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8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사실(事實) 과 진실(眞實)사이에서

07/05/15   이광유

감리교신학대학교 (B.Th.)
2007년 드류 신학 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시작하여
현재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종합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전도사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 원으로 생각할 때 그 중심에는 십자가 사건이 놓여 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신에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날이면 예루살렘에 사는 십 만 명이 채 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은 거의
모두 십자가 주면으로 모여 들었다.  한 인간의 죽음은 예루살렘 전체의 구경거리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은 외로우셨다.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모두 군중 속에 숨어 있거나 어리론가 도망쳤다.

     예수님의 시종을 들기 위새 고향을 떠났던 여인들도 먼 발치에 서서 예수님의 마지막을 하염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고 기대했다.  대낮에 목구름이 몰려와 태양을 가렸다.  하지만 그 후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았다.  하늘은 우러러 보며 고함을 지르던 예수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내쉰 후 더는 숨을
들이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친 이, 다윗의 자손, 모세처럼 이스라엘 민좃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로 여겨졌던 예수님은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허무한 삶이었다.  간절히 믿었던 스승의 마지막
은 너무도 처량했다.  예수님은 죽기 전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삼일이 지나면 부활한다고 말했다. 
이를 곧이 들은 제자는 단 함 명도 없었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난 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본 글에서 글쓴이
는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후 삶의 의미를 상실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산산조각난 삶의 의미를 어떻게
다시 재구성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읽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항상성 (恒常性: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이란
심리학적 이론을 사용하겠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누가복음 24:33-43)

     믿음, 맹신, 맹종

     제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보유한 일보인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미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할 것이니 하루속히 자신들을 일본으로 강제소환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생겨났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미국 정부는 감사 요원을 파견해 탄원서가 쓰이게
된 배경을 조사했습니다.  그들이 미국 국적을 포기하기로 한 이유는 대일본제국의 패망 소식을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의 언론이 한 목소리로 이를 알렸지만, 그들은 이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미 해군 함선 한 척에 올라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미 해군 장교는 거듭해서 그들을 설득하려고 더욱 자세한 전쟁 상황을 알려주었지만 단 한 사람도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폭탄 공습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부둣가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이것 역시 미군이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장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배에서 내려 일본인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삶의 환경을 통째로 바꾸었습니다.

     글쓴이가 삼 십 육 년을 사는 동안 한국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명 재림교가 판을 크게 벌인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예수님께서 재림한 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서 모든 속세의 삶을 접고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 한곳에 모여 밤낮으로 노력했습니다.  직장과 가족,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푸른 하늘은 언제나처럼 푸르렀고 아침에 떠오른 태양은 언제나처럼 저녁때가 되자 조심스레 달에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지만 재림교 신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극비에 시간과 장소를 바꾸셨고
새로운 시간과 장소는 조만간에 극소수의 지도자에게 알려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확고한 엉터리 믿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항상성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맹신(盲信) 과 맹종(盲從) 의 '절대' 원인을 불안감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건 항상성(恒常性) 입니다.  항상성이란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을 때가,
그러니까 뭐 특별히 좋은 것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상태가 바로 항상성이 가장 충만한 상태입니다.  신발 속에
든 조그만 돌멩이를 느끼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갑자기 소리를 꽥 질러서 깜짝 놀란 순간, 고뿔이 들어 끝없이 흘러내리는
콧물과 가래 때문에 숨 쉬는 게 짜증 나는 순간은 '몸의 핟상성'이 깨진순간입니다.  우울한때, 화가 날 때, 슬플 때, 겁이 날때,
외오울 때는 '마음의 항상성'이 깨진 순간입니다.  예기치 않은 비난을 받아 얼굴색이 빨갛게 변하고 심장 박동소리가 커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은 '몸의 항상성'과 '마음의 항상성'이 모두 깨진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바로 불안감입니다.  불안감은 몸과 마음의 항상성이 일시적으로 깨졌다는 걸 몸과 마음이 인식했다는 신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안감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불안감을 극복하여 항상성을 되찾는 방법은 세 가지가 전부 입니다. 
생각을 바꾸거나, 행동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꾸면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이유를, 죽은 후 삼 일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지 여섯 시간이 지난후 마지막 숨을 내쉬며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 제가들이 최초로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맞습니다.  불안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로마 병정에게 사로잡힌
순간부터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법정 주변을
배회하던 그를 알아본 한 여인의 질문에 베드로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극찬을 하신 자기
스승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잃었던 항상성을 다시 찾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은 항상성은 행동을 바꿈으로써 유지됩니다.  생각과 행동은 이렇게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활에 대처하는 제자들의 자세

갈리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의 시종을 들기 위해 따라왔던 여인들은 월요일 이른 아침 예수님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잊었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고 흘려 들었기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텅 빈 무덤에는 천사 두 명이 있었습니다.  "왜 살아있는 이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은 여기에 없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라."  그때야 비로소 여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열한 명의 제자가 모여 있는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불안해졌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도 바뀠는데 다시금 항상성이 깨졌습니다.  무덤까지 달려갔습니다..
불안해서 무덤 속으로는 들어 가지 못하고 무덤 밖에서 몸을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감싼 아마포만
바닥에 놓여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의 이야기를 열 한 명의 제자와 함께 들은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그날 아침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떠났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힘이 넘쳐났던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불안만 가득한 예루살렘에 더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환경을 바꿈으로써 두 제자는 잃어버린 항상성을 다시 찾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걸어가면서 뭐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그 물음이 두 제자의
발걸음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순간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기니 한순간에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마음속에 큰 걱정거리가 있으면 누군가를 붙잡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신세 한탄을 쏟아내게 됩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신의 행동에는 한 치 의 잘못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상황을 탓하고, 운명을 저주하고, 마음 속 분노를 다양한 언어기법을
통해 쏟아냅니다.  사실 이러한 정당화와 이성화 작업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진짜 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나오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이성화와 정당화 작업은 물거품으로 변했습니다.  힘겹게 이룬 항상성이 눈 깜작할 사이에 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기도한 후 나누어 주시는 모습을 본 그 두 제자는 어둠 속을 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동료에게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불꽃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여인들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한 집단의 항상성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점점 더 많은 이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 속에 서 계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길 바란다."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해라."

     부활한 예수님 = 새로운 항상성

     모두가 예수 유령 때문에 까무러치게 놀랐습니다.  극심한 불안감은 마음과 정신의 활동을 한순간 마비시켜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왜 이렇게 힘들어하느냐?  왜 마음속에 의심이 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나다.  날 만져보고 깨달아라.  유령은 나처럼
뼈와 피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손과 발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지만, 기쁨과 놀라움 때문에 누구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먹을 게 좀 있느냐?"  제자들은 자신들이 먹다 남은 구운 생선을 예수님께 드렸고 드시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제자들은 생각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생각을 바꾼 후 되찾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번엔 예수님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대해야 했습니다.  먹다 남은 생선을 드림으로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스승의 예언이 사실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와 깨달음을 넘어 한 걸음 더 나가길
바라셨습니다.  "너희는 이 사실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약속한 걸 건네주겠다. 
하지만 하늘의 권능으로 너희가 충만해질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물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는 장소인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죽음이 절망이라면 부활은 희망입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새로운
항상성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은 죽음의 십자가와 부활의 십자가 공존하는 우리의 마음밭을 상징합니다.

     불안감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면 얼마 못 가 불안감은 다시 찾아옵니다.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불안감의 근원인 예루사렘에
머물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부활을 사실(事實)에서 진실(眞實)로 만들어 내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 사실(事實)은 고백을 통해 거짓이 없고 참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事實)을 넘어 진실(眞實)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부활에 대한 우리의 항상성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개신교수도원수도회 Protestant Abbey Mission

234 Tenafly Rd. Englewood NJ 07631
Tel: 201-408-4756, 201-655-0199   Email: estheryskim4@gmail.com
Copyright © Protestant Abbey Mission.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Intonet Solution

VISIT COUNT: 132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