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자기감과 목회상담
01/18/15
장정은

지난 박사과정 동안 목회상담을 공부하고 정신분석 훈련을 해오던 저의 머리에 계속 떠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대자기감'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경험하고 느끼는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생각과 느낌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머리에 이것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저의 세 가지 다른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그것은 뉴욕 할렘의 소외된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제 정신분석 훈련 경험이었습니다. 미국 공립학교에 부설된 놀이치료실에서 저는 지난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어린이들과 그 부모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4년이란 시간은 어린이 상담, 그리고 놀이치료에 나타난 어린이 심리의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주제를 발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것은 놀이치료를 통한 아동 상담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힘을 갖고 있으며, 특별한 존재인지를 일관되게 제게 증명해 보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힘을 갖고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아동 상담가는 상대적으로 그들이 창조한 놀이에서 열등해야 하고, 공격받아야 하고, 심지어 불태워져야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놀이치료에서 전쟁은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이 전쟁에서 어린이 환자는 자신을 좋은 팀의 보스가 되게 하고 상담가는 나쁜 팀의 보스가 되게 합니다. 이 전쟁은 어린이의 시나리오에 맞춰 결국 좋은 팀의 화려한 승리로 끝이 나고 나쁜 팀은 처절한 패배와 함께 일종의 처형식이 치뤄지게 됩니다. 어떤 어린이는 학교 놀이에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과제를 제공하는 교사가 되고 상담가는 그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불쌍한 학생이 됩니다. 대결 경기나 게임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데, 역시 어린이들은 자신이 만든 규칙에 의해 놀랍고도 화려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런 놀이 현실의 배경에는 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반대의 슬픈 현실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힘의 불균형을 상담관계에서 역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 학위논문의 연구대상이었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종교경험입니다. 1903년부터 한국에는 대부흥운동이 마치 유행처럼 전국으로 퍼져갔습니다. 이 대부흥운동의 중심에는 회개경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흥운동을 통해 회심을 경험했던 한국사람들은 회중들 앞에서 과도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는 유교의 나라인 조선 시대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회개하기 위해 줄을 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고백한 죄들은 듣기 거북한 내용들도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그것을 듣는데 대단한 인내가 필요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혐오와 살해의욕, 강도와 절도, 그리고 폭행에 대한 죄의 고백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자신의 자녀와 친구를 살해했다는 믿기 어려운 죄들까지 당시 한국사람들은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당시 독특한 심리적 역동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잃고 가난하게 살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떤 측면에서는 더 위대하고 크고 싶은 욕망이 잠재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죄에 대한 과도한 고백은 용서받을 수 없는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더 큰 은혜와 더 큰 사랑과 용서를 받게 된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더 큰 죄를 지어 이를 고백하는 사람이 더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물론 일반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신문기사를 통해 접하게 된 한국 교회와 사회는 더 거대한 힘을 소유하려고 경쟁하는 측면이 강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힘에 대한 과도한 경쟁은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억압과 학대의 사회 구조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겨울 한 구청장이 자신의 차를 안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초소 직원을 추운 날씨에 초소에 있게 하여 동사시킨 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 직원이 주민들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자살한 예에서도 이런 억압과 학대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6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것이 크게 틀린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거리와 건물은 크게 변화된 것이 없었는데, 유독 궁전처럼 크고 화려하게 지은 건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교회였습니다. 교회자체만 보면 거대하고 화려한 모습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변의 오래된 건물과 비교하면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듯 한국 교회와 사회는 더 큰 것, 더 화려하고 거대한 무엇을 추구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다른 경험들은 바로 '과대자기감'이라는 단어에 저를 집중하게 했습니다. 더불어 자기심리학을 시작시킨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즈 코헛이 이야기하는 자기감의 결핍과 그에 따른 병리적 과대자기감의 표출이라는 심리적 역동성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코헛은 프로이트와 다른 이유에서 정신병리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프로이트는 자아, 초자아, 이드의 인격 구조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정신병리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육체의 자극이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심리적 대표자로서의 본능은 어떤 방식으로든 만족시켜야 하는 운명에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이 본능을 있는 그대로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저항의 힘이 존재합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이런 충돌과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은 사람입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발생하는 억압과 불안이 정신병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반면 하인즈 코헛은 자기감의 결핍에서 정신병리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코헛은 인격구조의 갈등 이전에 자기감의 결핍이 먼저 선행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갈등과 같은 사건은 자기감의 결핍이 초래한 것이기에 인류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코헛은 이런 자기감의 결핍을 가진 환자들이 분석가에게 특정한 반응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분석가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고, 또한 분석가를 이상화시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코헛은 이를 각각 거울 전이(mirroring transference)와 이상화 전이(idealizing transferenc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세션을 마치고 약속된 두 번째 세션에 찾아온 저의 한 내담자는 아주 큰 지도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큰 지도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17조원에 이르는 자신의 아파트 사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사실 그분이 원했던 것은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인지를 거짓말을 해서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한 내담자는 상담 중에 저의 미래의 교회에 대해 환상을 본 듯 갑자기 이렇게 외쳤습니다. "목사님의 교회가 보입니다. 순복음 교회보다 더 큽니다. 성도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물론 내담자의 이런 반응이 제 기분을 좋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표현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그는 저를 무척 이상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자신에 대한 과대한 느낌을 제게 옮겨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병리적인 과대자기감, 혹은 자기애 장애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애 환자는 정신분석으로 치료가 어렵습니다. 프로이트는 오직 착한 환자로 분류되는 신경증 환자만이 정신분석 치료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 사례에 나오는 많은 환자들이 신경증뿐만 아니라 오늘날 관점에서의 자기애, 경계선 장애를 보이고 있음을 감안할 때, 프로이트 또한 이들 환자들을 만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과 멜라니 클라인의 관점을 자신의 이론에 잘 반영한 컨버그는 이런 과대한 자기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현실인식과 동떨어진 일종의 자기애 환상(illusion of narcissism)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자기애 환상은 정신분석 치료에 대한 저항과 방어로 작용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컨버그는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분석가는 계속적으로 중립성을 지키는 가운데 환자의 자기애 환상에 부응하지 말아야 하며, 해석을 통해 이것이 과거에서 비롯된 것임을 해석해 주어 이를 포기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에 대한 과대한 느낌과 경험으로 인해, 환자는 분석가의 해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반면, 코헛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애 환상은 자기 성장의 필수적 성분이며 창조와 성장의 원동력입니다. 어린 시절 경험하지 못한 이런 자기애 욕구의 만족을 분석관계에서 재연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분석가는 가능한한 이 환자의 과대자기감을 받아주고 이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국엔 내담자의 주체성과 자기 발달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극단적 치료적 방법은 각각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환자의 과대자기감에 대해 분석가가 비판적으로 해석하면, 환자는 분석가를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로 경험합니다. 이는 과대자기감의 심리적 원인이었던 과거 중요한 대상과의 힘의 불균형 사건을 재연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용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의 역할을 분석가가 다시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환자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고 치료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분석관계에서 환자는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에 장애물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환자의 과대자기감에 부응하려는 분석가는 환자의 제한된 관계방식을 지속시켜 주는 희생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분석관계에서 환자가 이전과는 다른 경험, 자신이 수용되고 인정되며,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으로만 끝난다면, 환자의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힘의 불균형 문제, 지배하거나 혹은 지배받으려고 하는 그의 극단적인 관계방식에 직면하게 되는 기회를 잃게 됩니다. 여전히 이런 힘의 불균형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게 됩니다.
과대자기감에 통해 드러나는 지배하려고 하거나 지배받으려 하는 환자의 내적 욕구가 더욱 강화되고 고착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분석가는 과대자기감을 통해 드러나는 환자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패턴이 얼마나 불필요하게 자신을 제한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동시에, 환자에게 상호신뢰와 협력의 새로운 관계 경험이 일관성 있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행해지는 분석가의 해석과 조언은 결코 일방적인 명령과 받아들여야 할 충고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석가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환자의 정신세계에 내면화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느슨해지고 약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치료적 방법의 균형을 과정신학의 개념인 '설득하시는 하나님'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과정신학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성의 기원이며 새로운 가능성들을 인간에게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의 가장 좋은 방향과 길을 안내하시며 지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인간에게 부과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비소유적인 따뜻함으로 인간이 자신이 가신 주체적 자유를 누리도록 격려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뜻과 길에 강압적으로 응답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또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주체적 자유와 그 자유로운 결정을 바탕으로 변하고 발전하고 생성되어 가는 존재로 과정신학은 묘사합니다. 인간이 내린 결정에 따라 생겨나는 변이를 수렴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시며 그것을 또한 인간들에게 제공합니다.
이렇게 두 주체는 구속함이 없이 서로를 자신의 세계에 초대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호 신뢰와 협력의 관계적 모형은 통합된 치유 관계의 목회상담적 모델을 제공합니다. '설득하시는 하나님'은 내담자에게 치유촉진적인 관계를 제공하는 상담자의 역할과 그 관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목회상담 모델로 기능합니다. 다시 말해, '설득하시는 하나님'은 내담자를 제한시키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상호신뢰와 협력의 새로운 관계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목회상담 모델입니다.
이 모델에 기반하여 목회상담가는 내담자를 제한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극단적 관계 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가능성의 제공이 일방적인 힘의 우위관계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문제 방식에 대한 해석과 직면은 상호신뢰와 협력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이뤄집니다. 그런 해석과 직면은 반드시 따라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무엇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상담가의 세계 속으로 내담자를 초청한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상호신뢰와 협력의 새로운 관계 경험은 내담자의 정신세계 속에 내면화된 지배와 피지배의 내적 경험을 완화시키고 느슨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목회상담 모델은 오늘날 힘에 대해 과대하고 원초적인 표현을 보이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치유와 회복에 또한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