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8호

옮겨심은 나무 (미국에서의 새로운 시작 )

10/16/14   최한나

예일 대학교 졸업
콜럼비아 건축대학원 졸업

국민학교때 6.25를 격으신 아버지는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씨레이션 깡통을 주우러 미군이 주둔하던 앞산에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미군들이 철수하며 버리고간 영어 성경을 우연히 줍게 되었고, 평소에도 할아버지가 쓰시던 일본어로된 영어교과서에 호기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그 일로인해 영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간신히 해석 할 수 있었던 구절중 하나가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우는자와 함께 울라' 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미국에 대한 막연한 로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사 십 여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오래전 꿈대로 미국에 이민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드셨다.

반면 알뜰히 집안 살림 늘려가는 일에만 전념해 왔던 엄마는 낯설은 언어와 환경이 내킬리 없었지만, 내 자식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 하나 때문에 망설임 없이 미국행에 따라 나설 수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나도 부모님을 따라 얼떨결에 이민을 오게되었고 우리가 처음 이주한 곳은 이름도 낯설은 아리조나주 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듯 105도를 넘는 더위, 뒷마당 모래밭에 사람처럼 버티고선 선인장, 집주소를 잘못 찾아온듯 거실 한 가운데 떡하니 나타나는 작은 도마뱀들... 몇일 전만해도 책가방, 도시락, 체육복 등등 온갖 짐을 지게처럼 지고 오르 내리던 서울의 학교 길이 그저 꿈속 마냥 멀리 느껴졌다.

한국인이 많지않은 소도시에 살게된 우리도 여느 이민 가정들처럼 언어소통 때문에 울고 웃는 경험을 했다. 이사온 후 첫째주, 가구를 구입해야 했던 우리는 미국가게에 들어가서 말이 통하지 않아 한참을 고생한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몇일 뒤 배달 트럭에서 줄줄이 내려진 것은 엉뚱한 가구들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온 책상 둘은 영어 설명서를 보고 맞추어야 하는 조립식이었다. 엄마랑 둘이 생각지도 못했던 조립 때문에 밤늦게 쩔쩔매던 일이 아직까지 생각난다.

가족중 언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격은 건 당장 학교에 적응 해야하는 나였다. 학교에서 처음 짜준 10학년 1학기 나의 수업 일정은 가장 낮은 수준의 ESL 클래스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영어를 쓰지않아도 되는 음악과 체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머지않아 대학 갈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나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않되겠다는 생각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잘 암송한 후 담당 가이던스 카운셀러를 찾아갔다. '나의 교육 하나만을 바라고 이 머나먼 타국에 이민온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사람 같다. 나에게 더 많은 기회를 달라. 어떻게 해서든지 상황을 극복해 낼것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더듬더듬 되지않는 영어였지만 진심이 전해졌던지, 그후로 카운셀러는 나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자 최대한 노력해주었고 한 학기에도 몇번씩 과목을 바꾸어가며 짧은 기간동안 정규과목과 아널스 과목으로 옮겨 갈 수록 있도록 끊임없이 선처 해주었다.

처음엔 거의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던 터라 수업 종료벨이 울리면 선생님 단상에 찾아가 숙제 내용을 일일이 적어달라 부탁해야 했고 시작벨이 울리기전까지 정신없이 다음 수업실로 달려가곤 했다. 집에 와서는 사전들 들고 밤늦게 공부하는 일이 반복됐다. 학교에서는 가끔 짖궂은 녀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영어를 잘 할 수 없으니 조목조목 따져 답할 수도 없고 곤역스러웠다. 답답한 마음에 부모님이 없는 틈을 타 낡은 카페트 방바닥을 새우등으로 구르며 펑펑 울어보기도 했다. 학교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때는 모래밭으로 연결된 교실 뒷계단에 숨어 앉아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을 몇번씩 불러보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모님의 기도였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초창기부터 기적적인 계기로 구원 얻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셨고, 엄마는 비록 미신을 숭배하는 할머니 밑에서 컷지만 매를 맞아가면서도 시골 교회에 다니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갓난 동생을 등에 업고 다녔던 엄마는 주일날 예배당에 가는 일이 제일 행복했다고 했다. 아기가 울까봐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교회 문간에 붙어서서 드리는 예배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은 엄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고 평생 갖가지 고개를 넘을 때마다 친히 길잡이가 되셨다. 늘상 나에게는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시는 세밀하신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반드시 듣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의 끈질김 저리가라하는 엄마의 기도는 언제나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 결실로 나는 결국 엄마가 이민온 몇달 후부터 작정기도 하셔왔던 바로 예일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대학에 가기까지 나의 믿음은 일차적인 면에 머물렀다. 하나님은 분명 어려운 나를 때마다 도우시는 길잡이. 그러나 그 이상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학 진학 후 더 어려워진 학업을 따라 잡는 동안 노력의 한계를 접하면서 하나님은 나로 더 단단한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셨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을 매일처럼 실감하게 하셨다. 그후 대학원에 갈때는 전공을 180도 바꾸게 되었기 때문에, 또 그 후론 사회생활과 결혼생활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쉴새없이 달려만 왔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뜨거웠다 미지근했다 들숙날숙 할 때가 많았다.

얼마전 여느때처럼 밤늦게 회사에서 돌아와 저녁먹은 접시를 닥으려 흐르는 물에 손을 넣는데, 문득 그날따라 생각지도 않은 성경 구절이 마음에 선명히 떠올랐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 목숨의 '목'자를 떠올리는데 모든 것이 덜컥 멈추는듯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수년간 정신없이 살아온 내 모습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라는 간절한 당부의 말씀과 도대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예기치 않은 그 짧은 순간 확실이 깨닫게 된 것이다.

세상적인 성공과 갖가지 걱정 근심에 노예된 듯 살아갈때가 많은 나를 돌아보면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마치 느혜미아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탄 성문을 답사하며 애통해 했을 그 밤처럼 예수님이 내 삶의 보시면 슬퍼하실까 싶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은 빛나는 졸업장과 직업, 좋은 집과 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골고다로 가신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닮아가는 것, 내가선 자리에 조용히 주님을 초대하며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글을 마치면서 사춘기와 대학으로 넘어가는 중요시기를 이민생활 적응이라는 장애물과 함께 단기간에 소화해 내야 하는 1.5세들의 고초를 생각해 본다. 1세도 2세도 아니라서 조금은 어색한 우리, 일찍도 늦지도 않은 듯한 어정쩡한 나이에 조심스레 새 삶을 시작하는 우리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언제나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주님을 기억하기며 살기를. 그리고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고지에 하나님을 요지부동 모시고 살기를 다짐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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