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사회,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11/17/14
김성덕

드류대학교 신학석사 (S.T.M)
베일러 대학교 목회학 석사 (M.Div)
안동대학교 경영학과 (B.B.A)
아메리칸 드림, 우리 이민사회는 이것을 꿈꾸며 형성되었고 여전히 형성되고 있습니다. 더 좋은 환경으로 보이기도 하고, 더 좋은 일터가 있을 듯하며, 더 좋은 교육이 있어 보이기에 우리는 이곳에 모였습니다. 모두에게 열려진 기회의 땅에서 열심히만 살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여기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몇몇 주위 분들의 이야기와 가끔씩 들려오는 한인사회 소식에서 그저 열심히만 산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라는 그분들의 한탄이 그분들의 삶과 마음속 깊은 곳에 큰 상처가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 가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 발생할 때면, 부푼 꿈을 가지고 계획했던 우리 삶의 궤도에서 우리는 이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가을 미 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는 많은 한인들의 삶의 터전을 휩쓸었고, 그 피해로부터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분들이 상당수입니다. 보험 시장 재무분석 기관인 Reactions이 올 10월 31일 발표한 바에 의하면, 작년 샌디로 인한 피보험재산 (insured property loss) 손실은 최소 400억 달러에서 최대 550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수치화 할 수 있는 이 피보험 재산의 손실액만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입니다. 미 연방 재난청(FEMA,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과 같은 정부 차원에서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단체를 통한 즉각적인 피해 복구 지원이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분들이 물질적, 정신적인 피해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올 가을엔 재정문제로 힘겨워하는 미국 정부의 -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셧다운이 있었는데 미 행정관리 예산국 (The 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은 11월 7일 발표에서 그것으로 인한 경제생산(economic output) 손실액은 20억 달러에서 6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피해는 소비를 위축시켜 직접적으로 식당, 세탁소, 네일아트 등 서비스업에서 종사하는 많은 한인들의 비즈니스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작은 개인이 위기상황을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또는, 그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극복하고자 밤낮 쉬지 않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의 대처능력 범위를 넘어선 -게다가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 같은- 이런 거대한 사건들은 우리의 신체, 심리, 정서의 영역으로 스며들어 이방 땅에서 어느 정도 정착하여 균형된 삶을 갖추어가며 차근히 꿈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에게 상실, 좌절, 피곤을 주는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재앙 이후 찾아오는 전염병처럼 우리의 아내, 남편, 자녀, 친구, 동료, 이웃 간의 관계 속에 들어와 이차적으로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개인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외부 요인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그 피해에서 회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우리 관계 속에 깊게 베어진 아픔,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처음 이주했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 품었던 꿈과 희망은 이제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리 이민사회는 크게 품은 꿈만큼 '성공한 삶'에 대한 기준 그 자체가 어느 곳보다 더 높아 보입니다. 그러한 포부를 가지고 형성된 우리 이민사회 안에서 자신만이 또는 자신의 가족만이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아니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느끼고 드러내지 않으려 할 때도 있습니다. 가까운 이들의 성공스토리를 들어야 할 때면 그들을 축하해주는 기쁜 마음 한편으로 스스로 자신과 비교를 하게 되며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한인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곤 합니다. 주변의 기대는 당연히 우리가 바래왔던 꿈을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 줄 압니다. 좋은 동네에 별장 같은 집을 장만하고, 고급세단을 몰며, 자녀들은 일류대학을 진학하고 전문직에서 종사하는 모습이랄까요. 그렇지 못한 경우 세상이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편견을 가진 듯도 하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듯도 한 느낌이 듭니다. 단지 느낌일 뿐일까요?
저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 즉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후,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알게 되고 그 모습을 감추고 숨어버린 장면과 매우 흡사해 보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가진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불완전한 '앎'을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우리 삶을 honor, 그것이 아니라면 shame 이라는 렌즈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은 어쩌면 사탄이 제안한 그 '앎'을 받아들여 형성, 발전되어 왔고, 점점 더 우리의 삶의 많은 영역 가운데서 그 틀에서의 '성공은 honor, 실패는 shame' 이라는 것을 최고 가치로 여기고 우리 인생을 판단해 오도록 해 왔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가족에 수치를 가져다 준, 아내, 남편, 자녀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이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선 청소년들은 멋진 옷으로 외모를 꾸미지 못하는 경우,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합니다. 좋다고 여겨지는 대학을 나오지 못하는 경우, 또는 좋게 여겨지는 스펙을 쌓지 못하는 경우, 좋다고 여겨지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곳도 있습니다. 우리 이민사회도 세상이 제공하는 honor 와 shame 의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진 못해 보입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창세기 3장 11절)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한 이 음성은, 우리의 '앎'의 잣대로 여김 받는 부끄러움을 질책하시려는 것도 아니며 자괴감에 빠뜨리고자 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탄이 또는 세상이 빚으로 짓눌린 가난한 삶을 단칸방에서 네다섯 식구가 살아가는 초라한 집을, 쉬는 날 없이 일해도 쥐꼬리만한 주급밖에 건질게 없는 단순노동 직업을, 명문대는 상상 할 수도 없는 내 학교성적을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부분이라며 업신여길지라도 우리 또한 부끄럽게 여길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은 우리의 그러한 부분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죽옷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사 우리가 움츠리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을 고되게 하는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세상이 고수하는 성공한 삶, 그리고 실패한 삶이라는 판단은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느라 중요한 진리를 잊고 살아왔대도 태초 전부터 이어온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이 감추고 있는 그 어떤 곳으로 찾아 오셔서 사랑으로 치유해 주시고자 합니다.
우리 이민사회에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수도원까지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고 계시는 그분의 풍성한 사랑입니다. 이 거룩한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치유받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