살려면 육이 죽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성도가 매일 육이 죽어야 영이 사는 것을 경험 해야 한다면 공동체적인 교회도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각종 문화 행사나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교회가 생동있고 활성화 된다라는 논리에서 벗어 나야 할것이다. 교회내부 조직도 친교위주의 모임과 문화활동의 행사들이 영성을 방해 할 때가 많다고 본다. 특히 교포 교회는 이질적 문화와 언어 장애로 인해 주류사회에서의 박탈감의 외로움을 교회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충족 시키려는 경향이 너무 심하다. 그래서 더 많은 친교모임과 행사를 통해 교회에서 이런 행사와 봉사 활동으로 분주한 생활을 하게 한다. 교회가 상하고 외로운 심령을 위로 해 준다는 차원의 정당성도 없지 않으나, 그 이전에 영적 성숙으로 인해 영으로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선 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즉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단이지 여러 행사를 주관 하는 곳이 아닌 것이다. 두가지를 다 적절히 병행 하려 할때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말씀과 기도로만이 우선하고 충족되어 지는 곳이 진정한 교회의 상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여 그 말씀과 기도의 영성으로 성숙한 교인들이 선교하고 구제하며 사회에서 선하고 착한 행위로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게 되는게 아니겠는가?
또한 영이 살고 육이 죽는 교회는 조직을 간소화 하려 할것이다. 공동체적인 교회가 너무 교인들을 위한 조직과 부서를 많이 만들려 한다. 그래서 교회와 교인들만 위하는 조직으로 봉사의 기회를 모두에게 줘 봉사의 잉여 인적 자원을 최소화 하려 한다. 그래서 되도록 이면 모든 교인들이 한두가지 교회 봉사를 하게 유도함으로 성도의 시간과 신경을 교회로 쏟게 한다. 그런 봉사의 줄기를 타지 못하거나 직분을 얻지 못하면 교회생활의 도태를 가져오고 군종 속에서 외로움을 더 느끼는 경향을 가져 오게 만든다. 자연히 목회자도 그 조직을 통해서만 교인들과 주로 소통하고 봉사자들만의 목회가 되기가 쉽다. 되도록이면 조직과 부서가 교회가 지향 해야하는 영성(말씀과 기도) 집중 및 선교/구제 집중으로 간소화 되어지는 것이 영성회복과 성장의 지름길이라 생각 한다. 영성이 회복되고 성장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상을 섬기고 변화 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활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이 사는 교회가 되려면 직분의 명예심과 권세를 과감히 파기하는 곳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은 직함에 매우 민감하다. 이름보다 어떤 위치의 직함에 대한 관심이 매우 강하다. 또 매우 명예와 권세 지향적이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직분의 높낮음 때문에 영성활동에 매우 지장을 줄 때가 많다. 북미문화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직함보다 타고난 이름을 더 사용하고 또 즐겨 부른다. 교회내에서도 이름으로 호칭하지 직분의 직함으로 하지 않는다. 이왕 우리가 이 북미주에 산다면 그 좋은 문화를 배우고 실행 하면 어떨까? 집사, 권사나 장로의 직분과 그에 따른 권한과 의무는 계속 유지 하되 각 직분자들을 호칭할때 성도라고 부르는 호칭 변경을 시도 해 볼만 하다. 예를 들자면 아무게 집사나 장로 보다, 그 성도의 직분에 상관 없이 아무게 성도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성도라는 호칭이 교회의 조직에서 쓰여지는 직분보다 훨씬 좋은것 아니겠는가? 직분의 거룩하고 영적인 심오한 권위를 파괴하자는 뜻이 아니다. 호칭에서 부터 오는 육적인 명예의 충족과 권세의 지향을 꺽자는 의미다.
나가는 말
어느 신학자는 현대 교회가 하나의 놀이터가 된것 같다고 한탄했다. 나도 평신도로서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교회에 출석하다 보면 그 말이 틀린것 같지 않다고 생각 한다. 현대의 교회는 교인들의 만남의 충족, 명예와 권세의 충족, 자존심의 충족, 놀이 문화의 충족을 여러 행사나 프로그램을 통해 채워 주는 경향이 심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특히 교포교회들이 특성상 그렇게 되기가 쉬운것 같다. 나는 이왕 이질적 문화속으로 자발적으로 이민을 왔다면 자체적으로 외로움과 사회 장벽을 당연히 여기고 적어도 교회내에서는 교회가 지향해야하는 진정한 예배와 말씀 그리고 기도로서의 영성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하고 이런 사회적 심리적 외로움과 박탈감은 이런 영성의 회복을 통해 위로 받고 육신의 정욕을 죽이며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개인적 성도로서의 교회가 그래야 하듯 공동체 적인 교회도 성도들의 요구로 인한 육적 충족을 과감히 단절 시키고 진정한 영의 교회로서 최선을 다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닌게 아니라 여러 행사와 프로그램 때문에 교회에 오면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여 전심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마음보다 그 행사와 프로그램에 온 신경을 더 쓰기가 쉽다. 설사 모두가 원하는대로 교회의 웅장함, 화려함, 만남의 충족과 명예의 충족을 채워주지 못해 고생하는 교회가 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이런 영적 회복의 교회로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는 영적 지도자가 그리워 진다. 우리는 지금 뭐가 육적이고 뭐가 영적이란 것을 분별하는 영적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 된다. 즉 영적인 진성성과 분별력이 요구 되는 시대적 사명감이 절실하다. 교인의 숫자와 육적 충족을 우선하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나 끝까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에 이르는 영적회복의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런 영성을 회복한 성도들이 자연히 직장, 사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으며 세상사람들도 인정하는 빛과 소금의 역활의 개인적 교회 (성도)가 되려고 몸부림을 쳐아 되지 않겠는가라고 나 스스로 다시 다짐해 본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름침을 받앗을 뿐이라 (사 2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