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수도원 활동(5) 이스라엘 영성의 뿌리인 나실인 (민 6: 1-21)
11/19/14
하홍표

구약에 나타나는 수도원 활동은 개인적 수도원 활동과 집단 공동체 수도원 생활로 구분하여 살펴 보았다. 전자의 대표자는 호렙산에서의 엘리야로, 후자는 사무엘의 '라마 나욧'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된 집단적 수도원 활동의 모습은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선지자 생도들의 공동체 수도원 운동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시대적으로 왕정이 시작되기 전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의 왕정이 시작되고 공동체를 형성한 수도원 운동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위기의 순간인 포로시기를 전후해서 레갑 족속(렘35: 6-10)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 운동이었다. 이들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 수도원 공동체 활동이라는 점에서 독특성이 부각 되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평민 집단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을 유지해 나가며 그들이 살았던 시간에 책임을 다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받았었다.
수도원 운동들에 나타나는 두 가지 외형적 모습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 발전을 언급하였지만, 구약에서 수도원 운동의 뿌리에 대한 언급은 지금까지 미루어 두고 있었다. 구약에서 수도원 운동의 뿌리와 원형적인 형태를 언급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구약에서 수도원 운동의 원형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는 순간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원형은 집단적 수도원의 성격과 개인적 수도원 운동의 두 가지 양상으로 꽃을 피어 나갈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이 뿌리는 야곱의 후손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애굽으로부터 탈출한 후 광야 공동체와 더불어 시작된 나실인 제도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 조차도 좀더 상세히 다루어야 할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나실인에 대한 언급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는 생략되고 시간이 지난 민수기에서 언급 되고 있기 때문이다(민 6:1-21). 비록 나실인들의 영성이 이스라엘의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또한 동일한 시기에 제사장들의 영성이 이스라엘의 영성에 미친 영향력도 무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이스라엘 영성의 원형적 뿌리로 간주해야 한다. 그 뿌리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서 광야라는 불모지에서 이스라엘의 영성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뿌리가 든든히 영양분을 공급하며 이스라엘의 영성을 발전시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영성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 나실인 제도와 또 다른 하나는 제사장 제도에 의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두 뿌리에서 공급되는 영양분을 섭취하며 가지들을 키워 삶에 지치고 하나님을 찾기 원하는 백성들의 굶주림과 갈급함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다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장소와 시기로 되돌아 가면 민수기 6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에게 친숙한 제도를 규정하는 장으로 나실인에 대한 언급은 토라 가운데 헌신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 시내산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의 구체적 지침인 율법을 받고, 그곳을 출발하기 직전 나실인이라는 제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전달된다.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레위인을 구별하였다.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와는 달리 기업을 분배 받지 않았고 그 신분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습 되었다. 제사장 제도와는 달리 레위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려는 모든 남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열어 주셨다.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민6: 2) 율법의 규정에 따라 나실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나실인이 되는 과정은 매우 독특하다. 우선 이들은 이스라엘인에 제한되지만, 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원에 의해 인정 되었다. 그러므로 우선 이들은 구약의 제사장과는 구별 되며, 오늘날 평신도와 같은 사람들로, 일정 기간 동안 특별한 헌신을 여호와께 드리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한 남녀는 자신들을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나실인의 서약을 우선적으로 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서약이 가능하며 자신을 드리는 기간도 본인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특별히 나실인의 서약은 제사장과 레위지파가 아닌 12지파에 속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었다는데 매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런 남녀에 제한 하지 않는 나실인의 모습은 바로 이스라엘 영성 형성의 초기에도 발견된다. 출애굽기 38장 8절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과 그 기물들을 준비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그가(브살렐, 출37: 1) 이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비록 출애굽기는 나실인에 대해 침묵하지만 그 모습은 이미 보여지고 있다.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은 누구인가? 민수기에서 언급되는 나실인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아니면 평생 동안) 헌신하며 회막의 일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사회의 남성 중심의 신앙체계에서 여성을 배제하지 않고, 특권계층 만에 제한된 영성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이스라엘 영성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창세기) 남녀의 구분은 하지만 차별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된 것이 바로 나실인 제도이다. 시대가 흐른 후에도 나실인의 모습은 나타난다. 삼손(삿 13: 3-7)과 사무엘(1:9-11)과 같은 사사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나실인이 있었다면, 여성으로서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나실인의 모습은 계속해서 왕정이 시작되기 전 사무엘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역사 한 가운데서 계속해서 발견된다(삼상2: 22).
남녀를 불문하고 나실인의 서약을 한 이들의 외관상 특징들 중 하나는, 자신들이 서약을 하는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였다. 나실인들에게 있어 어떤 종류든지 술과 그런 술을 만들 수 있는 음식물을 삼가는 규정을 정하고 있다. 신전에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술을 금할 수는 있지만, 히브리 제사장들에게(레10: 9) 알려져 있던 것 이외에 술의 위험성을(민6: 3-4) 이들에게 더 경고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술을 금하는 것은 나실인들이 특별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헌신으로 이해된다. 이런 술에 대한 금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들어가서 접하게 될 가나안 문화에 대항하며 유목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 속에서 절제된 나실인의 삶은 항상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실 술의 원료는 과일이나 곡물이 주가 된다면 정착민이 아닌 유랑생활의 이스라엘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시작하게 될 정착생활과 농업을 시작하면서 접하게 될 자연스런 술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이 나실인의 서약 안에 베어 있음을 또한 본다.
이런 나실인의 모습을 볼 때, 시대를 앞서보고 경고할 수 있는 수도원 운동이 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후 교회가 비대해지고 영적으로 나약해질 때 사막에서 일어난 수도원 운동들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 시대를 살았던 영적 지도자가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향해 애통해하며 비록 혼자이지만 광야에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토록 긴 중세의 암흑기를 넘어 종교개혁의 시기에 기독교의 영성이 죽지 않고, 사람들의 발 밑에서 지하로만 흘러 내리던 생수를 품어 낼 수 있지 않았는가?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도원 운동이 지금 당장 효과를 보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서운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수도원 운동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기초를 놓는 일이다. 기초는 건물이 오래 잘 지탱될 수 있는 역할을 다할 뿐이다. 건물의 화려한 외모에 비해 땅 속에서 자신의 외모도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지쳐있고 힘들어 할 때 생수를 품어 낼 수 있는 소망을 품는 운동이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에게 술을 금하는 것이 이 시대에 맞느냐 안 맞느냐의 논쟁거리가 될 수 있지만 성경 본문이 말하는 핵심은 술을 금하는 이유는 가나안 문화의 술과 연결된 향락주의를 멀리할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유랑생활을 마치고 정착생활을 시작할 때 농경문화에서 접하는 풍요의 신들이 전해주는 관습들(풍요를 위해 바알 신전의 성창들과의 만취된 상태에서 성관계)과 가나안 신전들의 여인들의 술과 향락주의는 이스라엘을 점차 병들게 만들었음을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다(삿 2:11-23).
크리스천은 구별된 자들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할 책임을 가지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크리스천들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까이 할 것과 멀리할 것을 구분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죽음을 앞두고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수 24: 15).
거룩함의 갈망과 구별됨이 상실된 이 시대에 자기 인생을 따로 떼어 거룩한 자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할 때 나실인처럼 충성되게 주님을 섬기는 자녀들이 새벽이슬 같이 나오며 그 중에서 사무엘과 같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어떤 시대에도 절제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백성들이 존재했었다. 앞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속되어야 갈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지금 수도원 운동이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두 번째 나실인들의 외관상의 특성은 생명과 생식력의 상징인 두발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기간 동안 그대로 남겨 두어야 했다. 거룩한 삶을 위해 구별된 자로서 나실인이 머리를 기른 이유는 그들 위에 주장하는 자가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민 6:7; 고전 11:10). 나실인이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침이 되었다면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께 권위를 인식하는 표로 삭도를 금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권위가 상실되는 시대인가? 믿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에 대해 불신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크리스천의 입에서 성경의 권위를 상실시키는 해석들을 품어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죄가 관영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한탄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창6: 5-6).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고 말씀의 권위를 세워 나가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제의적 순결을 깨지 않기 위하여 친척일지라도 부정하다 여겨 사체에 접근을 금하는 나실인의 외관상 특징은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바가 많다. 절제와 구별을 그들의 서약으로 삼아 이런 규정들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용 되어지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주인의 목소리에 그렇게 예민하게 행동하는가? 아니 마음으로도 그런 경외심을 갖기나 하는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신이라고 무시되고 아무렇게 자신들이 좋은 대로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 않는가?
이런 나실인의 모습들을 어떻게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매년 교회에서 사순절을 맞아 40일 특별새벽기도회 등으로 일정 기간을 더욱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도록 독려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평신도들에게 절기행사들(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을 통해 세속적인 문화의 상업주의에 빠져 본질을 모르고 행동하는 신앙인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심는 목소리가 수도원을 통해 들려지기를 바란다.
어른에서부터 아이들에까지 매일의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들을 점하고 있는 소셜네트웍과 인터넷을 통한 게임들과 오락 프로그램들로 인해 성경읽기와 깊은 묵상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요즘 지하철의 새로운 문화를 발견한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만 그 일들이 드라마를 보고 게임을 즐기고 채팅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모습이다. 물론 그런 활동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부족하다는 것을 언급할 뿐이다. 이런 일상생활의 모습들을 보면서 구약의 나실인들이 서약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나실인(크리스천)들이 우선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적인 헌신이 더 많이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한편 나실인들이 서약을 하는 동안 부주의에 의한 실수를 하는 것과 맹세 하였지만 자신 스스로 그 서약을 깨뜨리는 경우(민 6:7-12)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한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새롭게 헌신 기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헌신의 기간이 끝나 드리는 희생에 관한 것으로 두발을 베어서 태우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민6: 13-21).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를 하나님 앞에서 잘 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용두사미의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목회자나 성도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는 모습으로(살전2:10) 끝까지 충성된 신앙인의 영성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나실인의 기원은 모세까지 올라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후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의 장소인 사막은 이스라엘의 영성이 태어나는 장소이며 먼 훗날 중세 때 본격적인 수도원 운동의 시작도 사막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도 그 의미를 더해준다. 왜 수도원 운동은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그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였을까? 비록 강수량이 적어 생명이 살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곳은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신앙인의 영성은 지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열악한 사막의 환경이라도 생명을 못살게 하지는 않는다. 아주 적지만 비가 오고 지나가는 구름에 의해 그래도 생명은 유지되고 그 나름대로 생태계는 유지된다. 그리고 간혹 인간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주어질 때 기적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살리시는 곳이 바로 광야였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여러 가지 경제적인, 정신적인 열악한 환경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며 실망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곳에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힘들어 하고 실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살리시고, 가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으로 다가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영성이 자리잡는 그곳은 의지할 어느 누구도 없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그분이 공급하는 바람과 비와 그늘에 의존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친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조언을 듣고 대화를 나누겠는가? 누구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겠는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사막이 이스라엘의 영성과 후에 수도원 운동의 시작이 된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막에서 사는 것과 같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21세기의 수도원 운동의 중심에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일평생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은 오늘날의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사람으로 간주 될 수 있다. 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서원한 나실인은 경우는 평신도 중에서 일정 기간 동안 여러 형태로 주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헌신자들(예를 들어, 단기 선교사들)로 지칭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나실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주님을 따르고 헌신하기로 이미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나실인은 술을 멀리하고, 주검을 멀리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등의 지켜야 할 중요한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정해진 날 동안 자신을 여호와께 거룩한 자로(민6:8) 여긴다는 점이다. 현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이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고 되새겨 보아야 할 점일 것이다. 나실인의 모습은 너무 세속화 되어가는 오늘 날의 신앙생활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을 배울 수 있게 해 준다. 지나친 거룩은 분열을 조장하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은 크리스천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방식이다.
누가 그렇게 살기를 결심하겠는가?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주인 되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일정 기간 동안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행위도 나와야 하겠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위치에서 나실인처럼 살아간다면 얼마나 복된 땅이 되겠는가? 오늘날 평신도들이 이 땅에서 헌신된 거룩한 삶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구별하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물론 나실인들 같게는 살지 않지만 말씀 안에서 경건히 살기를 자원하는 많은 성도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 가운데 평신도들에 의한 자발적인 헌신의 기회가 수도원 운동을 통하여 개발되고 그런 성도들을 많이 일으켜 세우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