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5호

두 아버지의 이야기

10/12/14   이우익

PAM 이사회 감사
Lee Mode International 대표
1985년 도미
St. Johns University (MBA)
뉴저지장로교회 집사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게재할 원고를 청탁 받고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분의 아버지에 관하여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1985년에 와서 지금은 아내와 두 딸을 가진 가장이고 Fashion Jewelry Business를 하고 있습니다.

1 .나의 존경하는 아버지

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키도 작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하고, 머리도 평범하였기에 20대 후반까지도 참 컴플렉스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가 이렇게 가정을 꾸리고 현재의 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아버님의 아픔과 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내며 저에게 가장 상처가 되었던 것은 그시절 학교에서 매년 새학기에 실시하던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설문조사 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TV있는 사람 손 들어! 집에 전화 있는 사람 손 들어봐!" 등등의 조사는 물질적인 것이기에 없어도 창피하지 않았는데 가장 상처가 되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부모님의 학력조사였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최종학력이 초등하교 졸업이셨고 저희 아버님은 그나마 초등학교 중퇴셨습니다. 저희 할아버님이 저의 아버님이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상 초등학교를 졸업조차 할 수 없으셨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손을 들었지만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거짓말 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들고 매번 새학년이 되어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마다 악몽 같은 기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꼭 최소한 대학은 나와서 내 자식들에게는 이런 아픈 경험을 남겨주지 않으리라!
그아픔이 제게 목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또 졸업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제 뜻대로 되어 주지를 않았습니다. 제 나름 열심히 노력하였건만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에서 낙방한 후 간신히 동국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대학낙방 소식을 듣고 절망하시며 눈물 흘리시던 아버님의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면서도 저의 목표는 편입시험을 쳐서라도 꼭 일류대학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편입시험에서도 두 번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흘러보낸다면 내 인생에 2류대학 졸업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들자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입대를 결심하고 빨리 군대를 마치고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도 영어배우는데 유리한 카추샤를 가기위해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고 시험을 쳤으나 그역시 실패였습니다. 할 수 없이 일반병으로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군생활을 시작하며 유학준비도 시작하였습니다. 워낙머리가 좋지 않고 여러 번 실패한 경험도 있었기에 상사의 눈을 속여가며 보초를 서면서까지 영어 단어를 외웠습니다. 미국에 가서 미국대학을 졸업한다면 지금까지의 2류 꼬리표를 통괘하게 날려버리겠다는 (지금 생각하면) 교만한 착각을 갖고 꿈에 부풀어 미국땅을 밟았습니다.

2.미국생활의 시작

1985년 8월 21일!
아직도 꿈에 부풀어 미국땅을 처음 밟았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American dream을 이루겠다고 결심하며 당시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IACOOCCA" AN Auto Biography By Lee Iacooca (다들 아시겠지만 아이아코카는 이태리 이민자의 아들로서 크라이슬러의 회장을 지냈고 미니밴을 처음 만들어 히트시키신 분입니다.)
원서로 읽어야만 American Dream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어렵게 어렵게 그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ST. John's에서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꾸다보니 26살의 나이에 어린 친구들과 함께 2학년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했습니다. 첫해에는 영어를 따라가지 못해서 수업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트레스로 며칠씩 화장실을 못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제 머리의 한계, 의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저를 포기치 않게 붙잡아 주었던 것은 우리 막내아들 미국에 유학가서 공부 잘하고 있을거라 믿고 기다리고 계신 부모님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였습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셨지만 두 형과 형수들은 함께 이민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큰형은 새벽 4시면 야채가게로 출근을 했고 작은형 역시 야채가게에서 밤일을 했습니다. 두 분 형수들도 네일가게에 다니셨습니다. 저만 편히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미안함에 주말 이틀은 야채가게 밤 캐셔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그시절 밤캐셔 일을 하며 106.7FM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던 'God is watching us'라는 노래는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시절 'God is watching us'를 제 나름대로 'My parents is watching me'로 바꾸어서 제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늦깎이 유학생으로 학교 생활과 페들러 생활을 병행하며 포기하고 싶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저를 사랑하고 저를 과대평가하며 멀리 고국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신 부모님이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이 노래가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MBA과정까지 마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되어져 저는 지금도 'God is watching us'를 제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비자신분 유지도 어렵고 하여 한국으로 돌아가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경험도 없이 어린나이에 사업을 시작하여 2년6개월만에 사업을 접고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미국에서 쥬얼리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사업실패로 부모님의 마자막 남은 돈까지 다 날리고 미국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자금은 어머니 친구분, 그리고 신용카드대출로 시작하였습니다. 매달 몰려오는 자금압박과 늘어나지 않는 매출로 너무힘들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부디 저를 다시 실패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혹시 밖에 하늘과 좀더 가까운 곳에서 기도를 드리면 더 잘들어 주실까 생각하며 집 밖 숲속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이루고져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온유한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가장 무서운 분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려웠던 그시절 하나님과의 약속은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약속이며 꼭이루어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3. 우리가족의 슬픔과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의 사무실 책상 뒤 책장에 28년 전 찍은 저희 가족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이민초기 페들러 생활을 하던 시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온가족이 라커펠러쎈터를 배경으로 찍은 소박하고 촌스럽지만 저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고 애틋한 사진입니다. 사진속에는 아버지, 어머니, 큰형, 큰형수, 그리고 작은형, 작은 형수, 저, 이렇게 일곱식구가 앉아 있습니다. 그 사진속에 일곱 명 중 네 분은 떠나고 이제 세 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큰형은 15년 전 45세의 젊은나이로 사랑하는 부인과 어린 딸을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슬픔이긴 하였지만 그시절 저는 막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시작했던 시기로 가장으로써 또 사업의 써바이벌에 급급하여 솔직히 오랜동안 슬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3년 전 둘째 형수님께서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감작스레 세상을 떠나시고 그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나오지조차 못한 상황에서 4개월 만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또 그로 6개월 후 아버님 마저 떠나셨습니다.
이제 저희 삼형제 중 부부가 가정을 이루어 살고있는 것은 막내인 저희 가정뿐입니다. 홀로 되신 큰형수님과 작은 형을 볼 때마다 저희만 부부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고있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두 분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지 애처로울 따름입니다.
저의 육체적인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힘들거나 지칠 때 집에 돌아와 아버님을 보면 아무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그저 살아서 거기 계시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어 든든했습니다. 그러나 한번에 3명의 가족을 떠나보내고 정신적 지주이셨던 아버님마저 떠나 보낸 후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지 못했다면 평정심을 유지하며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신실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4.앞으로 남은 여정과 하나님 아버지

지난 5년동안 가정적으로도 슬픈 일이 많았지만 사업적으로도 많은 어려움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제 성격이 다혈질이고 지기싫어하는 성격이다보니 사업상 알게 되는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픔속에서 갈등하며 깨달은 것이 미움과 증오는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제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한때는 이렇게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이 저희가족의 내력인 것 같아 유전자 탓을 하며 유전자 변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착한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묵상하며 지금 이모습 그대로의 나를 받아드리고 이런 나자신을 애처로이 여기며 사랑하기로 마을을 바꾸고 나니 한결 평안해졌습니다.
앞으로 남은 여정은 제가 정한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의로운 일을 여쭙고 묵상하며 그길을 저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일을 이루기 위해 조금 더 하나님 아버지 뜻에 가까이 가기 위해 시간있을 때마다 조용히 하나님과 대화 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하나님과 영적으로 대화 한 적도 없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지만 시간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또 기쁠 때에도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 아버지께 감사의 표현을 드리며 이글을 마치고저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아픔과 슬픔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아버지,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부족하고 결점투성이인 저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넘치는 세상적, 영적 복을 내려주시고 저를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저의 여정을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같이 저를 지켜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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