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초기 뉴욕과 뉴저지 한인교회의 창립과정과 그 역할
04/02/15
조종무

저서 : 아메리카 대륙의 풍운아들 상, 하권 허드슨강은 흐른다, 뉴욕한인회 50년사 , 미동부 한인 사적지
김창길 목사님의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동안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 읽으며 한국 종교계의 원로 목회자, 그리고 성경적으로 전문 지식을 갖춘 수많은 훌륭한 종교인들이 필자로 참여하시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차원 높은 종교지에 과연 저같이 신앙심 얕고 성경지식도 모자란 사람의 글이 실린다면 더불어 글을 싣는 분들에게 자칫 누가 되지 않을까 몹시 망설여졌습니다. 미적거리던 중 에스더 사모님의 원고 독촉을 받으면서 제게 자신 있는 한 가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믿는다'는 쥐꼬리만 한 믿음 하나 가지고 용기를 내어 이글을 씁니다.
원고의 제목과 내용 또한 자신 없는 터여서 제가 최근 언론 매체를 통해 발표한 뉴욕일원의 지역별로 본 이민사 다큐멘터리 가운데 이민 초기 한인교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설립되었고 어떠한 역할을 했던가를 사실에 입각하여 기술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이민 초기 교회들이 커뮤니티에 쏟았던 관심만큼 요즘도 커뮤니티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제가 느낀 바를 솔직히 말씀드리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뉴욕한인교회
잘 아시다시피 뉴욕 최초의 한인교회로 기록된 뉴욕한인교회는 해방 전 뉴욕에서 유일하게 창설된 감리교 계통의 교회입니다. 1921년 맨해튼 21가의 매디슨 애비뉴 감리교회를 빌려 임종순 목사의 인도로 예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4월 15일 창립예배에는 60여명의 한인 거류민들이 참석했고, 재정은 미국 감리교단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때 한인교회의 명칭을 Korean Church and Institute 라고 지었던 배경에는 성경공부나 이민자를 위한 기독교 교육의 범위를 넘어서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창립 이념을 반영했습니다.
27년 현재의 위치인 맨해튼 663 W. 115가 건물을 감리교단으로부터 저가로 매입한 교회는 해방 전후를 통하여 뉴욕일원 한인들에게 신앙의 안식처 역할을 하면서 종교적인 목적 외에 한인회, 학생회,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 그리고 여러 봉사단체들의 각종 집회와 일시 거소로 사용되어 한인들의 정신적인 센터 역할을 했고, 한때 조국을 잃은 망국민들의 설움을 달래던 유서 깊은 교회입니다. 특히 1960년 뉴욕한인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었고, 1970년대 중반 한인들의 대규모 이민과 더불어 커뮤니티가 형성될 때 뉴욕한인봉사센터와 가정문제연구소가 이곳에서 출범하는 등 한인사회 봉사활동의 근거지 역할도 했습니다.
뉴욕한인중앙교회
다음으로 뉴욕에 생긴 한인교회는 1963년 브루클린에서 개척된 뉴욕한인중앙교회였습니다. 당시는 브루클린교회라고 불리던 이 교회는 구한말 한국에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를 파송했던 교회로 한국과 역사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라파예트 애비뉴 장로교회의 한국어 목회로 백예원 목사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5월 첫 주 교회 내 언더우드 기념관에서 신도 15명으로 예배를 보기 시작한 초기에는 백 목사 외에 김준성 목사, 한진관 전도사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번갈아가며 설교를 하다가 이듬해 10월 신성국 목사가 정식으로 부임하면서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초기의 교인들은 유학생들과 인근 킹스카운티 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던 한인 의사, 간호사 가족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점차로 교인 수가 늘어나 100명에 육박했을 때 미국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립적인 운영을 원했던 교회는 1969년 유엔본부 근처의 카브넌트 교회를 빌어 이전했습니다. 이 교회는 70년대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에 자체성전을 마련하고 오늘날도 존속하고 있습니다.
퀸즈한인교회
1969년 7월28일 한진관 목사에 의해 플러싱에 처음으로 창립된 퀸즈한인교회는 바운 스트릿과 38 애비뉴 코너에 있던 The First Congregational Chuch를 빌려 사용하다가 화재로 인해 루즈벨트 애비뉴로 이전하면서 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부설로 한글학교를 설립해 자녀들이 모국어를 잊지 않도록 정체성 교육을 실시했고, 72년에는 교회 내에 한인봉사센터를 설치했습니다. 이 분야를 전공했던 김태열 사모가 봉사센터를 이끌었고 몇 년 후 한인사회에 이를 돌려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한 70년대 말 플러싱 일대의 거주 한인들의 안전을 위해 교회 소장파 집사들이 주도한 플러싱 자치회가 설립되어 오늘날 퀸즈한인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계속 성장한 퀸즈한인교회는 95년 새 성전을 마련하고 잭슨하이츠 89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브롱스한인교회
퀸즈한인교회 부목사로 있던 유태영 목사가 한진관 목사의 권유에 따라 1971년 3월 브롱스한인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트레몬트 애비뉴에 자리잡았던 초기의 신도들은 노스 센트랄, 몬테피오리, 재코비병원 등 인근 3개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의사 가족들 외에 부근 뉴욕공과대학에 다니던 유학생들로 창립예배에 27명이 참석했습니다. 베드포드 파크 미국교회로 이전하면서 자영업자 등 교인들이 급속도로 늘어나 85년경 주일예배에 389명이 참석한 기록을 유태영 목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70년대 중반 뉴욕일원의 한인 약사들이 뉴욕주 약사시험 공부를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수백 명 단위의 시험 준비생들이 저녁시간과 일요일 교회당을 빌려 강의를 실시한 덕에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태튼 아일랜드한인연합교회
스태튼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한인교회가 창립된 것은 1974년의 일로 남학회 목사가 시무한 한인연합교회였습니다. 이어 76년 뉴욕성결교회가 장석진 목사에 의해 설립되는 등 개신교 교회들이 늘어나 현재는 13교회로 증가했습니다.
롱아일랜드중앙교회
1978년 창립됐던 롱아일랜드중앙교회가 한때 부흥했으나 90년대 중반에 문을 닫았고, 81년 이 교회에서 파생된 롱아일랜드 제일연합감리교회가 86년 뉴욕성서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딕스힐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롱아일랜드에서 가장 크게 부흥한 교회는 아름다운교회입니다. 1991년 림형천 목사 부임과 함께 사이오셋 미국 교회에서 롱아일랜드연합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창립되어 헌팅턴 소재 루터란 교회로 이전했다가 98년 아름다운교회로 개명하고 2003년 현재의 성전으로 입주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웨스트체스터연합교회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한인교회는 1970년대 후반 한기범 목사가 시무한 웨체스터연합교회가 효시가 되었고 이어 웨체스터 중앙교회, 웨체스터 제일교회 등이 비슷한 시기에 진출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5-6개의 한인교회가 있으며 가장 부흥하고 있는 교회는 용커스의 한인동산장로교회 입니다.
뉴저지의 교회들
한편 뉴저지에 처음 생긴 한인교회는 1967년 백예원 목사가 러더포드의 퍼세익 애비뉴에 창립했던 뉴저지한인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존립하지 못하고 대신 이 교회를 돕던 목회자들이 저지시티에 각기 다른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박재영 목사가 71년 뉴저지제일한인교회를 창립한데 이어 장영춘 목사가 이듬해 인근 시카커스에 뉴저지한인장로교회를 창립했습니다.
뉴저지제일한인교회
1971년 4월10일 부활주일 The Old Bergen Church(1 Highland Ave.)에서 박재영 목사에 의해 개척된 제일한인교회는 현존하는 뉴저지 최초의 한인교회입니다. 초창기 교인들의 대부분은 저지시티 메디칼센터에 근무하던 간호원들과 의사 가족들이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76년 자체 성전(2681 Kennedy Blvd.)을 봉헌했고, 이듬해에는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77년 6월 비교인들을 위해 교회가 주관한 저지시티 일원 한인 종합진료 행사에는 130여명의 동포들이 참여해 혜택을 받았습니다. 81년 한글학교를 개설한데 이어 1.5세, 2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이듬해 주최한 '호산나 청소년 전도대회'는 해를 거르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주요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출석교인 350여명으로 저지시티에 현존하는 유일한 한인교회입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뉴저지에서는 두 번째로 1972년 시카커스에서 장영춘 목사에 의해 창립된 뉴저지한인장로교회는 창설 초기 저지시티 거주 한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장 목사가 곧 뉴욕으로 옮겨가고, 7 년 동안 5명의 목회자가 바뀔 정도로 교회가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희철 목사가 담임하던 79년 저지시티 브룸스트릿(155) 소재 미국교회로 이전해 교회 부흥을 꾀했으며, 이듬해 6대 김창길 목사가 부임한 첫 주에는 교인 31명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안정감이 결여되고 신앙의 뿌리가 짧아 스테이션 같았던 교회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를 쇄신하고 한국교회의 전통을 지키기로 작정한 김 목사는 부임 직후 새벽기도회를 시작했고 주말 한글학교도 개설했습니다. 특히 원로 교인들에 관심을 기울인 김 목사는 임마누엘회를 조직해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나이아가라 폭포, 보스턴 등 여행을 통해 경로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인근 호보큰 시의 스티븐스 공대를 방문해 박사학위 과정에 있던 젊은 층 10가정을 전도하는데 성공한 일도 있었습니다.
1980년에 부임해 4년간 저지시티 생활을 하면서 미국교회를 빌려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김 목사는 회고했습니다. 김치 냄새가 나고, 아이들이 뛰고, 미국 성경책이 찢어지는 사고가 날 때마다 경고를 받았고, 3 번 이상 경고를 받으면 쫓겨나는 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서러움을 면하기 위해 버겐카운티 쪽으로 관심을 돌린 나머지 팰리세이즈파크의 갈보리교회를 빌려 84년에 이전했습니다. 이때 5가정이 저지시티에 잔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새 교회로 따라오는 바람에 허허벌판 같던 팰리세이즈파크에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김 목사는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그와 같이 초기 교회의 한인 목사들은 남모르는 노고가 많았습니다. 목회 자체보다도 신도들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잡다한 일들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신도들 아파트 얻는 일부터 자녀들 입학 절차를 도와주고, 체류신분에 문제 있는 신도들을 위해 영주권 걱정까지 해야 했고, 직장 잡아주는 일, 결혼 및 장례 행사 등 초기 이민들에 필요한 각종 민원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초창기 한인교회는 믿고 기댈 곳 없는 이민자들이 동족간 신앙으로 뭉쳐 서로 의지하며 돕는 중심 역할 외에 신도들이 미국 내 생활정보와 비지니스 정보를 교환하는 정보센터의 역할도 톡톡히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자체성전을 마련해 창립하는 교회는 물론 없었습니다. 신도들의 아파트에서 창립하는 교회도 있었고, 모두들 미국교회 한쪽을 빌려 쓰면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였기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하는 서러움 속에 예배를 보다가 어렵게 자체성전을 마련하는 과정들을 겪었습니다. 1964년 부임한 뉴욕한인중앙교회의 신성국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미국교회를 빌려 쓰면서 예를 들어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미국 어린이들 용품을 마구 흩어놓거나, 피아노를 망가뜨리는 경우, 유학생들이 친선 탁구대회를 열 때 구두를 신고 들어와 깨끗한 바닥에 흠집을 낸다거나, 결혼식을 치루고 나면 사무실과 화장실에 담배꽁초가 가득하다거나, 김치 깎뚜기 냄새가 실내에 베어있다거나 하는 세밀한 부분까지 미국 신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남모르는 주의와 노력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목회자나 신도들의 내면적인 고생이 많았던 시기였지만 이민 초기의 교회들은 한인 커뮤니티 형성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인구 밀집에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해방 전 뉴욕한인교회 출석 교인들의 대부분이 맨해튼 115가 교회 근처에 자리잡기 시작해 1930년대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뉴욕 한인들의 거주지역은 맨해튼 어퍼 웨스트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70년대 들어 퀸즈 플러싱이 한인들이 새로운 밀집지역으로 떠오르던 시기에는 이 지역에서 창립된 퀸즈한인교회와 퀸즈장로교회, 플러싱제일교회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뉴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민역사가 가장 긴 저지시티에 70년대 초 창립됐던 뉴저지제일교회와 뉴저지한인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이 인구 밀집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최대 한인 밀집지역으로 꼽히는 팰리세이즈파크에서는 뉴저지한인장로교회가 큰 몫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포트리 인구 밀집에는 뉴저지연합감리교회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해 연말 집계된 미국내 한인교회의 총 수가 3848개로 나타났습니다. 미주 기독교신문인 ‘크리스천 헤랄드’가 집계한 내용을 보면 캘리포니아주가 917개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 뉴욕이 432개, 뉴저지주가 256개로, 뉴욕 뉴저지를 합치면 모두 688개로 7백 개에 육박하는 숫자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 것이 꼭 좋으냐 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동안 한인교계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교회들이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과 맞물려 함께 부흥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제는 한인교회들이 시야를 좀 넓혀 한인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민 초기 교회들이 했던 것처럼 커뮤니티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커뮤니티가 어려움을 겪을 때 함께 나눌 수 있는 구제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울타리를 높게 치고 속세를 외면하는 것 같은 모습보다는 재정적으로 자립한 교회들이 매년 예산의 몇 퍼센트라도 할당하여 지역사회 구제기금이라고 해도 좋고 한인사회 공헌기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기 있는 손길을 내밀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이민초기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성장했던 커뮤니티에 대해 책임을 다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