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매체의 위력
04/02/15
조성자

2002 년 ‘ 시문학 ‘ 에 시 등단
‘ 미주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 시부문 당선
시집 – ‘ 기어가는 것은 담을 넘을 수 있다 ‘ ‘ 새우깡 ‘
수필집 -‘ 바늘의 언어 ‘
뉴저지장로교회 권사
'헝거게임'은 수잔 콜린스의 소설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 소설은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 제이' 3부작의 하나다. 수잔 콜린스는 어느 날 TV를 켰는데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리얼리티 쇼인 것을 보고 착안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폐허가 된 북미대륙에 독재국가 '판엠'이 건설된다. 판엠의 중심부에는 수도 '캐피톨'이 있다. 나라의 모든 부가 이곳 수도에 집중된다. 캐피톨이 아닌 주변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은 상대적으로 아주 열악하다. 그러다보니 지도부는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반란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매년 헝거게임을 한다. 헝거게임은 독재국가 판엠의 존재방식이다. 해마다 12구역에서 각기 두 명씩의 십대 소년 소녀를 추첨으로 뽑은 후, 한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고 죽는 잔인한 유희를 벌인다. 그런데 이모든 과정은 24시간 리얼리티 TV 쇼로 생중계 된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전쟁조차도 생중계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텐을 사살하는 모습을 TV로 보기도 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60년대 한 때 유행했던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그다지 길게 발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학문적 뒷받침이 아니래도 이즘은 모든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다. 성의 정체성도 모호해지고 예술의 장르 구분도 흐릿해져 가고 있다. 국경조차도 사라지는 게 아니냐고 하지 않은가.
SNS의 발달로 아무리 먼 곳에서도 서로의 일상을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이 리얼리티 쇼 같아졌다. 어떤 이는 훼이스 북에 날마다 먹는 음식까지 사진을 올려 공유하고 있어 그의 일상을 빠삭하게 들여다보게 되기도 한다. SNS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게 많은 사람들의 존재 방식이다. 그렇게 표현하는 게 일상성의 수단이기도 하다.
건물 안이나 밖, 어디든 군데군데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이 CCTV는 범인을 잡는데 아주 유용한 장치이기는 하지만 누구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감옥이다. 전화기 하나로 누군가의 신원파악은 물론이거니와 사는 집의 뒷마당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천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어느 분은 수업시간에 말실수를 조금만 해도 즉각적으로 지적이 들어온다고 한다. 금방 인터넷으로 검색해내기 때문인데, 지식 역시 인터넷이라는 창고에 동시에 공유하게 되므로 선생에 대한 적절한 존경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견한 이들은 대부분 예술가들이다. 오래 전 영화 백튜더 퓨쳐에서 2015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15년이 된 지금 영화 속과 똑같지는 않지만 사정이 무척 비슷하다. 엘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이나 '제3의 물결'에서 디지털 혁명, 통신 혁명, 사회 혁명을 일찍이 예견했다.
영상매체의 위력이 요즘처럼 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가 정치, 경제의 패러다임을 선도한다. 요즘 본국에서는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이 대박을 치면 그 파급효과가 상당하다. 정치인들이 줄줄이 관람을 하고 그에 대한 정치적 이념과 대비를 하곤 하는 걸 볼 수 있다. 영화 '명량'이 상영되자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정치인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걸 보게 된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미생'이 방영되고 나서 비정규직 사원들의 생존권이 전면에 대두되고 '미생법'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또한 영화 '국제시장'이 상영되고 있는데 영화가 개봉되고 나자 부산에 있는 국제시장이 관광명소가 되어 찾는 사람들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정책적으로 외쳐대도 효과가 없었는데 영화 한 편으로 효과 백배를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를 한나라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연합의 문재인 의원이 같은 날 관람하고 서로 다른 이념적 소감을 내놓았다 해서 화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사회적으로 그늘진 곳이나 정치가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하는 곳을 영화가 먼저 눈길을 주고 시각화 한 결과다. 긍정적 측면이긴 하지만 예전 같으면 이해되기 쉽지 않은 현상들이다.
예술이 시대를 선도하는 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즈음처럼 발 빠르게 질주하는 초고속의 과학 영역까지도 앞지르는 것이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건 놀랍다.
그런데 점점 두려워진다. 모든 게 영상화되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세상이 좀은 걱정스럽고 무서워진다.
리얼리티 쇼는 그것이 아무리 리얼리티 쇼라고 해도 적잖은 구성이 가미해진다고 한다. 소설 '헝거게임'에서 헝거게임에 참여한 주인공 소녀 캣니스는 죽고 죽이는 숨 막히는 상황에서도 어딘가 숨어 있을 카메라를 의식하고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실제로 리얼리티 쇼에 참가하는 이들이 민낯(맨얼굴)이라고 하지만 비비크림 정도는 바른다는 소리를 흔히 듣기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점점 솔직함에 다가가는 게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일상이 다 리얼리티 쇼 같아지는 세상에서는 도대체 선과 악의 경계도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의 이중성은 본성이어서 누구에게나 약간의 선과 약간의 악이 동시에 상존한다. 그러나 선은 선으로써 악은 악으로써 솔직하면 좋을 터인데 어느 땐가부터 선에도 악에도 리얼리티 쇼의 등장인물들처럼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어 민낯을 가장한 화장을 하게 되고 진실을 가장한 표정을 지어야 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나 남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약아진다. 진실로 선한 사람도 진실로 악한 사람도 따로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어느 환경에 처해지면서, 어느 시대를 살아오면서 부침을 심하게 겪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닳고 닳아져 약아지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점점 약아지다보면 어수룩한 사람이 적어질 것이다. 조금은 누추하고 조금은 어눌하고 조금은 바보 같더라도 허물을 허물로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은 평형을 이루고 부숭부숭해지는 건 아닐까.
리얼리티는 말 그대로 사실적이어야 하는데 카메라라는 렌즈를 통과해야 하므로 적잖이 진실을 비껴가는 것 같다. 가공된 어떤 것에 식상한 이들이 진실을 향한 몸짓으로 생겨난 것이 리얼리티 쇼일 터인데 그 역시 진실과는 무관한 게 아닌가 싶다.
시대적 흐름의 영향을 가장 늦게 받는 곳이 종교 쪽이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종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인터넷으로 내로라하는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를 앉아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비교분석도 쉬워졌다. 귀만 무한대로 커지는 기형적 신앙인이 많아져간다.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분별력을 갖게 하는 건 물론이지만 어설프게 아는 것으로 모든 것에 자기잣대를 들이대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물론 영상매체는 전도와 복음 선포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선교방송의 증가로 세계 오지에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선교지의 사정을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발 빠르게 영상매체를 전도에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는 피해 갈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영상으로 설교를 보고 듣다보면 객석의 한 사람처럼 그야말로 방관적 경청자가 되는 것 같아진다. 아무리 멋진 설교라도, 아주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라도 뭔가 좀 공허진다. 한동안 꽤 지명도가 높은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으로 빠지지 않고 들었다. 말씀의 전개와 예화, 목소리의 톤에 익숙해질 무렵이 되니까 마름질이 잘된 반듯한 피륙을 보는 듯 조금도 틈은 없지만 뭔가 공허해졌다.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해들은 말씀은 전하시는 분의 삶의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거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신앙은 삶의 현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묻어나오는 얼룩 같은 것이, 삶을 부여잡고 뒹군 흔적이 느껴지면 훨씬 좋겠다고 생각되는데 그 느낌의 교감이 없다고 생각된 건 나만의 경험일까.
영상매체의 위력이 무한대로 커지고 있는 시대에 영상매체를 잘 활용하는 일은 지혜로움이 될 것이다. 다만 말씀을 전하거나 선교 혹은 이웃 사랑을 보여주는 영상매체가 공중에 부유하는 많은 볼거리, 들을 거리에 지나지 않고 진짜로 정곡을 가르는 운동력 있는 매체가 되려면 기독교인인 우리들 삶의 현장에 기교가 아닌 솔직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영상을 에두르는 삶의 저변이 리얼리티 쇼가 아닌 리얼리티로써 말이다.
신앙인으로서 시대적 물결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건지 잘은 모르겠다. 다만 속도제한 없이 내달리기만 하는 현기증 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의 깊은 묵상과 기도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 그래서 영적 내공을 쌓아가는 일, 이 오래되고 기본적인 영성훈련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