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6호

개인과공동체를 향한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07/25/14   강석제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B.E.)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M. Div)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Th. M. 조직신학 전공 )
Regis College, University of Toronto(STM 영성신학 전공 )
오타와 한인교회 담임목사

참된 기독교 영성은 개인과 교회로 하여금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거룩한 체험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살도록 돕습니다 . 이점에 있어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과 같이 참된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일상 세계를 신비하고 초월적인 경험보다 열등한 세계로 여기지 않습니다 . 기독교 영성은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하나미의 뜻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봅니다 . 따라서 참된 기독교 영성은 개인의 체험을 중요시하지만 개인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며 ,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묵상의 시간을 가지지만 고립주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 Simon Chan 은 그의 책 “ 영성신학 ” 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 영성의 통찰력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 기독교 영성은 항상 그리스도인들고 하여금 그들 자신을 넘어서 보도록 격려한다 . 기독교 영성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미 심장한 역사가 일어나는 곳으로 본다 . 그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절정에 이른다 …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 천상의 영역에서 그 완전한 모습을 찾지 않는다 .” [1]

 

1. 기독교 영성은 개인주의 고립주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 기독교 영성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는 많은 원인이 존재합니다 . 어떤 경우 기독교 형성을 말하고 추구한다는 사람드리 일으킨 문제들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겠습니다만 , 대다수는 기독교 영성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영성수련과 영성신학이 개인주의와 고립주의를 지향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 수도원 생활과 관련된 몇 단어들의 언어적 기원을 살펴보면 기독교 영성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 [2]

•  수도승 (monk): 수도승은 단 하나라는 뜻의 모나코스 (monachos) 라는 말을 기원으로 합니다 . 이것이 독거를 통해 진리에 다다르려는 은수자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 이 어원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승의 삶이 사회적 책임을 등진 것으로 오해합니다 . 그러나 수도승의 추구하는 모나코스의 특성은 나그네와 순례자 됨을 강조합니다 . 모나코스를 히브리어로는 야히드 (yahid) 라고 하는데 , 자신의 익숙한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 나그네 ‘ 를 의미합니다 . 즉 수도승은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 위한 목적에서 거짓된 자아와 죄로 물든 삶을 떠나 긴 여정에 오른 사람이지 , 세상과 공동체를 부정하기 위해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남으로써 신앙여정을 시작했습니다 . 그 결과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 홀로 머물면서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 ‘ 홀로 있음 ‘ 을 통해 공적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

•  고행 (asceticism): 금욕을 뜻하기도 하는 이 단어는 ‘ 자신을 학대한다 ‘ 는 뜻을 가디고 있지 않습니다 . 고행과 금욕이라는 말의 “ 고전적인 언어학적 배경에는 육체를 미워하고 ….. 의지력과 자기 억제를 통해 공적을 쌓는 것들 , 곧 오늘날 우리가 고행주의와 영성훈련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전혀 ” 없습니다 . [3] 이 단어른 ‘ 훈련한다 ‘ 는 뜻의 아스케인 (askein) 에서 유래했습니다 . 이 단어가 성경에서 한 번 사용되는데 한글 개역개정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 “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asko)’( 행 24:16). 그러므로 고행이 수도원과 수도원적 훈련의 핵심인 이유는 기독교 영성이 연습 , 훈련을 통해 성숙해져 가지 때문입니다 . 고행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음을 거부하거나 대체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되는 수행법이 아닙니다 .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고전 9:25, 26). 바울은 욕망에 쉽게 노출된 자아를 쳐서 복종케 하는 삶을 살았는데 , 그 이유는 그가 칭의 구원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 그 구원의 기쁨을 지속시키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절제하고 복종하게 했던 것입니다 .

•  독거 (solitude): 독거는 외딴 곳에 홀로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독거라는 단어는 ‘ 홀러 ‘ 라는 뜻의 라틴어 ‘solus’ 에서 파생되었습니다 . 따라서 영성생활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은 숲으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이라는 별도의 장소에서 일시적이거나 평생을 머물며 생활합니다 . 많은 영성가들은 진정한 독거는 마음의 독거입니다 . 세상에 머문다 할지라도 세상을 의존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 아무리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막에 거한다 할지라도 마음의 분주함을 극복할 수 없다면 , 사막이야 말로 가장 시끄러운 곳이 됩니다 . 토마스 머튼은 평생 은수자로 살면서 관상적 독거 생활을 했지만 그는 독거 생활을 통해서 다름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독거는 세상 사람들과 교통하는 수단이면서 , 세상을 향한 기도 사역이었습니다 . [4]

“ 나는 깉은 독거 속에서 형제들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온츄함을 발견한다 . 독거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독거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
“ 나의 독거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다 . 나는 이제 그것이 그들의 것이라는 사실 , 그리고 나에게는 나 자신이 아니라 그들과 관련하여 독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나는 그들과 함께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 때문에 독거해야 한다 .”

•  관상 (contemplation: 근래 한국 교제에서 가장 논란이 되거 있는 관상이라는 말은 templum( 성역 ) 에서 파생된 라틴어 contemplatio 를 번 역한 것입니다 . 성전이라는 뜻의 temple 이라는 영어 단어가 이 templum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이 템플럼은 성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 사물의 내면 ‘ 을 들여댜 보는 장호를 뜻합니다 .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이 말하는 관상은 어원적으로 하나님의 내면을 ‘ 바라보는 것 ‘ 을 의미합니다 .

또한 관상은 ‘con’( 함께 ) + ‘templum’( 집 , 성전 ) 의 합성어이므로 집이나 성적에 함께 머무른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관상은 하나님과 함께 ‘ 머무른다 ‘ 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

대 그레고리오는 관상을 “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 그는 관상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의 열매이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 또한 그는 관상을 ‘ 하나님 안에 쉼 ‘ 이라고 불렀습니다 . 이 쉼의 상태는 관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주체성이 망실되거나 비이성 – 비도덕적 상태에 빠짐을 뜻하지 않으며 , 인간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러므로 관상은 단순히 관상 기도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 “ 아버지여 , 아버지께서 내 안에 ,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기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요 17:21).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비한 사귐 안에 머무는 것 , 그 사랑의 신비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 , 이것이 바로 관상의 상태이며 목표입니다 . 만약 아것을 거부한다면 ,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소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

2.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윤리의 기초가 된다 .

잘못된 신학과 수련법으로 인해 거짓된 영성을 양신하기도 했고 반복되는 실수를 통해 기독교 영성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 그러나 그 원인은 그들이 영성가이거나 수도자드리어서가 아닙니다 . 당시 교회 사제들의 부패와 신학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 오히려 4 세기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도원들과 수도원적 영성훈련은 개인의 삶 , 교회 , 그리고 문화를 변혁시키는 힘을 공급해 오고 있습니다 . 그 열정이 어디에서 옵니까 ? 이미 앞서서 말씀 드린 것처럼 , ‘ 하나님 안에 거하는 신앙 ‘ 에서 옵니다 . 이 신앙 체험과 지식 없이 우리는 어떤 신앙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

예수께서는 체포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 내 안에 거하라 다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요 15:4).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말씀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의 사귐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 거룩함의 열매 , 지식의 열매 , 인격의 열매 , 사람의 열매 , 공의의 열매 등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해서 얻는 은혜입니다 .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자 하는 열정에 비례합니다 .

영어 단어 enthusiasm 은 인간 열정의 근원을 잘 보여줍니다 . Enthusiasm 은 그리스어 ‘en’ 과 ‘theos’ 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 즉 이 단어는 관상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 을 뜻합니다 . Enthusiasm 은 하나님안에 거하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열망을 잘 말해 줍니다 . 성전에서 찬양을 맡았던 고라 자손들은 그 누구보다 이 열망을 품었던 사람들입니다 .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 시 42:1). “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시 84:1-2)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 , 하나님 안에 ,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열망을 표현합니다 . 삭개오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모셨던 삭개오는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며 , 자기가 빼앗은 모든 물건을 돌려주려는 열정을 품어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경험이 삶을 변화시켜 경제적 정의릉ㄹ 선언하게 한 것입니다 . 성령에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 그들이 성령에 충만했을 때 더 이상 가지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현신할 수있었습니다 .

이러한 경험과 깨달음은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해 내는 것이 기독교 신학이며 이것들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학이라고 한다면 영성학 ( 영성신학과 영성수련 ) 은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의 근본입니다 .

그리스 교부들에 의하면 신학 (theologia) 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었습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해설보다 중요한 것은 체험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이었습니다 . 따라서 기도가 신학자의 근본적인 덕목이었습니다 . Alister McGrath 에 의하면 , 종교개혁시대 전까지의 신학에는 기독교신앙에 디한 지적인 탐구와 하나님 체험 사이의 긴장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5] 성경주석은 기도와 다른 별도의 작업이 아니었고 , 목회는 영성지도와 맥락을 같이 했습니다 .

대 이후 교회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이 열정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는 열정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열정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 교회 강단과 신학교는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연구를 신학이라고 부르며 , 교회의 전통과 고백을 머리로 이해하고 입술로 인정하는 신앙의 전부로

여겼습니다 . 자신들고 이해하기 힘든 사변적 언변이 기독교 영성을 대체하면서 소위 말하는 ‘ 정통 ‘ 의 자리를 대신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 이것은 신학만이 아닙니다 . 이 시대의 교회가 기독교 적인 윤리를 상실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3. 공동체 안에서의 능동적인 삶은 기독교 영성의 열매이다 .

헨리 나우웬은 그의 “ 영성 지도 ‘ 라는 책에서 우리가 훈련해아 할 세 과정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 과정은 기독교 영성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초적인 단계를 보여줍니다 .

•  마음 훈련 ( 내면기도 ): 기도는 우리의 소유와 존재됨을 지니 채로 하나님의 현존 안에 서도록 돕는 것이다 .

•  책 훈련 ( 성경묵상 ): 묵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 되도록 하여 우리 존재의 중심뿐만 아니라 우리 행동의 원천이 되도록 하는 훈련이다 . Lection Divina( 거룩한 독서 ) 는 그 가장 좋은 훈련방법이다 .

•  교회나 신앙공동체 훈련 : 영적 훈련은 역사와 공동체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현존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요청한다 .

헨리 나우웬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영적 삶을 말하면서 우리의 영적은 독거 (solitude) 로 부터 공돛에로 , 또한 내면 기도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서의 사역으로 옮겨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 달리 말해서 , 공동체 안에서의 사역은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에서 시작할 때 비로소 지속적 이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세 한다는 것입니다 . 특히 그는 긍휼 (compassion)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사역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 토마스 머튼은 Inner Experience( 한글 책 제목은 묵상의 능력 ) 이라는 책에서 묵상가들이 또한 묵상가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지적함과 아울러 왜 묵상가드리 더 현실적인 문제에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 묵상의 삶은 근본적으로 연합의 삶입니다 . 묵상가는 분열너머의 현합에 이르고자 분열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 처음에는 인간의 일상적 활동에서 어는 정도 손을 떼야 합니다 . 영적 활동의 내적 중심점을 찾으려면 안으로 향하여 몰두해야 합니다 . 분주한 외면 생활에 잠겨 있는 한 그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일단 중심점을 찾았으며 다음 단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참된 묵상가는 일상 생활과 세상 현실에 대해 남들보다 흥미와 관심이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입니다 . 묵상가이기에 더 큰 흥미와 더 깊은 관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 그는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로 여기는 피상적 혼돈에 쉽게 말려들지 않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생 본연의 실체를 더 똑똑히 보고 그 속에 직접 들어갈 수 있습니다 .” [6]

예수께서도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치셨을 때 더 많이 탕감받은 종의 경험에서 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 마 18 :21-35).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이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 마 18:33).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는 용서를 경험합니다 . 그 경험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해 주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나 개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 죄 용서의 사역이 시작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나 개인의 긍휼의 경험이 내가 살아가는 공동체로 확대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한 알의 씨앗이 만드는 생명의 순환처럼 , 기독교 영성은 나에서 출발하여 우리로 열매를 맺고 ,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참된 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우리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으며 , 나를 향한 주님의 눈물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이를 위해 함꼐 울어주는 사역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

미국 워싱턴 DC 에 있는 세이비어 교회의 목표는 inward 와 outward 라는 말로 대변됩니다 . 세이비어 교회의 비전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 내적인 영성 , 외적인 사역 , 그리고 사랑과 책임 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 작지만 고도로 헌신되고 훈련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7]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 영성 이 꿈구는 것입니다 . 새는 좌우의 날개로 하늘을 날듯이 기독교 영성은 마음과 손이 함께 갑니다 .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참된 기독교 영성입니다

[1] Simon Chan, 영성신학 ( 김병오 역 : 서울 : IVP, 1998), 245
[2] 영성신학과 관련된 원어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책과 자료를 참고 , The Monks of New Skete, 행복을 꿈꾸는 수도원 ( 박효섭 역 : 서울 : 푸른숲 , 2001), 장로회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인 오방식 교수의 미간행 논문 , “ 현대 관상기도 이해 ”
[3] Dallas Willard, 영성훈련 ( 엄성옥 역 : 서울 : 은성 , 1993), 171
[4] Henry Nouwen, 내 주를 가까이 ( 엄성옥 역 : 서울 : 은성 , 1992), 42-44
[5] Alister E. McGrath, Christian Spirituality(Blackwell Publishers, 1999), 27
[6] Thomas Merton, 묵상의 능력 ( 윤종석 역 : 서울 : 두란노 , 2007), 215
[7] The Radical Vision of the Church of the Savior, 6-7, 유성준 , 세이비어교회 ( 서울 : 평단 , 2007), 43, 세이비어교회 사역에 대히서는 다음 인터넷 홈페이지 참고www.inwardoutward.org

 

개신교수도원수도회 Protestant Abbey Mission

234 Tenafly Rd. Englewood NJ 07631
Tel: 201-408-4756, 201-655-0199   Email: estheryskim4@gmail.com
Copyright © Protestant Abbey Mission.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Intonet Solution

VISIT COUNT: 132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