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생애
예수님은 누구신가? 간단하고 쉽게 이해해보자.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요3: 16,17) 독생자 예수는 인류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졌다. 말씀이신 로고스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세상 한 가운데 자리를 잡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요한복음1: 14)
독생자를 명명할 때 흔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예수는 유대 어린아이들의 흔한 이름으로 사람이신 독생자를 나타내는 히브리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 또는 구세주라는 뜻으로 희랍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양성을 가진 사람은 없다. 예수는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이고 목수였다. 아버지를 도와 목수일을 했고 여러 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2000년 전 하나님의 나라를 놔 두시고 인류구원을 위해 세상에 찾아 오신 아기 예수께 인간들은 방한 칸을 비위 드리지 않아 겨우 마굿간 구유에서 탄생하셨다. 탄생뿐 아니라 성장 후 일하실 때에도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둥우리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8: 20)고 하심으로 빈한했던 삶을 말씀해 주셨다.
그 곤한 중에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들에 나가 백합화를 보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고 희망적이고 평화스런 얘기를 하셨고 호숫가에 나가 어부들과 대화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시며 복음의 진리를 몸소 가르치시며 본을 보이시며 실천하셨다. 때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뜰과 광야에 모여 든 청중들에게 인생을 올바로 사는 진리의 길을 깨닫게 하시며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며 영육을 살려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여 주셨다. 망망한 갈릴리 호숫가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났다. 주님은 구령사업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자녀도 없이 집과 살림도 장만하지 않으시고 빈털털이로 사셨다. 자기 생명마저도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대신 돌아 가셨다. 살아 생전에 예수님은 주로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만나 고쳐 주시고 소외 당한 자와 문제 있는 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고 죄로 허덕이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도록 변화시켰다.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지적하시며 성전에서 불의를 몰아 내시기도 하셨다.
구약성서는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말하고 있는데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니라."(이사야61: 1-3) 이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으로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 포로 후 처참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는 희망으로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을 심어 주고 있다. 더구나 예수시대에는 로마식민지 하에서 메시야 대망사상이 최고조로 달해 있었던 시기이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본문을 그가 자라났던 갈릴리 회당에서 안식일에 성령이 충만하여 읽으셨다. 구약성서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신약성서에서 오신 메시야로 이루어 지는데 누가복음 4:16-19, 마태복음 13:53-58, 마가복음 6:1-6에서 예수님 자신이 이사야에 언급된 메시야가 당신인 것을 밝혀주었다.
"주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에게는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공동번역성서 누가복음 4:16-19)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고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을 통해 눌림에서 해방을, 눈먼 인간들이 눈을 떠 보게 되고, 억눌린 자가 자유를 받게 됨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제 우리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해 소망이 되고, 좌절이 변해 형통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주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알렐루야! 예수님과 열두제자, 초대교회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병든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해주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구제해 주고 압박 받는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며 복음의 은혜로 평안하게 사는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갔다. 교회가 집단이기주의자가 아니고 사회를 구원해내는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자이고 부나 양의 과시가 아니라 소수자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며 억눌린 자를 섬겨야 한다. 이기심 때문에 배타적이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 협력과 일치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는데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가복음10: 45) 자기의 가진 것 모두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버리시어 자기 생존을 위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 존재였다. 예수님은 입으로 말로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함으로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표본이 되었다.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과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일에 자기의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옵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절규하셨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한다고 하셨다. (요한복음5: 3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이라"(빌립보서2:8). 사도바울은 자기존재를 버리고 무조건적 사랑의 실천자이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고 예수를 닮아 죽음의 길을 걷는 제자가 되었다.
예수정신은 12제자와 따르는 무리들 그리고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비롯하여 안디옥교회 등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소유정신으로 구현되었다. 교인들은 자기 재산을 사도 발 앞에 가져다 놓아 없는 자에게 베풀고 구제하며 네 것 내것 없이 함께 소유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정신이 수도원 공동체를 통해 이어오고 있다.
5. 수도원의 발자취
교회가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이 있은 후 탄생되고 믿는 자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예루살렘 시가지와 전 유대 땅 그리고 이웃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전세계를 향해 복음이 전파되었다. 믿는 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점점 확고해져 당시 유대정부나 로마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내걸고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다가 어떤 이들은 순교를 하였다.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처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격하는 첫 경험을 하게 되고 지난 날 우상숭배와 죄악 된 습관을 끊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주님과 같은 삶을 살려는, 주님과 가까이 살려는 믿음으로 고민을 한다.
수도원운동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다. (마태복음16: 24)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사셨다. 12제자들도 그렇게 했고 사도 바울과 세례요한도 세상 것을 위한 삶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사셨다. 초대교회부터 2000년 동안 많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위해 핍박과 고난과 순교를 감수하며 이 신앙 지켜 전파되어 오늘 우리도 그 뒤를 따르게 됐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기독교교회에서 수도원 운동 시작은 학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3세기경부터 사회를 떠나 광야로, 시리아, 애굽, 팔레스티나의 사막으로 들어가 은둔과 금욕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려는 생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4세기경 성 앤토니(St. Antonio 251-356)는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리움을 받는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20세 때 부모를 여의었다. 어느 날 교회당에 있을 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19: 21)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후 그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누이동생들은 독신녀로 지내는 이들에게 맡기고 세속을 떠났다. 처음에는 고향 가까운 곳에서 다른 수도자의 지도를 받았다. 다음엔 사막에 들어 가 폐허 된 고성에서 사회와 절연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자신의 말을 멈추고 묵상기도를 하였고 말씀으로 배부르기 위해 금식을 하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는 주님 안에 사는 것만 소원으로 세상과 단절 된 생활을 수십 년 살았다. 그의 탁월한 영성이 소문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 영적 신앙지도와 병 고침을 받았다. 그의 일과는 시편과 성경을 외우는 일, 묵상기도와 금식하는 일, 하루에 한끼 먹고 잠도 조금 자고 옷은 남루하게 입었다. 나일강 동쪽에 있는 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다가 105세에 세상을 떠났다.
쌩 빠코미오(? - 346)는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이룩했는데 이것이 수도원의 기초라고 할 수있다. 그는 독신생활에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 "사막의 무서운 적막, 기후의 불순으로 겪어야 하는 괴로움, 짐승과 강도들의 위험, 음식의 부족, 악마의 실질적 혹은 상상적 공격, 내적 건조생태와 게으름에서 오는 우울증, 실의와 고독 속에서 오는 공포, 영적 실증, 그 밖의 경험부족과 합당한 지도자가 없는 데서 오는 갖가지 애로 때문에 독신자들이 선의의 열성으로 시작한 그 생활에 영육간에 타락을 초래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빠코미오는 형제애와 규칙의 질서로서 수도자들의 도움을 주고자 했다. (유수일: 수도생활과 영성, 영성수련과 영성목회 93쪽) 그는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이룩했다. 수도자들이 사는 각방을 둘레로 담을 쌓았는데 그 담이름을 monosterion이라고 불렀는데 수도원이라는 monastery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다. 회칙(Regular-Rules)을 만들어 기도시간, 신앙생활 범위, 입는 옷을 정하고, 합당한 일을 정했다. 또 그들은 한 지도자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 그 지도자를 Abbot (Abbas)라고 불렀다. 이 아빠스는 베네딕토계통 수도원의 최고장상을 가르치는 말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Abbot에서 Abbey(사원)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오늘날 영국과 영국연방지역에서는 수도원을 Abbey라고 부른다. (예: Westminster Abbey, Jesus Abbey) 수도원운동은 점점 크게 부흥되었는데 베네딕도(Benedict of Nursia 480-547)는 Santa Regula(성규)를 만들었는데 이 규칙은 중용과 적응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불란서의 샤르망뉴대제의 아들인 루이스황제가 베네딕토가 고안한 회규를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성 베네딕도 회규에 따르면 가난은 사도행전4장 32-35절에 기인하고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니라." 6세기에는 자기의 자산이 있으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거나 혹은 수도원에 바치게 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자신의 육신까지도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했다. 수도자는 가난하지만 수도원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6세기경 베네딕도 수도원 시작 때는 15명이 거하는 건물 하나였지만 500년이 지난 12세기에는 베네딕도 수도원은 거대한 건물을 지니고 봉건시대에 영주가 갖는 노예를 거느리는 부자가 되었다. 수도원은 문화쎈타가 되었고 세계각처에서 순례자들이 순례하는 성지가 되어 버렸다. 11, 12세기에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종교의 본부가 되었고 당시에 건립된 불란서의 Cluny수도원은 오늘날 베드로성당 못지 않는 웅장한 건물을 지녔었다. 그러나 불란서 혁명 때 농민들에 의해 끌루니성당은 불에 타지고 파괴되어 일부만 남았고 수도원 재산은 약달 당했다. 중세기의 교권의 타락으로 수도원 내의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청빈한 생활과 기도생활로 돌아가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의해서도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성직자들의 순회선교사명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수도원의 사명은 기도하는 것이다. 수도자들의 서원은 정결, 청빈, 순명 세가지이었다. 수도자의 정결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받은 은총으로 여겨야 한다.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 된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 들여라."(마태복음19: 12 표준새번역) 이 일은 정말 아무나 할 수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 청빈하게 살며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일이 우선적이기에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영적 지도자에게 순명하는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 주님을 찾아 사회를 떠나, 가족의 품을 떠나, 적막한 광야 수도자의 길을 걸어도 거기에는 가깝게 느껴도 아직 못 건느는 사이(공간) 가 있다. 그래서 기도와 믿음으로 더 따라 나서야 한다. 많은 우리의 선배 수도자들은 깊은 영적 고독과 무서운 가난을 헤치고 주님 안에 계실 때 주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비치셨다. 수도원이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신령할 때 세상에 영감을 주었다. 거룩해야 하는 수도원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며 나갈 때 물질에 큰 부자가 되었을 때 타락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수도원을 심판하시고 무너뜨리셨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신앙으로 돌아가는 개혁운동을 했다. "수도생활이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이루어지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서원함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의 소명에 응답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자기봉헌을 통해 성령의 인도에 따르면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지향하고 노력하는 생활자체이다."(유수일: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역사와 수도생활의 본질 107쪽)
6. 수도원 정신으로 돌아가자
수도원운동은 기도하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영성회복 운동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대로 사는 생활이다. 현대는 물질만능시대처럼 되고, 과학기술지식이 절대적이 되어가고 하루가 멀다 아니하고 급변하는 상황들이 Mass media를 통해, internet과 SNS와 iphone을 통해 삽시간에 세계로 퍼져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구가 하나로 함께 살아가는 global society가 되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삶은 더 나아짐이 없이 돈과 시간에 쫓기고, 기술과 지식의 탐구에 불안하고, 급변하는 메시지와 상황을 놓고 당황해 하고, mass media의 보고를 듣고 놀라며, 고독해 하며, 전자매개체를 통해 자기를 빼앗기고 복잡한 기계처럼 살아간다. 세상의 것들에 잡혀 산다. 살기 좋게 모든 것이 개발되고 물질이 풍요로운데 왜 평화롭지 못한가? 현대인들은 자기를 상실했다. 이 말은 존재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영성회복이 시급하다. 너무 쫓기고 복잡한 일에서 손을 놓고 쉬어야 한다. 쫓기는 압박감과 경쟁에서 자유함을 찾아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는 부르짖음에서 조용하고 고요하게 눈을 감고 무릎 꿇고 머리 숙여 허리 접고 땅 바닥에 업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 때 거기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온다. 이게 기도이다. 기도는 나의 소리, 나의 주장, 나의 바람, 나의 지식, 나의 공적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주님 안에서 주님 뜻대로, 주님 말씀을 그대로 듣는 그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 갈 수없다." 는 말이다. 교회당이나 성당에 다니는 자가 모두 천국에 갈 수있는가? 이것은 예수님만 아신다. 기도는 주님 중심으로 주님으로부터 주님께로 가는 것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홉이다. 기도가 끊치면 영혼의 숨소리가 멈추기 때문에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 내 몸과 정성을 바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부흥하고 발전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캄캄하고 종말이 온다. 교회가 성장할 때 급하게 해야 할 다른 일이 생길 때 기도 줄을 길게 꼭 붙잡자.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기도는 내가 만드는 기도이다. 기도의 잘못된 습관을 바꾸자.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주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드리자.
수도원의 정신은 청빈하게 사는 것이다.
나의 가진 것을 나누며 베푸는 것이다. 꼭 많거나 큰 것으로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정성을 다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다(마태복음19: 21).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수도원 정신은 검소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 않으며 특히 지도자는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 앞에서 관리하고 정직해야 한다. 교회재산을 교회 지도자들이 맘대로 관리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 교회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교회가 위임한 모임을 통해 정확히 쓰여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생활에 지나치게 사치하면 안 된다. 아름다운 분위기를 꾸며야 하고 건강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분수에 넘치게 유행을 좇으면 안 된다. 남에게 주려고 할 때 내가 할 것을 다하고 내가 쓸 것을 다 쓰고 남을 돕기 힘들다. 나는 비록 가난하게 적게 가지고 살아도 함께 나누며 필요한 자를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설 때 한국교회에 대해 경의를 표할 것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internet에서 반 기독교적 댓글을 달고 교회를 비웃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이 잘못 보고 편견과 선입주견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128년 전 조선사회를 위해 조국의 해방, 농촌계몽, 미션학교교육, 병원봉사, 사회사업기관봉사, 문화사업, 기독교 인물배출, 금주금연운동 …… 등이 있을 때 조선사회는 교회를 우러러 바라보고 따랐다. 이 운동의 회복이 필요하다. 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7. 개신교수도원 수도회 (PAM) 의 사역과 전망
한국 개신교회는 지난 20여 년 동안 약 15만만명의 교인 수가 감소되었고 한국사회는 교회를 향해 어느 때보다 공격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세상이 악하소 병들어 갈수록 사회는 교회를 향해 빛과 소금이 되어 표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30여 년 전 북미에 있는 사회학자인 허원무교수, 김병서교수, 신학자인 이상현교수는 북미 동포수의 3분의 2가 크리스천(캐톨릭포함)이라고 발표했다. 20년 전 뉴욕 퀸즈 칼리지 사회학 교수인 유영갑교수도 동포의 3분의 2를 크리스천으로 보고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신교회의 신자 수와 교회 수는 실제 늘어나지 못하고 40%로 줄고 있다. 반면에 불교와 원불교의 포교가 백인과 동포를 향해 활발하다. 캐톨릭 선교도 차분하게 동포사회를 넓혀가고 있다. 그동안 교회가 담당했던 지역사회 봉사도 이제는 동포기관들이 발벗고 나서서 자발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개신교회는 수적으로 많은 것 같으나 내적으로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에 사는 우리는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과 상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교회가 기독교 영성을 바로 찾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자주 모이고 성경공부와 기도도 열심히 해서 좋지만 그 배운 것들을 실생활에 실천이 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여기에 개신교 수도원운동이 필요하다.
1)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PAM)의 사역
개신교 수도원의 이름처럼 초교파 영성수련을 통해 수도자들이 되게 한다. 오늘 개신교수도원은 은둔과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문화 창달과 영성훈련을 통한 인격과 영성의 변화와 교회의 바람직한 방향제시에 있다.
참된 영성과 건전한 영성회복을 위해 수도원에서 영성수련을 제공한다. 단기로는 3박 4일이나 6박 7일, 1개월 내지 2개월, 장기적으로는 1년 내지 3년 term으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수도자들은 예수그리스도가 가셨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받아 예수 안에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예수 닮기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수도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애를 닮아 가며 모방(imitation)하는데서 나타나는 영성이다.
지난 날 죄악 된 생각과 나쁜 습관을 끊고 오늘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이루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것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마태복음16: 24)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6: 5, 마태복음22: 37-39)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는 영성을 갖도록 돕는다. (데살로니가 전서5: 16-18) 수도자는 꼭 수도원에 입사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살면서 성규(규칙 준비 중)를 지키며 수련단계를 거쳐야 한다.
지난 5월에 WMBC TV에 인터뷰를 갔다가 사장이신 주선영목사님이 수도원 운동하는 것을 격려하시면서 사회와 격리된 것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지금 동포사회에 꼭 필요한 운동을 시작한다고 하셨다. 지금은 아직 수도원 장소가 없어 이 일을 다 진행하기가 힘들지만 미래에 수도원 건물을 주실 것을 믿는다. 다행히 2500sq ft의 사무실이 있기에 단기 영성수련회를 할 수 있다. 수도원의 건물이 생기면 명상의 길, labyrinth, 농사짓는 일, 성경공부방, 도서실, 기독교 자료 전시실, 목공, 조각과 그림 그리기들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길 것을 믿고 기도한다.
수도원 사무실에서는 개인 기도, 자기 성찰, 성경탐구, 은퇴목사들의 모임, 여성목회자 모임, 소그룹기도회, 성경공부, 성만찬, 금식, 거룩한 독서, 목회자의 상담, 친교시간, 성경말씀쓰기, 직장예배, 회지 발간, 도서출판 등 앞으로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할 예정이다. 누구나 쉽게 찾아 와 쉴 수 있는 평안한 영적 휴식 공간이다. 개인 기도실이 있어 맘대로 오셔서 기도할 수 있고, 언제나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어 대화하고 마음의 문제를 풀고 갈 수 있는 평화로운 장소이다.
2)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PAM)의 전망
개신교 신학교들의 커리큘럼이 지식과 학업 위주로 되어 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 신학교는 어느 대학교 출신으로 신학교에 들어 왔느냐? 성적이 어떤가로 평가하는 일반대학 처럼 하면 안 된다. 신학교 담당자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3년 M.Div. 마치는 과정은 신학만 가르치기도 시간이 부족하고 대학 출신들을 더 오랫동안 신학교에 머물게 할 순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학교는 일반대학교에서 길러지는 전문인과 다르다. 목회자는 인간 전체를 책임지는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신학지식을 배운 만큼 수도자의 영성수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3년을 신학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교회로 내어 보내는 것보다 2년쯤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고 거기서 일생을 목회 할 각오와 자기 성찰, 기도와 헌신을 훈련받고 나와 교회에 들어 가면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학교가 변해야 한다. 신학교는 그냥 대학교나 대학원 과정이 아니라 수도자를 만드는 수도원의 기능이 포함되어야 한다. 오늘의 목회자와 교회에서 발생히는 문제는 신학교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있다. 신학교 커리큘럼을 미국이나 유럽의 제도에 따라가면 안 된다. 왜 미국교회와 유럽교회들이 하향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신학과 경건(수도자훈련)이 겸비되어야 한다.
지식으로만 훈련받은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어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잘 하여 많은 청중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그래서 큰 교회당을 지으면 목회가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얘기다. 진정한 목회는 목회자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강단에서 외친 설교가 반영되고 구원받고 변화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신학교가 지식과 수도적인 교육을 병행하며 목회자들도 설교와 삶이 일치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의 예배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종합예술이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음악인 찬양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고전악기인 올겐과 피아노, 오케스트라, 현대악기인 기타, 드럼, 나팔, 찬송도 전통적인 찬송가와 현대적인 복음송을 부르며 감동이 되어 가슴에 손을 얹고 울기도 하고 손을 올리고 부르기도 하고 박수치며 신나게 부르기도 하고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찬송을 잘 불러서 좋다. 한국인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논리를 정연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가 교회다니는 사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대개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
예술에 찬송만 있는가? 미술, 조각, 율동, 문학은 어디에 가 있는가?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찬양만 아니라 미술과 율동이 함께 어울릴 때 큰 은혜를 주지 않을까? 3년 전 WARC에 총대로 가나에 갔다가 옆의 나라 250년 장로교 역사를 가진 토고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다. 이들은 매 예배의 헌금 시간에 감사하여 춤을 추며 강단 앞에 나가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들고 흔들며 감격적인 춤을 추며 나오는 것을 보았다. 2천여명 교인이 20분 동안 줄을 서서 헌금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고 크게 은혜받았다.
아프리카 장로교회는 유럽으로부터 복음을 받았지만 저들의 심성에 맞춰 받아 들였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동방정교회가 있는 러시아나 희랍 등 북유럽 국가에 가면 볼 수있고 유럽의 교회 들이나 수도원을 방문할 때 성화와 조각을 보고 찬송가와 같은 또 다른 은혜를 받을 수있다. 개신교회의 예배는 음악에만 너무 치우쳐 있지 않은가? 미술도, 율동도 예배를 위해 주신 자료가 아닐까?
개신교 수도원의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복음주의 노선이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 공경이나 성인예배는 하지 않는다. 복잡한 예배 순서를 만들지 않는다. 순수하고 단순한 복음적 예배를 드린다. 기독교회의 잃어버린 좋은 전통을 다시 찾아 낸다. 개신교 수도원은 옳바른 신학을 위해 신학자문의원회를 두어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와 교수를 청빙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자문을 구하고 필요한 자원 봉사를 받는다. 수도원의 재산은 개인의 것이 없다. 수도원 공동체 법인체 자산으로 등록된다.
우리는 수도원 운동을 처음 시작한다. 배워가면서 계속 연구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현대사회에 적합하게 수도원 운동을 변형, 개발해 가면서 미주한인 교회와 한국교회, 미국과 세계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한다. 이 단체는 초교파적 단체로 어느 특정교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수도원 운영은 일반의 후원과 수도자들의 헌신으로 충당한다. 앞으로 하나님이 뜻하시면 개신교 수도원 운동이 미국과 한국, 캐나다와 전 세계에 확산되어 나가기를 기도한다.
이 일에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