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도시의 공해와 요란한 소음에서 산과 들과 밖으로 달려가고 싶다. 쳇바퀴를 돌고 도는 다람쥐처럼 지루한 반복과 숨막힐듯한 쫓기고 따분한 일상을 내려 놓고 자연이 단풍으로 물드는, 낙엽으로 지는, 풍성하게 영그는 가을 품 안에 머물고 싶다. 거기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미래의 종말을 보고 싶다.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가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인생의 사계절 중 어쩌면 나는 가을에 살고 있다. 가을이 인생에게 주는 의미는 심각하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2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나의 신학 수업은 거의가 어려운 강의실과 두꺼운 서책 안에서 어렵게 논의되고 고민해 왔다. 지금껏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본래 신학은 인간이 만든 학문이다. 나름대로 쉽고 짧게 정의 한다면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것을 불안전한 인간들이 가타부타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신학도들은 성경을 근본으로 해서 인간의 지성과 학문, 철학과 문화, 시대 상황과 경험을 총망라하여 골돌히 연구한다. 신학이 풀어내지 못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돌리는 신학자들의 겸손이 따른다. 난 신학자가 아니고 목회자이다. 내가 배워온 신학으로 목회하면서 때론 시행착오도 생겼고 때로 보다 나은 것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통해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다. 신학은 교회를 위해 있는 학문이다. 신학자들은 목회자들에게 좋은 신학을 시대 따라 제공해주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평화롭게 사는 삶을 가르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아무리 깊이 신학을 연구한 학자일지라도, 모태신앙의 경건한 교인일지라도 자신의 삶의 기쁨과 평화와 감사가 없이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자기 의만 내세우는 고집과 편견이 강한 율법주의자라면 문제가 아닐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은혜로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와 감사를 누리게 한다.
말복이 지나 찬 공기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게 찾아 오면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지난 날 무성했던 초록빛 나뭇잎들은 어디 가고 하루, 이틀, 일주일이 다르게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으로 찬란하게 단장한다. 정말 자연은, 가을은 놀랍다. 나무잎새의 마지막은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가? 산과 들의 숲들이 온통 빨갛게 이글이글 따갑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노랗게 불꽃을 품으며, 초코렛 빛의 아우성을 지르는 합주곡처럼, 알록달록 찬란한 숲들의 향연이다. 어깨를 펴고 새파란 하늘을 우러러 본다.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해 주신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음성은? 이 노년의 초췌해가는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 아! 나도 나무 잎사귀의 마지막처럼 이 노년을 아름답고 고상하게 마무리 할 수 없을가? 마른 막대기를 짚고 하염없이 하는 말이다. 태초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우린 그 옛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가을엔 영원히 변치 않는 살아계신 생생한 음성의 근원을 찾아야겠다.
가을신학을 다섯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가을은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 개역개정)
다가 올 마지막을 위해 준비하라는 것이다. 지난날 알뜰이 잘 했더라도 마지막을 경솔히 하면 쌓았던 공이 헛수고가 된다. 신앙여정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을 잘 마무리 해야 한다. 단풍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아름답다, 이쁘다고 말한다. 멀리 산 속 단풍을 보고 운전할 때 저절로 감탄의 소리를 지르게 된다. 누가 보던지, 어디에서 보던지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칭찬듣는 신앙인이 되자. 예수님 믿는 사람들끼리 만의 칭찬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과 타종교인들에게서도 존경받는 크리스챤이 되자.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의 하나로 뽑혔다가 마지막에 도중하차 하신 가룟인 유다를 생각해 보자. 처음엔 유다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 뽐힘을 받았다. 그는 남쪽지방인으로서 오직 한사람만 뽑힌 자이다. 계산을 잘하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돈관리를 하는 직책을 맡은 것을 보니 신용이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못하는 물질에 눈이 어두운 이기적인 제자였다. 그래서 선생님을 원수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기는 오류를 범한다.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졸업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고 일하며 기다린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기분으로 살지 않고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적군과 싸울 때 전쟁 중에서 피곤하고 지쳐도 부상당해도 졸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면 살아 난다. 속담에 호랑이 굴에 잘못 들어갔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은 목적을 갖고 주체성있게 흔들리지 않고 곧게 나간다.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은 시작부터 마지막을 연상하며 열심히 일한다. 기독교인의 종말은 부활과 영생 그리고 천국으로 이어진다. 스테반과 바울처럼 마지막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있게 믿음으로 서야 한다. "저희가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개역개정)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7-8 개역개정)
예수님도 십자가 지실 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시며 십자가 지는 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당당하게 감당하셨다. 신앙은 자기가 거쳐온 길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 일이다.
2. 가을은 인카네이션(道成人神)의 신앙을 보여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막10:45)
낙엽지는 가을 길을 걸으며 도성인신(道成人神)하신 예수님을 묵상한다.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떨어져 세상에 오시는 일이 가능할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처럼 사실 수 있을가? 존경과 영광과 예배를 받으실 분이 종의 모습으로 섬기시려고 끝내는 당신이 죽으시고 대신 우리를 살려내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나무가지에 붙은 잎새가 떨어지는 아픔과 낙하에서 절망을 본다. 땅에 떨어져 바람따라 굴러 다니는 낙엽의 가엾은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세게 불면 가볍게 날려 멀리 자취없이 사라지는 순례자를 연상한다. 제자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 병자들을 고쳐 주셨던 주님, 배고픈 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눠주셨던 주님, 죄로 끌려온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 손가락질 당하는 세관의 집에 유하셨던 주님, 뱃사람들을 세계의 지도자로 키우신 주님, 낮은 자리에서 사셨던 주님의 자취들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나 신적으로 자기의 것이 없이 모든 것을 희생하여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다. 크리스챤의 삶은 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종이 되는 것이다. 참된 리더쉽은 종이 되는 것이다. 양 한마리를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놔두고 찾아 나서는 것이다. 가진 것을 내려 놓는 자유로움과 홀가분한 가난한 마음이다. 인카네이션은 낮아져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를 좇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마16:24개역한글판) 오늘 우리에겐 예수님을 믿고 복받아 크고 잘되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낮아지고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섬기며 겸손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도성인신의 질문의 해답은 구속사적으로 인간과 세상구원이다.
3. 가을은 열매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무화과 나무의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함께 가자" (아가서2:13)
가을은 수확의 계절, 논밭의 무성한 곡식을 거두는 계절이다. 가을엔 심은대로 열매를 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7:18 개역한글판) 가을엔 열매맺는 것을 보고 그 나무의 존재를 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 심은데서 팥이 난다는 속담이 있다. 땅과 나무 종자는 속이지 못한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잠11:30)이고 태의 열매는 상급이요 기업이 된다(시127:3). 이민자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이민왔고 교회는 미래의 주인공을 길러야 한다. 바람직한 교회는 큰 건물과 시설, 많은 교인과 유명한 사람, 풍요한 헌금, 다양한 프로그람이 아니라 어떤 크리스챤이 배출되느냐 이다. 교회가 사람을 중요시 하고 교회자체를 위한 교회이어서는 아니 된다. 제도와 법에 매인 교회도 아니어야 한다. 진정 교회와 사회에 공헌하는 신실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년 동안에 뿌린 씨앗의 열매이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가지에는 온 세상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렸으며 들짐승들이 그 그늘에서 쉬고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서 깃들였다".(단4:21. 현대인의 성경)" 교회 열매와 신앙인의 열매를 온 세상에 나눔으로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고 자연이 풍만해지고 충만하게 된다.
4. 가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리라 하리라"(마13:30)
가을은 추수하는 계절이요. 밭의 농사는 추수를 끝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낸다. 추수 때는 좋은 씨앗을 뿌렸는지 열심히 가꾸었는지 판가름나는 시즌이다. 풍성한 수확을 거둔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요. 열매가 없는 자는 후회하며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았던 것을 한탄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을은 심판의 계절이다. 가을의 심판은 더 나아가 우리 전 인생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계절이 된다.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을 말한다. 그날이 오면 집주인은 종들을 시켜 남을 죄짓게 하는 자와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 넣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할 것이고 의인들은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종말이 있는 것을 전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만일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다 구별없이 대우를 받는다면 정의와 질서가 없는 혼돈(카오스)스런 세상이 될 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기사에서도 게헨나(지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환상을 그대로 요한계시록에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는 심판대에 선다. 그러나 그 때만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말씀의 기준에 의해 양심심판을 하게 된다. 심판을 알고 믿는 신앙은 인생을 절대로 함부로 살 수 없게 한다. 심판신앙은 보수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의 필수적인 가치평가이다. 현대인의 위기는 심판신앙을 인식하지 않고 무시하고 자기 임의대로 신앙을 해석하는 것이다. 운동경기에서, 음악콩쿨에서, 노벨상 평가에서 얼마나 심판이 냉혹한가? 기독교인과 교회는 이 심판을 은혜로 덮어버려 진리를 말살시키고 있지 않는가? 심판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요 중요한 근간이다.
5. 가을은 감사의 계절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칭찬 들을 때나 원망들을 때에,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지금 나쁜 일이 생겼더라도 감사히 지나고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울은 기독교의 덕을 믿음, 소망, 사랑 세가지로 말했는데 라인홀드 니버 교수는 하나를 덧붙인다면 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일상의 평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들, 햇빛과 비, 공기와 바람, 밤과 낮, 사계절의 변화,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을, 미국에 와서 산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살자. 이주 전 필리핀에서 태풍으로 오천명이 죽었다. 욥도 하룻밤 사이에 아들 딸 열명을 잃었다. 모아 두었던 풍요로운 재산을 모두 날렸다. 건강도 사라져 몹쓸 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대야 했다. 아내는 원망하고 도망가 버리고 친구들은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 애처로운 상황 속에서 욥은 나에게 풍요를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신대 나는 그 분에게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감사 찬송했을 때 역경넘어 옛날보다 더 감사하는 일이 생겼다. 야베스도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도, 땅도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형편없이 살았다. 불평없이 감사로 앞날에 땅을 가질 것을 꿈꾸고 복받을 것을 확신했다. 드디어 야베스는 넓은 땅을 받았다. 처절한 상황이 문제가 아니다. 작곡가 베토벤은 아버지가 매독환자였고 어머니는 결핵환자였다. 부모의 병은 자녀에게 피해를 준다. 첫째 아이는 매독균을 가지고 병자로 태어났고 둘째 아이는 죽었고 세째 아이는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넷째 아이는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었다. 다섯번째로 베토벤이 태어 났다. 불우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체념하지 않고 신앙으로 이겨나가 불후의 명작을 작곡했고 57세까지 작곡하다가 귀머거리가 되어 죽었다. 베토벤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과 꿈과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며 적극적으로 도전하여 승리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11월에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거쳐 네델란드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이 대서양을 건너 매사츄세츠의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디언의 습격과 동료의 죽음을 믿음으로 버티어 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을 가진 청교도들은 싸우던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옥수수와 밀, 토마토의 씨를 주며 기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1789년 죠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감사절을 국가의 명절로 공포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대통령은 감사절엔 휴전을 선포했다. 오늘 미국의 번영과 발전은 감사의 신앙에 기초된 것이다. 세계에서 감사하는 민족은 부흥하고 잘 사는 국가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모든 일에 감사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주여! 가을엔 단풍을 보며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소서
가을엔 낙엽이 지는 길을 걸으며
도성인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가을엔 들과 밭에 쌓인 열매를 보면서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다짐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그리고 절제를 이 신앙의 계절에 맺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