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영성과 통전적 영성 추구의 동반자로서의 예술 / Art as an Integral Component of Holistic Spirituality
05/08/16
김인옥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영성에 대한 관심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깊어지고 다양해지면서 인간성 회복과 사회적 변형 혹은 변혁을 향한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점점 더 방대해지는 과학적 인문학적 지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 심성 깊은 곳의 신성에 대한 갈망과 필요를 무시하는 현상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생산성과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파편화되어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소멸되는 순수함과 진지함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21세기의 다양한 종류의 영성들이 추구하고 공유하는 한 가지는 인간과 인간사이, 인간과 이 세상과의 유대(connectedness)라고 하겠다. 특히 동시대의 기독교 영성가들 중에서 파커 팔머와 마리아 해리스는 유대와 관계에 대하여 매우 통찰력 있는 관찰을 하고 있다.
머리와 가슴의 분리로 우리의 정신은 느낄 줄 모르고 마음은 생각할 줄 모른다. 사실과 느낌을 분리하면서 차가운 사실이 이 세상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무지한 감정은 진실을 개인의 느낌으로 환원시킨다. 이론과 실천을 분리함으로써 이론(지식)은 삶과 아무 관계가 없게 되고 이해가 없는 관습이 되풀이된다(팔머, 1998, 66). 이러한 단절의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인들에게는 오늘날의 지구촌화된 매일의 삶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갈망이 있다. 지적 능력을 향유하는 고학력의 인구가 많아지고, 정보와 지식을 거의 무한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이 세상이 더 좋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현상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이들 사이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고통스럽고 비참한 세상을 초래한다면 인류의 행복과 안녕은 점점 요원해질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과 인간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무시한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생태학적인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기가 다 가기 전에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생태적 현실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지구의 한 편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자연 현상일 뿐이고, 끊임없는 전쟁의 하나일 뿐이며, 인류 역사상 고통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어왔다는 생각에 그칠 뿐이다. 여전히 '그들'이고 나와는 무관한 '타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에 마리아 해리스는 유대관계(connectedness)의 시작은 기도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기도는 깊은 청취(thick listening)이다. 인간과 자연의 고통을 듣는 실천이다. 그리고 잘 듣기 위해 잠시 멈추고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쓴다(Harris, 1996, 8).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 치료와 변화를 가져다 줄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신앙인으로 21세기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양극적인 현상과 사고를 극복할 수 있는 통전적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한 구절로 표현되는 기독교 신앙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믿음은 깊은 하나님과의 사귐과 함께 우리의 이웃과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는 행동이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이 땅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영적인 순례라고 비유한 오래된 기독교 전통과도 그 맥을 같이한다. 내면으로의 여정과 밖을 향한 여정이 번갈아 가면서 우리의 순례 길을 이끌 때 우리가 갈망하는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영성가들이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지적하는 여러 가지 분리 현상 중에서 머리와 가슴의 단절은 통전적 영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극복되어야 할 큰 장애물이다. 기독교전통이 우리에게 물려준 신학적 도그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의 지, 정, 의로 경험된 축적이고 유산이다. 다른 말로 하면, 통전적 영성은 '진리와 선함의 하나님은 또한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 인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름다움이 없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선, 진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진리와 선의 통일성에 있다고 말한다... 진리 속에서 선의 추구가 온전히 만족될 때, 아름다움은 진리이다. 또한 선이 성찰적 지식의 행동으로 완성될 때, 아름다움은 선이다(빌라데서, 2001, 245)."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는 구약과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그리고, 아름다움은 인간의 감각이 연계되는 이미지와 우상숭배를 우려하면서 거리끼는 주제였음에도 어거스틴과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과 그 후의 영성가들에 의하여 면면히 그 맥을 이어왔다. 초대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감각적 지식은 대부분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아름다움의 빛은 이성과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 완전해지고 진정한 지식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고 피조물들은 선이시고 아름다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말했다(씨센, 2004, 1부 서문 par. 13).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던 사도들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이어가던 교부들은 진리와 선의 하나님을 그 빛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에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궁극적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예시하였고, 제한된 인간의 감각으로 그것을 감지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서 그 빛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중세교회에 들어오면서 시, 은유, 풍부한 이미지로 가득한 송영이 교회에 가득 차게 된다. 지면상 중세의 신학자와 영성가들의 수많은 은유와, 풍부한 이미지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표현한 것들을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역사학자 씨센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비전은 종말론적 잔치에서 맛보게 될 복된 광경을 현세에서 조금이나마 경험하려는 열망에서였다고 관찰한다(par. 15). 초대교회의 뒤를 이어 중세에서도 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길이었다. 그들은 감각적인 지식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자, 그리고 창조의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그들의 상상력을 무한히 펼쳐보였다.
종교개혁시대에 들어와서 개혁자들의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톨릭교회의 부패가 종교개혁의 대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개혁자들은 중세의 풍부한 이미지들을 우상숭배를 염려하여 절대적으로 배척하게 되었다. 칼빈과 쯔빙글리는 성서적 관점에서 아이콘(성상聖像)은 용납될 수 없고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을 찾는 것은 매우 어리석으며 우상숭배로 이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정작 루터에게 있어서 성상은 사소한 것이었다.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 루터의 주 관심이었기 때문에 이미지에 대하여 루터는 융통성 있게 접근한다. 루터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신자들이 교회에 성상을 두는 행위를 하나님을 위한 섬김과 선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그는 시각적 이미지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없애야 할 것은 마음의 우상으로서 천국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생긴 배금주의, 권력, 선행 등의 우상을 파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par. 7).
이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의 성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신교의 여러 전통과 교파의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조금이라도 가톨릭적인 것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버리는가 하면, 어떤 교단은 대부분의 가톨릭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신교의 정신을 구현하기도 하였다. 다양성의 공존이 서로 갈등하면서 기독교의 풍성한 전통과 사상을 유산으로 축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영성의 경험을 위한 노력은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여 갔다.
씨센은 종교개혁 후의 계몽주의 사상의 발현과 함께 신중심주의적 세계관과 종교에 관한 비판이 일어나고, 프랑스혁명, 기술발전, 산업화, 그리고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들의 정치적, 철학적 사상들은 교회생활과 신학에 도전을 주었다고 기술한다. 찬란했던 중세의 예술은, 교회의 후원자들이 감소하고 예술가들의 자율성이 증가하면서 비기독교적 주제에 관심을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기독교 주제들이 삼류 예술가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19세기 종교예술은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저급화되었다. 여기에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par. 3).
개신교의 음악은 루터가 음악을 자신의 신학의 한 표현으로 삼으면서 개신교의 중심적 예술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학과 음악이 합쳐져 생생한 송영이 되고 신학적 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루터 이후에 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시와 찬송을 썼다. 믿음과 은혜,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성도의 삶에 대한 신학적 주제들이 음악으로 표현되면서 개신교의 대표적 예술적 표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신학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아름다움, 그리고 예술에 대한 주제, 즉 신학적 미학이 논의되고 발전되었다. 그 중에서도 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신학의 한 분야로서 현대예술을 연구하도록 문을 연 학자로 간주된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궁극적 실재(ultimate being)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궁극적 실재는 모든 것의 기반으로서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이지만, 종교가 하나님의 신성을 말할 수 있으려면 궁극적 실재일 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경험은 서로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표현은 언제나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려고 할 때, 표현하려는 대상과 그 표현된 것 사이에 간격이 있게 마련이므로 모든 표현은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고 말한다(씨센, 5부, 16장, par. 1 & 2).
틸리히는 이러한 통찰로써 인간의 여러 경험과 그에 따른 예술적 표현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분류 중에서 성례전적 유형은 가장 추하고 낮은 것도 거룩함의 질을 표현한다고 한다. 예언자적 항거적 유형은 개인의 의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악마적으로 왜곡된 성례전적 유형을 비판하고 정의가 없는 거룩함을 거부하는 유형이다. 또 한 가지 유형의 예는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에 반대해서 일어난 황홀경적-영적 유형으로 이러한 스타일 안에서의 궁극적 실재는 매우 힘 있게 체험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예술가의 주체적 표현만으로 이해된다면 종교적 황홀경이 광분과 혼동될 위험도 있다(틸리히 1969: par. 11- par. 23에서 재인용).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아름다움의 하나님에 대한 논의들을 매우 간략하게 개괄하면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서로를 완성한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없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그리고 감각적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만나려는 노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아름다움을 통해 중재되어진 헌신은 단지 의무감으로써만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지향을 통한 개인적 만족을 경험하게 하고 이러한 지향 때문에 인간의 헌신은 에로틱한 차원과 자기 초월적 차원을 동시에 가진다. 다른 말로 하면 아름다움은 그 자체를 위해서 사랑스럽게 인식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사랑은 우리 존재의 필요를 또한 만족시킨다(빌라데서, 252).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아름다움의 매개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 혹은 예술이 실제적으로 회중의 영성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인들은 일, 가정, 사회 속에서의 삶을 통해서 형성되며 그에 속한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이 격려 받고 도전받게 된다. 그러한 여정 속에서 우리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영적 여정이 쉽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윌슨 예이츠는 다음과 같이 심도 있게 표현한다. "그것은 존재의 빛과의 교감이 아니라 존재의 깊음과의 교감이고, 존재의 경건이 아닌 비존재의 위협과의 교감이며, 존재와 친근해지기보다는 잠간 엿보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교감이기 때문이다(14)."
이러한 통찰은 삶의 한 가운데서 느끼는 삶의 무의미가 무의미하게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빛뿐만 아니라 어둠까지 포함된다는 뜻이다. 어둠의 심연으로 우리를 데려가거나 그 곳에서 우리를 불러내는 하나님에게 응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의 통찰은 우리가 친숙하게 자주 부르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예술작품이 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깊은 영성으로 우리를 안내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존재감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예술가의 내면의 고단한 작업을 통하여 탄생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내적 정신세계 속에서 고뇌하면서 표현되는 예술의 형태는 실존의 물음에 답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창조하는 예술작품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만큼 다양하다. 그들이 표현하는 주제는 초월성을 이끌어내는가 하면, 많은 경우에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가의 직관과 영감을 따라 창의적인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아름다운대로, 아름답지 않은 대로, 어둡고 고통스러운 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펼쳐 보이며 교감한다.
예술의 여러 가지 역할 중에서 성례전적 역할은 일상영성을 강조하는 통전적 영성에서 특히 중요하다조세계를 펼쳐 보이며 교감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형태 안에 담겨있지만 은혜와 진리를 중재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시키고 지속시키고 확신을 주는 역할을 한다. 심지어 감상자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신발을 벗게 되는 경험을 화랑에서 하게 될지도 모른다(예이츠, 2012, 13). 신앙의 여정은 일상의 삶 속에서 초월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성례전적으로 다가와 초월의 임재를 선물로 가져다주고 하나님의 자비를 일깨운다.
그것[영성]은 갈망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영성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이 좀 더 많은 의미를 찾고, 느끼고, 좀 더 느끼고 싶어 하고, 더 깊이 연결되고 싶고, 삶을 더 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듣는다. 우리 삶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안다. 자연 속에서 예술을 통하여 슬픔을 겪으면서 그들의 갈망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은 좀 더 깊은 실존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지구를 반 바퀴 돌아서라도... 어디든지 가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갈망을 채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려는 의지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한 가지는 그 사실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이다(테일러, 2009, 서문 par. 3-par. 6).
지금 내가 서 있는 발밑을 보면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일깨움은 초대교회 영성가들이 갈망했던 하나님의 비전을 반향한다. 초대교회 쿠사의 니콜라스의 지혜를 빌린다면, 우리의 상상력이 맛보고, 탐색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여서 창조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살짝 엿보도록 하는 것이다(씨센, 1부 서문, par. 15). 그들이 말하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란 상상하려는 의지로 우리를 복종시키려는 마음일 것이다.
통전적 영성은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우리에게 어디를 보아야할지를 가리킨다. 예술은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신자들의 일상을 재료로 하여 작품이 되는 공간을 펼쳐 보인다. 예술의 영성이 역사적으로 면면히 그 자리를 보존하여온 이유는 첨단과학 기술과 인간성의 급속한 폐멸현상 속에서 진리의 실존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말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례의 여정에서 예술과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할 때, 통전적 일상이 일상의 영성이며 일상의 영성이 통전적 영성이 되는 영성의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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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er, Parker J.:Exploring the Inner Landscape of a Teacher’s Life. (1998). San Francisco: Jossey-Bass Publishers
Taylor, B. B. (2009). An Alter in the World: A Geography of Faith [Kindle DX version]. Retrieved from Amazon.com
Thiessen, G. E. (2005). Theological Aesthetics: A Reader [Kindle DX version]. Retrieved from Amazon.com
Viladsau, R. (2001). 신학적 미학: 상상력, 아름다움, 그리고 예술 속의 하나님 (원저 1999 출판). 서울: 한국 신학 연구소
Yate, W. (2012). Spirituality and the arts: a personal exploration of the importance of art on the spiritual journey. Arts, 24(1), 1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