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3호

교회당 안에 기독교미술 공간을

10/28/14   김창길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 원장
뉴저지장로교회 원로목사
해외 한인장로회 뉴저지노회 공로목사

음악이 소리의 높고 낮음, 길고 짧음, 강하고 약함을 일정한 순열로 화합시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라면 문학은 상상의 힘을 빌려서 사상과 정서를 언어나 문자로서 표현하는 예술이라 하겠다. 미술은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공간을 아름답게 창조하신후에 감탄하셨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처럼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478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세계.....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79장)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가만이 들여다보면 우리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
한 폭의 웅장한 그림을 그리셨고 거기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들,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문학을 저절로 익히게 되었다. 고고학이나 종교사회학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발달되기 전에 인류는 신을 찾는 표현을 몸짓(Body Language, 율동)으로 하다가 노래(찬양)으로 바뀌어 지고 나서 문자와 언어로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도, 우리들이 모이는 교회당도 예술적이면 좋겠다.

불교의 사찰에 가보면 쉽게 눈에 띄우는 것이 부처상, 탑, 대웅전 넓은 자연의 경관을 차지하고 있다. 모슬렘의 모스크를 가보면 높은 지붕 위에 초생달을 세워 놓고 성전 바닥과 벽엔 사라센 고유의 무늬들을 그려놓고 바닥에 무릎끓고 기도하기 편한 구조로 간단하게 꾸며져 있다.

유대교 회당의 겉 모양은 일정치 않고 자유스럽다. 그러나 성전 안에 들어가면 성경두루마리가 들어있는 법괴가 정면에 있고 회중은 그곳을 향해 기도하고 구약성경을 외우며 예배한다.
정교회는 십자가형의 지붕위에 황금빛 돔을 세우고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웠다. 성당안에 들어갈 때 문 입구에 놓여진 성화에 입을 맞추고 성호를 긋고 미사에 들어간다. 성당 안에는 의자가 없고 보통 2-3시간 동안 서서 미사를 드린다. 기도는 무릎 끊고 드린다.
천주교회는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십자가 형으로 성당건축을 하며 보통 위치는 마을의 중심이거나 지형이 높은 곳을 정하는데 교회가 세상의 중심적 역할과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 성당 입구에 들어설 때 성수로 성호를 긋고 의자 밑에 달린 기돗대에 가서 무릎 끓고 기도한다. 정면의 제대가 넓고 화려하다.

개신교회는 건물건축에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다. 교회당 표시로 지붕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안은 강대상 중심으로 성가대석이 있고 목사와 기도자가 강단 위에 올라간다.
한국 개신교회는 선교 130여년을 맞아 남한에 5만 교회당과 100여 군대 신학교가 있다. 보통 신학교 안에는 목회자를 양육하는 교역학과(MDiv)와 신학과, 기독교교육, 교회음악과, 사회복지과, 종교철학과 등이 있는데 교회음악과는 15% 신학교만 가지고 있다. 기독교 미술과나 교회건축과는 한 곳도 없다. 불교의 경우 동국대학교나 원광대학교에 불교미술과가 있다.

기독교 미술

미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림이나 조각이나 인물이나 풍경에서 묘사하는 정물의 본래적 특성을 넘어 작품속에 미적요소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초기 미술은 장례식 할 때 관이나 묘실에 그려졌던 신앙표현이 시작이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산자들과 똑같이 밝고 상쾌한 화관을 그림으로 그렸다.
3세기의 카타콤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진 구약과 신약의 장면들은 4, 5세기에 석관조각에도 되풀이 되었고 미술가는 더 이상 암시적 표현이 필요 없어지고 자신의 의도를 과감하게 세상에 나타내게 되었다. 6세기에는 로마와 라벤나에서 초기 기독교인이 모자이크를 만들었는데 그 기술의 우월성과 예술적 아름다움에서 모자이크 원리를 말해준다. 이제 미술가들은 기독교가 핍박받을 때 처럼 카타쿰이나 석관에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이젠 세상이 알아보게 교회당 내부의 벽화 장식이나 세례당의 벽화를 그렸다.
로마의 성 프렌치아나 교회당에 있는 모자이크는 반원형 그림으로 예수님이 스승으로 당당하게 계시고 한 단계 아래 12 사도들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 12제자들이 자기 면류관을 벗어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그림 등이 있다.
기독교 미술이 처음 교회에 도입되어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고 당시 글을 모르는 회중들에게 교육재료가 되며 덕을 세우는 일에 교훈을 주는 좋은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인데 형상화 하면서 분향과 공경과 경배하게 되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수도원 미술

성역화 되고 봉쇄된 수사나 수녀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수도원에 그들은 자급자족 하기 위해 농사나 기구를 만드는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농사와 기예는 수도원 거주자들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에 단련이 되었다. 6세기경 켈드족의 한 수도원에서는 2천명이 손을 움직여 하는 노동으로 생활했다. 철재나 목재를 다루는 장인이나 조각가, 대장장이, 석공, 화가들이 수도원에 가입하여 수도생활을 하려고 할 때 절대로 개인의 작품을 자랑해서는 안되며 그러나 그들이 그동안 익힌 기예를 계속 발휘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통해 수도원 교회당을 웅장하게 지을 수 있었고 천장에는 천상의 기쁨과 아름다운 자연, 벽에는 밖에서 비쳐오는 빛과 자연의 아름다움, 제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자들의 고난을 그리고 조각하며 성물과 세례대에 성화를 조각해 넣었다.

튜톤족의 침입, 바이킹 침입, 게르만족 친입, 로마침입 등이 있었으나 교회당의 파괴 중에도 근근히 면모를 이어갈 수 있었다.
수도원은 지고 무상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놀랍고 위대한 아름다움으로 만드셨고 자기본성의 일부를 미술가들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을 개발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섬기게 했다. 그래서 수도원 교회를 통해 기독교 미술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규율이 있는 수도원 생활에서 기예를 통해 예술품을 만들거나 실용품을 만들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서는 미술을 실재화하여 우상을 만든 과오를 범했고 과격한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가 우상화한 미술을 송두리째 불사르고 부셔버리고 말았다. 개신교회는 미술을 부정하므로 미술의 실재성 위에 상징성을 나타내는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 신화는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가들의 실수를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다. 옛날 수돗물과 목욕탕이 없던 시절 독일의 엄마들은 아기를 함지 안에 넣고 때를 벗기는 목욕을 시켰다. 목욕이 다 끝난 엄마는 아기를 꺼내 놓고 꾸정물만 버려야 하는데 함지 안에 있는 아이와 구정물을 모두 버렸다고 한 말이 있다.
캐돌릭이 미술을 실재화하여 우상화 한 것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그러나 캐톨릭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성경적인 혹은 복음적인 신앙은 인정해 주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에서 우리가 버려야 했던 것은 마리아 숭배, 성인예배, 연옥설, 고해성사, 외경권위, 교황의 절대무오설, 성직자 독신제도, 교회당 안의 우상화된 조각, 복잡한 미사순서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개신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예배의 엄숙성, 성직자의 존경도, 교회제도의 책임과 질서, 묵상기도, 교회 권위, 수도원, 기독교 미술 등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회에 대한 제언

한국개신교회가 한국문화와 역사에 주체적인 역사창조를 위해 교회 안에서 미술의 역사성을 찾아내어 기여해야 하겠다. 지금은 Postmodernism 시대이다. 한 가지 방법으로만 가지고는 느리고 쳐진다. 아나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간지 오래고 다시 ipod 시대로 가지 않는가. 음악 한가지 만이 아니고, 문학 한가지만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예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개신교는 음악에 대해선 이해가 있다. 고전악기, 현대학기, 찬양대, Organ, Orchestra, 복음찬송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교인들이 기도하고 성령의 감화로 그린 성화가 있어 보고 은혜 받는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기독교 미술인들이 교회 안에서 봉사할 자리가 없지 않는가? 교회당 건축에도 빌딩위주로 건물크기에 신경을 많이 쓴다. 사람들 많이 들어가기 위해선 창고 형태의 건물도 마다한다. 교회는 빌딩만을 짓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예배당, 신앙고백적인 신학이 함축된 건물로 지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많은게 다 좋은게 아니고 큰게 다 능사가 아니다. 복음의 기능인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나타내어 주어야 한다. 이제는 읽고 듣는데서 보고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을 깨우쳐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목사의 설교에서만이 아니라 성가대의 찬양에서만이 아니라 교회당 건축, 그림과 조각에서 미술의 예술성과 상징성을 회복해야 한다.

지난 7월 나는 Presbyterian Heritage를 찾아 Scotland에 갔었다. 천주교 사제였던 John Knox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삼위일체교회, Iona 수도원 등을 방문했다. 많은 영국장로교회당(Scotland Church)마다 문 앞에 수백년 된 돌로 된 십자가가 서 있었다. 한달 전엔 Canada 헤밀톤에 갔다가 헤밀톤장로교회당 앞에도 돌로 된 큰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곳에 멈추어 서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했다. 저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나를 죄에서 구속했네 눈물이 나게 감격했다. 교회에 십자가 신앙이 빠지면 안 된다. 요사이 어떤 교회는 십자가를 교회당 위에서 떼어 내리며 십자가 표시를 안 하려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서양교회의 것을 다 따르지 말자. 우린 세상에서 영적으로 십자가를 들고 마귀와 사탄세력과 전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여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교회뜰을 만들어 봅시다. 교육관과 파킹장만 급한게 아니라 교회당 뜰을 밟으며 벤취에 앉아 쉴 수 있는 자연의 뜰을 마련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당 뜰 안에 한 두개 조각이 세워지면 분위기가 훨씬 차분해지고 경건한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교회당 뜰에서도 기도할순 없을까?

기독교가 낳은 화가들과 작품들

레오날드 다빈치 -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리타의 성모( Madona Litta)
싼지오 라파엘 - 시스티나의 성모(Sistine Madona)
미켈란젤로 - 아담의 창조(Creation of Adam),
다윗(David), 이브의 창조,
시시티나 부속예배당의 정면제단, 노아 대홍수,
원죄 낙원추방, 피에타, 성모자
렘브란트 - 돌아 온 탕자 (Return of the Prodigal Son)
살바도르 달리 - 예수의 수난 ( Crucifixion)
카라바죠 - 이삭의 희생 ( Sacrifice of Issac)
김은호 - 부활 후, 오병이어
김기승 -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일대기
김기창 - 예루살렘 입성
장운상 - 어린이 예수, 성모자도
김학수 - 사철의 봄바람
문학진 - 한국순교자 복자 103위도
홍종명 - 그리스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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