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전통을 중심으로 살펴본 신약에 나타난 수도원의 흔적
04/22/15
김유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 드루 대학 신약학 박사 (Ph.D)
조이플장로교회 담임목사
1.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세례 요한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태 11:7-9, 눅 7:24-26 참조)
요한은 광야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광야에서 사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숙식을 한 듯하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3장 4절에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 요한은 광야에서 거주하며 광야에서 사역을 하였을까? 다른 곳에는 하나님을 경배할 곳이 없었기에 그렇게 했을까? 예루살렘에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웅장한 헤롯 성전이 있었고 동네마다 회당도 있었는데, 요한은 그런 기존에 하나님께 잘 예배드리고 있는 장소에서 사역을 하지 않고, 왜 애매하게 사람이 거주하기에 아주 척박한 장소인 외딴 광야에서 사역을 하였을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요한 뿐만 아니라 많은 무리들이 광야로 나아갔다고 말씀하신다. 그 무리들은 또 왜 황량한 광야로 떼지어 몰려나갔을까? 예수님은 여기에서 재미있는 수사학적 질문(rhetorischen Fragen)을 던지신다 (Ulrich Luz, 2. Teilband, 173).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는가? 흔들리는 갈대밭은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수많은 갈대가 바람에 물결치는 광경은 장관이다. 그들은 여행하며 구경하러 나갔는가? 물론 아니다. 랍비 전승에 따르면 흔들리는 갈대는 세상 풍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우유부단함을 상징한다 (R. T. France, p.426). 요한은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요한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할 말 다하고 (누가복음 3:7-14), 구부러짐 없이 대쪽같이 곧게 서 있다가 순교까지 한 사람이다 (누가복음 3:19-20, 마가복음 6:14-29).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도 역시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편하게 살기 원한다. 그래서 부드러운 옷, 멋진 옷을 입고 그것으로 사회적인 지위를 뽐내며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광야로 나간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도 그런 무리들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마가복음 1:9) 정치적인 권력을 획득하건, 경제적으로 부자가 되건, 목회에 성공을 거두든, 하여간 세상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광야로 나갔는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그들은 예언자를 만나러 나갔다 (마태 14:5, 21:26). 그리고 그 요한이라는 예언자는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예언자는 없었는가?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왕실에 고용된 예언자들이 있었다 (삼상 10:1, 5-6, 삼하 23:2-3, 왕상 22:22-23, Craig S. Keener, p.337). 물론 왕성했던 예언 운동의 빛이 바랜 지 오래되어 수 백년간 마치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는 것 같기도 했으나, 중간기에도 묵시문학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예언은 계속 되고 있었으며, 바리새파 랍비들의 성서강론, 장로들의 유전, 사두개인 같은 제사장 그룹의 전통과 가르침 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한이라는 예언자의 메시지는 그 당시 기존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랐다. 요한의 메시지는 세속의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기존 세력과 화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태 3:1-12). 즉 새로운 변화를 창출해 내며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준비하는 종류의 메시지였다. 그러한 종류의 메시지는 기존 종교 시스템 안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요한은 광야로 나갔던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며, 자신을 깨뜨리고 철저히 회개하며, 요한은 하나님의 강력하고도 참신한 개입을 기다렸다.
필자는 광야에서 펼친 요한의 사역을 보며 그것이 교회사에서 후대에 발전된 수도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였다 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러한 수도원(광야 체험)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수도원은 기존의 종교 제도나 기관을 대신 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과 교회를 갱신시키는 곳으로 활동한다. 종교개혁은 한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늘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임으로, 그런 연속적인 개혁의 전초기지로서 수도원(광야)은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참신한 개혁의 원동력은 웬만해서는 기존 교회 안으로부터는 생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종 기존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기존 체제를 합리화시키는 목소리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새 출발하려는 수도원(광야)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교회와 자아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성이 배양될 수 있다.
2. 광야로 내몰리신 예수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태복음 4:1-11, 눅 4:1-13 참조)
마가복음 1:12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자마자 즉시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다고 한다 ( ). 왜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내쫓았을까? 그 이유는 세례 받을 적에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17).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예수님에게는 확인되어야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광야로 들어가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경우를 오늘날 교회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우리들도 오늘날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었다 (요한복음 1:12).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평신도이건 목회자이건 모두 기독교 사역에 관여하게 된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기독교 사역을 함에 있어서 분명히 확인되어야 할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경우는 공생애 시작 지점에 마지막 점검을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로 들어갔으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듣는 법을 배웠다. 즉, 자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해야 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제대로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새로운 일들을 하기 전에 이따금 수도원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사려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와의 극심한 영적 전쟁도 치르시며 훈련과 단련을 받으셨다. 이 전쟁은 예수님의 금식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해 그 분의 제자들과 함께 많은 금식을 하지는 않으셨으나 (마가복음 2:18-20), 주님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은 일정한 직업을 내버리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의식주를 맡기는 삶을 사셨다 (마태 6:11, 31-34). 마귀는 이렇게 예수님을 유혹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을 거부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신명기 8:3을 인용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부터 아주 분명해진다. 이 구약의 인용문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에 모든 것을 돌봐주신 공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맞물려있다 (Darrell D. Bock, p.37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신명기 8:2-4)
일단 광야(수도원)로 들어가 금식을 하든지 칩거하며 기도를 드리게 되면 우리는 마귀를 자주 접하게 된다. 사실 사단-마귀는 평상시에도 늘 우리를 유혹하며 넘어뜨리려 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5:8). 그렇지만 광야(수도원)로 들어가면 그런 마귀와 직접적으로 그리고 심각하게 대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직접적인 영적 전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단 승리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먹고 사는 일에 집착하던 인간적인 경향성과 불안하여 불만을 토로하던 심정이 변화되어,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의존하게 된다.
두번째 영적 전쟁은 거대한 성전 위에서 치러졌다.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 그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장소인 성전으로 인도했다. 그 성전은 헤롯왕이 지은 성전으로 참으로 웅장한 곳이다 (Computer simulation, http://www.youtube.com/watch?v=_xgcVmo1aUQ). 이는 총 둘레가 1540 미터에 이르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황소가 끄는 1,000대의 수레, 일만 명의 기술자, 석공과 목수로 훈련된 1,000명의 제사장을 동원하여 수십 년 간 지은 건물이다 (요한복음 2:20). 헤롯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며 고대사회에서는 진정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그 위엄을 자랑하는 명품이다. 성벽을 쌓는데 사용한 돌의 크기는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발견 된 것이 12m x 3m x 4m이며 요세프스에 의하면 20m 정도가 되는 돌도 있었다고 한다. 그 돌 하나의 무게만 해도 5톤이 넘으며 성벽의 두께도 5미터가 넘는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그 장대한 성전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인 솔로몬 행각(Royal Portico)으로 데리고 간다. 그 곳은 나중에 예수님이 거닐던 장소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0:23).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곳은 성전의 남동쪽 모서리인데, 기드론 골짜기 위에 성곽이 세워진 곳으로 그 높이가 무려 450 피트에 이르기에,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한다 (Antiquities 15.11.5.). 헤롯 성전은 그리스-로마 건축 양식을 따라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고린도 양식의 기둥들도 세워졌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솔로몬 행각은 162개의 하얀 대리석 기둥으로 지지되었는데, 각각의 기둥은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되었으며 그 두껍기는 세 사람의 남자가 양팔을 벌리고 둘러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다. 솔로몬 행각의 길이는 184미터나 되었으며, 6,000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런 아름답고도 장대한 성전 위에서 치러진 영적 전쟁의 핵심은 무엇일까? 혹자는 인기를 추구하는 헛된 영광이라는 유혹(die menschlichen Versuchungen des eitlen Ruhms)을 버리는 일이라는 사람도 있고 (Ulrich Luz, 161), 대중 앞에서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술을 부림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Craig S. Keener, 139). 그렇지만 이 영적 전쟁의 핵심은 예수님의 대답으로부터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신 곳이다. 그 곳에서 뛰어내리면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라는 사단의 논리에 대하여 (시편 91편의 인용),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세 번째 시험의 마지막에 결론 내듯이) 오직 그 분만 섬기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나를 섬기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것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인용한 신명기 6:16은, 광야에서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늘 의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하며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기 17:2-3, 7)에 관련된 구절이다 (Craig S. Keener, p.141).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광야에서의 영적 전쟁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 훈련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순종 훈련의 결과로, 수십 년간 수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 지은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도 받아들였으며, 또한 십자가를 지는 그 수치와 고통까지도 감내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누가복음 21:5-6)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태복음 27:40)
3. 결론
위에서 살펴본 대로, 광야(수도원)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려하는 새로운 변화가 창출되는 시발점이었다. 세례요한의 경우 광야는 정치, 종교, 사회에 만연한 불의를 비판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를 촉구한 곳으로, 세속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몸과 마음으로 서서, 물로 씻어 새롭게 되려고 몸부림친 곳이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따라 다가오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였다. 만일 세례 요한이 기존의 종교 구조 속에 속박되어 있었거나 세속에 물들어 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운동을 계승(완성)한 분이다. 물론 예수님은 세례요한과 동일한 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으나, 예수님도 역시 초창기에는 광야(수도원)에서 40일간 혼자 머무셨다. 그 광야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것(seine Erfullung von Gottes Willen)을 결단하고 체험한 곳이다 (Ulrich Luz, 1. Teilband, 167).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에 대한 근본을 가다듬고 목회 사역의 핵심을 분명히 하셨으며, 몸과 마음을 영성 훈련으로 준비 하셨고,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인류 역사에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놓게 되셨다.
예수님은 원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할 메시아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광야에서의 3번의 시험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존하고, 인간적인 인기나 정치력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한 발견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으로부터 왔는데, 이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마귀의 유혹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밝히 드러난다.
이러한 예수님의 광야(수도원)에서의 활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평신도들과 직업적인 목회자들이 예수님이 시발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그 목회 사역의 핵심이 모호해지고, 근본이 흔들리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자아가 너무 비대하게 커지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며,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경향성으로 치닫기도 한다. 이런 여러 유혹을 이기는 비결 중에 하나는 바로 광야학교(수도원)에서 영적 전쟁을 치르며, 오직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만 의존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듣는 영성 훈련을 거치는 일일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