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수도원 활동(4) 레갑 족속의 평신도 공동체 수도원 운동
11/03/14
하홍표

구약에서 수도원 활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수도원 활동은 선지자 생도들이 구심점이 되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면, 레갑 족속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성격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 수도원 공동체 활동이라는 점에서 독특성이 부각 된다. 특히 후자 그룹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평민 집단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을 유지해 나가며 그들이 살았던 시간에 책임을 다했다는 점에서 전자그룹과 차별성이 발견된다.
아래에서는 평신도를 주축으로 형성된 공동체 수도원 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레갑 족속들의 삶을 통해 이민자로 살아가는 이곳에서 앞으로 전개될 수도원 운동이 펼쳐 나가야 할 방향과 과제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구약 성경 두 곳에서 레갑 족속에 대해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렘 35:6)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납의 명령을 준수하여"(렘35: 18)라고 언급하고 있다. 6절은 그들의 시조가 레갑인지 아니면 요나답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18절은 좀 더 요나답에게 비중을 두고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볼 때, '레갑 족속'이라는 타이틀은 요나답의 아비인 레갑에서 왔고('아비'가 '조상'을 의미할 때 훨씬 더 오랜 조상으로부터 전래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공동체가 어떤 규례를 만들어 지켜 나가기 시작한 것은 요나답에서 시작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대상 2: 55하반절에 의하면("이는 다 레갑의 집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족속이더라") 레갑 족속이 겐 족속의 혈통임을 말해 주고 있다. 레갑 족속의 혈통이 겐 족속이라면 그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 생활하다 가나안에 함께 들어와(민10: 29-32) 후에 유다 지파의 구성원으로 인정된다 . 따라서 이들 겐 족속은 사막에 거주하던 유목민으로서 모세의 장인이 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속한 동일한 족속임을 나타낸다.
레갑 족속의 활약은 요나답(여호나답)이 북 이스라엘의 10대왕 예후와 함께 모든 바알을 섬기는 자와 바알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부각되기 시작된다(왕하10: 18-28). 레갑 족속과 예후의 군사적 동맹은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로 인하여 야기되었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종교적 타락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지난 호 참조).
시간이 흘러 북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유다 역시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주전 586년) 대략 15년 전,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때(렘35: 1) 다시 한번 더 레갑 족속의 신앙이 돋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유다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범죄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택함을 받은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파기하고 죄 가운데로 더욱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다른 이방신을 좇았고, 배교의 길에 접어들어(렘35: 16) 유다의 멸망은 바로 문 앞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렘35: 17). 이때 하나님은 레갑 족속을 통해 이스라엘을 교훈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들을 성전 한 방에 불러 놓고 '술을 먹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다(렘35: 2-5). 그들은 '거절'로 반응하며, 자신들의 선조 요나답이 자신들에게 명하여 포도주를 금했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렘35: 6). 요나답은 포도주만 마시지 말 것이 아니라 집도 짓지 말고, 파종도 아니하고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평생 장막에 거할 것을 명령하였다(렘35: 7).
레갑 족속이 철저히 유목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의 통치아래 온 백성이 야웨 신앙으로 벗어나 사는 것을 보고, 요나답은 그런 삶에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한 결단과 함께 자신의 후손들에게 그런 명령을 하였던 것이다.
레갑 자손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신앙생활을 위해 불가피한 어려움을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고 지켜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 주며 살 길이 되었다. 그 증거로서 유다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망한 후에 레갑 족속들의 자취는 사라졌지만(아마도 포로로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것 같다), 포로시기가 끝나자 바벨론으로 귀환하여 '벧학게렘' 지방에 거주하게 된다. 그 후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사업에 동참하여 레갑의 아들 말기야를 중심으로 분문(the Dung Gate)을 보수하는 일을 맡아 성벽을 완성하는 사역에 다시 한번 더 그들의 존재가 언급된다(느 3:14).
세상이 다 변질 되어갈 때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믿음의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레갑 족속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레갑 족속과 같은 삶을 사는 믿음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할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유다가 위기를 만났을 때 평신도 공동체로 구성된 수도원 운동의 주축을 이룬 이들의 삶의 모습은 21세기의 이민사회에서 수도원 운동이 펼쳐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첫째, 오늘날 수도원 운동의 중심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인 태도가 자리잡아야 한다. 레갑 족속들이 술을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파종도 않고, 포도원을 가지지 않으며, 평생을 장막에 거하는 삶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한 생존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그분의 자리에 올려 드리려는 최선의 신앙생활이 그들 삶 가운데 있었음을 보게 된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 요나답이 명한 말을 순종하고(렘35: 8) 명한대로 준행하였지만(렘35: 10),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더 깊게 베어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괴리가 생기는 부분이다. 이 갭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우리 스스로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지 않는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자 성직허용에 대한 문제로 교계가 들썩이고 있다. 사실 레갑 족속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명령한 것조차도 지켜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 조차 눈치 보며 시간이 해결해줄 것을 기대하며 결단력 있게 행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현실에 상주하고 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태도는 행위가 따르는 신앙까지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죽은 믿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행함이 따라야 한다(약2: 7).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미주 땅에서의 한인 수도원 운동은 잘못된 신앙관을 바로 고치고, 바르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열정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수도원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철저히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하려는 삶의 태도를 이민자의 수도원 운동에서 배양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들은 포도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계속되는 그 즐거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중독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하나님 그분으로 인해 즐거움을 갖지 못할 때 인간은 도덕적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 도덕적 타락을 유인하는 근원을 차단하며 하나님을 따르려는 그들의 결단력이 우리 신앙생활을 이끌도록 수도원 운동이 그런 점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삶에서 나타나는 사치와 부는 인간을 탐욕으로 몰고 가고 결국 서로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한 격렬한 경제적, 나아가서 군사적 전투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쌓아두는 삶이 아니라 오늘 주시는 양식에 만족하며 사는 나그네의 삶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원적인 평화를 추구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처방책을 제시하지만, 근원적인 예방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 출발함을 레갑 족속은 보여주고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용한 양식으로 살아간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집이나 포도원이나 밭을 소유하지 않은 것은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고, 잘 못 살아서도 더욱 아니다. 그들의 심중에는 세상이 탐하는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때 레갑 족속은 고대사회에서 부의 상징이 될 수 있는 포도원을 두지 않고, 부귀 영화에 대한 열정을 접어 두며 오직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둔 순례자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수고하는 것이 무엇인가? 남들보다 더 가지는 소유욕과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차지하는 명예를 위해 온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레갑 족속은 삶의 에너지를 그곳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에 재물을 준비하는 곳으로 더 나아가고 있다.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주님의 관심에 마음을 두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정결한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원 운동에서 생겨나야 할 것이다.
하나님 한 분에 만족해하며 소유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집을 짓지 않고, 파종도 않고, 포도원을 재배치 않고, 평생 장막에 거하는 자로 살아갔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소유에 매여 하나님의 사역에 투자하지 못하게 만드는 욕심에 자신들이 마비되어 살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소유에 대한 욕심은 사치와 무절제를 넘어 내 이웃까지 해를 끼치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해 하는 삶을 수도원 운동의 방향으로 제시할 때, 이민자들은 장막을 치는 삶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찾고, 겉치레 없이 검소하게 살며, 우리를 두르고 있는 치장을 벗겨내 진정한 '나'를 찾고 겸손의 자리에 우리를 서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셋째, 이민자의 땅에서 일어날 수도원 운동은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레갑 족속이 보여 주었던 삶의 방식들은 현대 사회의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영역에서 도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 한 예로, 레갑인들은 선지자 예레미야로부터 초대를 받는다(렘35: 2-5). 성전의 한 방에서 포도주를 마시라는 선지자의 청을 거절한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선지자 앞에서 그런 거절에 대해 미안해 하거나 자질구레한 변명을 나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바가 크지 않는가?
우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신감을 가지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민교회의 현실은 그러한가? 성도들의 가게나 사업체에서 탈세와 각종 혜택을 정부로 부터 타내기 위해 거짓을 일삼는 당당하지 못하고 구린내 나는 성도들의 삶에 세상 사람들의 발걸음이 들어 오겠는가? 그리고 앉아있던 사람들조차도 머물기를 거절하지 않겠는가? 거룩은 하나님께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거룩하시기에 이 땅에서의 우리 삶 조차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이다. 점점 교회가, 성도가 세속화 될 때 우리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우리 스스로 무시해 버리는 길로 들어선다. 이민자의 땅에서 수도원 운동이 다시 흥왕하게 될 때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기복적인 한국인들의 잘못된 신앙태도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간다면 결국 시험에 승리하는 것뿐임을 이들에게서 배운다. 레갑 족속은 복을 달라고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을 이기기 위한 열심에 그들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속화 되기 쉬운 삶을 거룩으로 성화시키는 최선의 노력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 결과 하늘로부터 주어진 복은 실로 놀라운 복이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19)는 약속을 받게 된다. 사실 레갑 족속은 선택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직무를 성전에서 감당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그들을 불러주시겠다는 영원한 약속을 받아 내었다.
"내 앞에 설"( ) 사람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지만 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자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레갑인들로서는 큰 영광이 아닌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시대를 거슬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자신들이 사는 시간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당당한 모습에서 시험을 이기며 받아내는 축복의 삶, 이것이 기복적인 신앙의 태도를 가진 한인교인들에 대한 처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레갑인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주는 도전으로 비록 그들은 이방인의 뿌리를 가진 자였지만 출애굽의 구원의 기쁨을 누렸다. 부름 받은 민족의 대열에 합류하여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결국 이민사회에서 일어나게 될 수도원 운동의 목적은 세상사람들, 죽어 있는 자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야 할 곳과 가지 않은 곳에 대한 열정을 가질 때 요즘 성도들의 수평이동으로 성장하는 교회 현실을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입을 열지 못하는 나약한 크리스천이라는 오명을 벗어 버릴 수 있는 도전정신을 21세기의 수도원 운동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크리스천 정신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레갑 족속이 술을 마시지 않는 다는 것에 놀라는 점도 있지만 사실은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전통을 250년 이상이나 지켜 나올 수 있는 저력인 것이다.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태어나는 신세대들의 급진적인 사고에 밀려 너무 고리타분하다는 개혁의 목소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 어떤 것이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도전해 오더라도 하나님 그분이 영광을 받는 길이라면 포기하지 않으려는 결단과 신앙관이 그들을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을 것이다.
21세기의 문제는 더 좋은 것을 위해 좋지 못한 것을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결단에는 선택이 필요하다. 선택은 항상 거절을 동반한다. 수도원 운동이 선택해야 할 것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이어야 하며, 거절해야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세상이 만들어 내어 결국 썩어질-잡다한 것들이다.
우리는 21세기에 가치관과 도덕 그리고 윤리들이 도전 받는 미국땅에 살고 있다. 레갑 족속들이 보여준 흔들리지 않는 절대진리를 향한 확신을 가르치는 일이 수도원 운동의 깊은 영성에서 흘러 나와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아는 것으로만 끝나 버리는 우리의 약골체질의 신앙생활을 행동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저력을 키우는 일에 수도원 운동이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글을 맺으며, 레갑 족속의 수도원 공동체 운동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특징은 평신도 중심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점과 또 다른 한 가지는 이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아니라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레갑인들은 혼란한 시대에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하나님 이외에 주는 모든 기쁨을 거절하며 살았다. 그리고 철저히 나그네 정신으로 무장된 신앙인으로 하루 하루에 충실하며, 먹고 입고 살 곳이 있은 즉, 가진 것을 누리며, 가진 것과 주신 것 이외에 더 잉여의 부산물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검소하며 청결한 삶의 태도를 그들은 보여주었다. 더구나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이 더욱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보다 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한 것처럼(왕하 10:15) 수도원 운동이 이 시대에 각 이민자의 공동체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이민자의 수도원 운동은 참가하는 자들로 하여금 강요가 아닌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결심을 하고 그 선택의 기쁨을 삶에서 직접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물질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도 어느 누구보다 마음에 부유함을 누릴 수 있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두뇌들의 모임에서 만들어진 공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진리 되시고 능력 되시기에 '이 일이 가능합니다'라는 고백이 미주 땅에서 흘러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보다 앞선 수도원 운동의 선구자들을 보라. 그들이 썩어질 것을 선택한 자들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아갔지만 그들의 손에는 영생을 쥐고 있었고, 하루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졌을 때, 사막에서도 족한 줄 알고 하나님만 높이며 자족하며 살아간 자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고, 작은 공간을 소유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부유했고 당당하게 주를 위한 삶을 살아드렸다. 부끄럽지 않는 크리스천의 삶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이곳 미주 땅에서 수도원 운동을 통해 일어나기를 꿈꾸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