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에 관한 한 작은 제안
11/10/14
김재남

서울장신대기독교영성연구소장
서울대, 문학박사, 장신대신대원,
장신대목회전문대학원 졸업
기독교텔레비전방송(CTS) 밀레니엄특강강사
광나루문인회장, 세종대교수, 장신대외래교수,
숭실대외래교수 역임
최근저서 : 오늘을 사는 지혜와 사랑(신망애출판사)
1. 들어가면서
인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 중에 하나가 말, 즉 언어일 것이다. 천지창조를 말씀으로 이루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에 아담에게 주신 사역 중 하나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게 하신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만드신 분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를 보시려고 그 피조물들을 이끌어 왔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당신이 마땅히 하실 일을 위탁하신 면도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만들어 두신 피조물들에게 대해 아담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으며, 그가 본 바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도 이런 관점에 서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다. 즉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피조물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같이 우리도 성령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보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에, 성경 본문 한 절 한 절만이 아니라, 한 단어 한 단어까지도 대단히 귀한 시각으로 접근하여, 그 의미들을 찾아내어 값진 의미망, 거룩한 의미망을 구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측면에서 '일점일획'(마5:18)이라는 표현을 하고 계심을 볼 수가 있고, 사도 베드로도 성경을 가볍게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0-21)고 일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서의 ‘말씀 묵상에 관한 한 작은 제안’이라는 제하로 말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실례들을 열거해 보고자 한다.
2. 주저앉아 있음, 묵상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해서 '묵상'이란 말씀을 많이 들려주고 있다. 그 실례로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시편 1편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2)라고 소개하고 있다. 묵상의 소중함을 영적으로 풀어 주는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되새김질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정결한 짐승'에 대한 레위기 말씀은 되새김질하는 짐승으로 국한시키고 있는 바, 그 대표적 실례로 소를 들고 있다. 초식 동물인 소의 식성을 살펴 보면 처음에는 먹기에 단단한 식물도 여러 번의 되새김질을 통해서 단단하고 거친 풀을 유익한 살코기, 유익한 뼈, 유익한 가죽, 유익한 우유로 만들어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묵상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귀한 영적 가르침이 있다.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떻게 보면, 묵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묵상을 통해서 양들이 공급받아야 할 온갖 종류의 좋은 것들, 믿음에 큰 힘이 되는 것들이 마련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들의 목소리가 기름지고 그 털들이 윤기가 나는 것이고 그 입에서 은혜롭다는 말이 고백되어지게 된다.
문제는 묵상에는 주저앉음의 시간, 오랫동안 말씀을 바라보는 시간들이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일각에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비판적인 말들을 쏟아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왜 목회자들의 서적 가운데는 승려 법정과 같은 영향력 있는 글들을 쏟아내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불만의 소리가 그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목회자들이 너무나 바쁘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좋은 글, 깊이 있는 글이 나오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의 삶은 그런 점에서 목회자보다 '주저앉아 있음'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넉넉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주저앉아 있음'의 시간, 즉 묵상의 시간에 등비례하여 사고와 생각의 깊은 곳에서 정말 영혼이 들어야 할 소리들을 가장 간결한 경제적 언어들로, 그것이 시가 되었던, 아니면 에세이가 되었던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있는 글들이 길러 올려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 중에 만나는 기쁨을 빗대어 말을 한다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일 것이다. 말씀을 묵상해서 만나는 기쁨, 그 기쁨으로 목회자의 심령이 먼저 적신 바 되어야 하며, 그 적신 바 심정으로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될 때에, 온 청중들은 모두 그 은혜의 단비로 생수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말씀 묵상의 한 작은 시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표음문자이며, 다른 하나는 표의문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아무리 표음문자라고 하더라도 그 근원들은 모두 상형에서 시작이 되어 있기에 그 원초적인 의미망을 얻기 위해서 상형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살피면, 많은 것들을 얻어 내 올 수가 있다는 점에 본고의 착안점이 있음을 밝혀둔다.
예를 들어서 보면, 상형으로서의 표의문자의 대표적인 것이 중국 한자이다. 우리 한글도 표음문자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창제의 과정에서 살피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틀이 '상형과 가획의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ㄱ'은 목구멍소리로 목젖의 모양을 본 뜬 것으로 우리가 '억' 하고 발음을 낼 때에 목젖이 눌리는 'ㄱ'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되며, 'ㅁ'은 입술 모양을 본 떠 만든 것인데, 이것에 '가획의 원리'가 적용되어 'ㅋ' 그리고 'ㅂ', 'ㅍ' 등으로 분화 발전하게 된다. 아무튼 이들 모양은 모두 입술과 관련된 발음기관 상형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먹다'의 '먹'을 보면 '음식이 입술을 통해서 먼저 들어가서 목젖으로 흘러가는 것' 이것이 먹는다는 의미임을 살펴볼 수 있다. 'ㅅ'같은 경우도 '치아' 모양의 상형인데, 거기에 가획의 원리가 적용되어 'ㅈ', 'ㅊ' 그리고 'ㅆ' 등으로 분화 발전된다. '씹다'라는 단어를 보면, 이빨과 입 모양이 얼마나 다양하게 동원되는가를 그 상형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게 해준다.
이런 관점을 구약 성경 히브리어를 살피면, 훨씬 말씀이 지니는 강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이 있다고 하겠다. 마치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찾아내듯이, 귀중한 의미들을 찾아 낼 수가 있다고 하겠다. 히브리어 역시 서양에서는 표음문자로 분류하여 보고 있지만, 그 말의 시작을 살펴보면, 한글처럼 그 근원은 상형에 근거함을 알 수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한문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어의 상형에 주목하지 못하고 말지만, 우리는 한자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상형'에 대한 직관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히브리어의 첫 글자는 '황소'라는 의미를 지닌 알렙( )이며, 으뜸이라는 숫자 1을 말하기도 하며, 소는 제물로서도 으뜸이 된다. 두 번째 글자는 '집'이란 뜻의 벧( )인데, 이 두 글자를 합치면, '아브( )'가 되는데, 그 의미는 '아버지는 집에서 으뜸'이란 뜻이 된다. 막연한 으뜸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일, 즉 제사에 으뜸이라는 말이니까, 가정의 제사장이란 말이 된다. 아버지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반드시 가정에서의 가장인 그 아비, 제사장적 의미를 지닌 가장, '아브( )'가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맡기다'는 '갈랄( )'이라고 한다. 낙타(( ), 그리고 말뚝( ) 이란 두 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이 '맡기다'는 의미일까? 낙타가 그 주인과 함께 먼 길을 가다가 오아시스에 이르게 될 때에, 주인이 이 말뚝에 매든지, 저 말뚝에 매든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뜨거운 사막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고삐를 쥔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오아시스에 이르러 이 말뚝이 아니면 저 말뚝 어디에 매더라도 개의치 않을 만큼 주인을 신뢰하는 믿음을 그림글자로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시편에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37:5)라는 말씀 앞에서, 낙타가 그 뜨거운 사막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듯이 나도 주님을 그렇게 믿고 따르고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내가 받은 은혜를 성도들에게 던질 때에, 회중 역시 아주 쉽게 그 의미망 안으로 들어와 있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어보면, 히브리어에서 마음과 심장, 심장과 마음을 같은 단어, 라브( ) 혹은 레바브( )를 사용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춘추'라고 할 때에 '봄가을'의 의미도 있지만, '연세'의 의미로도 쓰이듯 이중적 의미를 지는 곳과도 같다. 마음과 심장을 동시에 나타내는 ' '(라브)는 말뚝( )과 집( )으로 구성되어 있다. 텐트가 텐트 구실을 하려면, 텐트를 지탱해 주는 말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말뚝이 부실하면 아무리 좋은 텐트라도 텐트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져 내리게 된다. 이렇듯 텐트에 비해서 작은 말뚝이지만, 그 작은 말뚝이 텐트로 텐트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의 심장은 작지만, 이것이 잘못되면 육신의 장막이 쉽게 무너지게 되며, 보이지 않는 마음이지만, 그 마음에 병이 생기면 인격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점을 착안하여 묵상하면서 받은 바 은혜를 가지고 강단에 서면, 말씀이 지니는 들려주심의 보다 더 가까운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 상형을 통한 묵상 방법은 언어적 접근 방법의 전환과 새 의미망의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청중들에게 오래 각인되는 인상들을 심어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4. 나가는 말
본고는 어디까지나 '말씀 묵상에 관한 한 작은 시도'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한 작은 시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서서 묵상함에 더 많은 시간들이 투자되어 말씀의 기이한 법을 보는 기쁨이 더해지길 기대해 본다.
한국 교회 강단의 메마름에 대해서 특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말씀이 메마르기 때문에 강단이 메마르고, 강단이 메마르기 때문에 한국 교회 전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엔터테인먼트로 물든 한국교회' '마켓팅으로 물든 한국 교회' '금권과 명예욕으로 병든 한국 교회' 라는 비판 앞에서 그 오명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연약한 무릎들을 세울 힘도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할 때에, 문제의 심각성은 크다.
말씀이 주는 거룩함, 그 거룩함에 참여하게 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들이 있지 않는가! 시편 기자가 외치기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라고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오직 말씀으로' 성경 한 권이면 흡족해 하는 건강한 강단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스만 터어키 제국이 그리스를 점령해서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을 이슬람화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동네의 두 소년이 사이좋게 놀다가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화가 난 이슬람교 소년이 정교회 소년에게 "넌 지금 알라 신의 이름을 모독했다."고 거짓 고발을 하면서 그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서 고소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잡혀간 정교회 소년이 "나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고 진실을 말해도, 이슬람 재판관은 정교회 소년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한번만 부인하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알라의 이름을 모독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는 정교회 신자이기에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자, 화가 난 재판관은 이 소년을 묶어 매질을 하게 했다. 그럼에도 소년이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재판관은 묶인 소년의 혀의 끝을 자르게 했는데, 그 소년은 자신의 입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그 피를 손으로 찍어서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듯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는 말씀에서 볼 때에, 너무 청중의 입에 맞는 단요리만을 매주 만들어 먹이려는 설교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말씀이기보다는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얕은 수작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하겠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진정성을 가진 설교가 되려면, 설교자의 설교 언어들은 '보혈의 피에 적신 바 된 언어'들이 설교문과 설교언어들의 향도로 세워져 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보혈의 강을 지나, 말씀이 말씀하시는 바, 거기에 우리를 기다리면서 주시는 주님의 기쁨, 말씀의 기쁨을 얻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는 기쁨이 있는, 말씀 묵상에 더 많은 시간들을 할애하는 노력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