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16호

세월은 흐르고 변한다.

01/18/15   김창길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 원장
뉴저지장로교회 원로목사
해외 한인장로회 뉴저지노회 공로목사

사람과 자연도 변하고 이념과 제도도 변한다.
가을에는 이글이글 번져가는 변화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 준다.
우리의 선배 마틴 루터수사는 500년 전에 교회가 세상 문화 속에서 1500년 동안 존재하면서 오염된 고질적인 전통과 제도와 관습을 바로 잡으려고, 교회가 교회답게, 신앙이 순수하게, 신학이 하나님 중심으로 되게 하기 위하여 위텐 베르크 문에 95개 조항을 붙여놓고 성토하였다.

구원은 인간의 공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으로 만(sola fide)' 신앙과 삶의 표준과 척도는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단번에 나가는 것으로, 구약시대처럼 제사장을 통했던 것이 아닌 누구나 직접 하나님의 보좌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부의 고해성사를 통해 나가는 것이 아닌 만인제사론 등을 주장하므로 당시 베드로대성당 건축을 위한 모금운동이나, 성직매매, 성직자들의 윤리적 타락, 교회우상화, 신앙 미신화 및 인본주의적 신앙에 정면 충돌에 나섰다. 당시 교황과 맛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종교개혁을 통해서 얻은 개신교회는 500년후에 오늘 과연 어떤 모습인가? 어떻게 개혁되어가고 있는가? 또 케톨릭교회는 오늘 어떻게 되고 있고 개혁되어 지고 있는가?
지난 여름 휴가동안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캠퍼스안에 있는 세계교회선교협력센타 게스트 룸에 머물렀다. 이 학교는 내가 1959년 고등학교 제복을 벗고 사명감에 불타 들어간 선지학교이다.
예과 특차에 합격하여 남산 켐퍼스에서 몇 달 지난 후 잠간 대광중고교 교실을 빌려 그 다음 광나루에 신축교사가 완공된 후 들어 갔었다. 초창기 비오는 날이면 진흙탕 반죽길로 구두와 바지가랑이가 붉게 물들어 씻어내곤 했다. 55년전 학과는 셋(예과2년, 본과 3년, 별과 2년)이 전부다. 예과를 수료하고 본과로 올라갔고 별과는 지방신학교 졸업생들이 들어왔다. 내 기억으로 전교생이 200명 남직했다. 건물은 본관 하나만 우뚝 솟아 있었고 학생들은 소명감에 불탔고 졸업후 95%가 목회하러 나갔고 5%정도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유학 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금번 모교 캠퍼스를 찾은 이유는 젊은 신학도들이 그립고 만나기 위해서이다. 가능한한 교수님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고 캠퍼스 벤취에 앉아 이야길 나누고 까페에서 커피를 나누기도 하고 식당에서 함께 밥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도서관에 꽉 들어 찬 학생들을 보며, 책방에서 십여명이 책을 고르는 모습도 보고 신학교실 안에 각자의 컴퓨터를 놓고 숨 죽여가며 강의 듣는 모습들.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기숙사에서 몰려나오는 행렬이 장관이였다. 어디서 그 많은 신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한경직 기념관이 빼곡이 찼다. 보통 새벽기도회는 교수님들의 인도로 20분 정도 마치고 통성기도를 했다. 새벽에 장신대 기도불이 타올랐다. 그 기도는 10분 후면 반 이상이 나갔고 다시 10분후면 울부짖는 기도소리가 높은 천정에 치솟고 학생수는 더 줄었다. 얼마후엔 앞 좌석 땅 바닥에 무릎끓고 손을 올리며 때론 박수를 치며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눈물흘리는 기도꾼들이 있었다. 아직도 의자 사이 군데 군데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이들이 200명 가량 되었다. 정말 진지한 새벽기도회 시간이다. 학교는 의무적으로 출석을 체크하지만 그 곳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 그런데 왠 일인가? 기도회가 끝난 후 예배당 2층 끝 난간에 두 세명이 두 다리를 쭉 뻣고 잠을 잔다. 남들의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숙사에 들어가 자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지인은 밤새 공부한 학생들이란다. 모두들 남의 기도하는 자세를 존중하고 받아주는 관용과 성숙한 포용력이라 할까? 옛날 우리 세대보다 통이크다. 이들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전통을 이어 갈 분인데 믿어 존경하려 한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신대원 학생들과 학부학생들, 여학생보다 남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만난 이들중 70%이상이 목회자의 자녀였다. 참 놀랍다. 내가 다닐 때는 목회자의 자녀가 10%도 안되었다. 그들은 부모의 삶을 통해 목회자의 길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본인들이 선택한 것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다. 장신대에 입학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컷었다. 어렵고 험난한 길인데도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사명감과 소명감에 연결시켜 볼 때 희망적이고 감사했다.
교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신학교에 들어 왔는데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는 교회현장에서의 교회지도자와의 갈등과 제도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소명감과 믿음으로 현실을 해결하려고 했다. 학생들은 학업에서나 교회 피일드에서 또는 개인에게 생기는 문제를 의논할 멘토가 필요하단다. 학생이 많아 교수들을 만나기 힘들단다. 신학교수는 학자이지 설교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플에서 들었던 설교는 민족과 국가, 문화와 정치, 교회와 신학, 인간과 신앙을 아우르는 생동감 있고 통찰력있는 예리한 멧세지로 은혜가 충만했다. 이런 설교를 장신대 안에만 묶어 두기는 아까웠다.
장신대가 세계적으로, 한국 사회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교단과 국가를 초월한 저명 교수님 초빙도 시작할 때이다. 언제 누가 장신대 옆에 땅을 사서 도서관을 지어줄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기대해 본다.

박창환 교수님과의 만남
기획실장이 박창환 학장님이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받고 아침을 같이하며 담화를 나누었다. 나는 학창시절 교수님에게서 희랍어와 신약개론을 배웠는데 본과에서 희랍어 학점을 못 받으면 별과로 전과하여 졸업하게 되어 있어 학생들은 희랍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은 점수에 대하여 엄격하고 정확하셨다. 별과로 졸업하게 된 학생이 교수님을 찾아가 별과로 졸업하게 하면 노회에 가서 보자고 협박했을 때 교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다른 에페소드로 한국사회가 대학가의 데모로 한창 시끄러울 때 우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학생이 학장실에 만도를 쓰고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학장님을 때려쳤다. 학장님은 그 학생이 누구인가를 잘 알고 계셨다. 교수회에서 그 학생을 징계 처분하기로 결정하여 그 이름을 말해 달라고 했을 때 끝까지 함구 하셨고 그 학생을 끝까지 보호해 주셨던 강직하신 분이다. 부친이 황해도에서 순교하신 슨교자의 자제이기도 하다. 식사후 3시간 동안 교수님의 신학여정과 장신대의 미래에 대한 바람을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은 초기 한국신학계의 생생한 증거요 살아있는 역사이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 못한 사적인 비사이기도 했다.

한 때 박형용 박사와 박윤선 박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피난 중 한 동네에서 동거하면서 진솔하고 격의 없이 사셨던 인간과 신학과 교회분파 이야기는 후학을 위해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모교에 대한 애착심과 한국신학계와 미래 한국 장로교회의 사회책임론의 혜안은 머리숙여 경외하게 했다.
현재 장신에 대한 기대는 좁은 땅에서 2천명이 분주하게 부딪기고 쫓기는 상황 그리고 빽빽하게 숨막히게 들어찬 건물속에서 경건과 학문은 힘들다는 지적이시다. 이 자리에서 M.Div. 만 있게 하고 조용히 묵상과 기도와 연구하도록 여유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다.

55년전 내가 이 학교 다닐 때 학생 200-300백명을 위한 시설이였다. 물론 그 후에 학생을 더 수용할 수 있도록 건물을 지었지만 말이다. 박창환학장님은 계속해서 장신대는 신대원을 중점에 두는 신학교이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신대원 입시에 영어만이 아니라 희랍어와 히브리어 시험을 치루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못하고 있었지만 독일과 유럽에선 성경원어 시험을 치루고 신학교에 입학한단다.

그래서 신학생 모집인원을 조정하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국교회가 변하여 올바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원어 시험을 장신대가 먼저 실시해야 한다는 지론이셨다. 나도 목회 45년 넘게 하고 은퇴하면서 아쉬운게 원어로 성경을 못 읽는 것이다. 주석을 뒤적이고 일반서적을 참고했던 나의 설교는 어딘가 어설프고 서툴렀다.
장로회 신학대학교는 세상에 있는 일반 대학교와는 다른 학교이다. 경건과 학문을 하는 학교이며 도시생활에서 주님과 만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확신을 얻는 자리가 되어 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세상과 학문계를 리드하여 영향력을 주는 전통있는 신학교가 되어져야 하지 않는가?
경쟁에서 일등하고 유학가서 유명한 신학교의 학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면 성공인 것처럼 생각하던 시기는 이미 50년 전에 지나갔는데 옛날의 잘못된 관습을 고쳐야 한다.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선지학교의 특수성이 뚜렷해야 하지 않을가? 물론 현실적으로 문교부의 간섭과 제도의 한계성이 있긴 하지만 50년 후에는 장신대는 어떻게 변화될가를 생각해 본다. 나를 목회자로 만들어 준 선지학교여! 장신대학교여! 겨우 주기철과 손양원 순교자 선배를 자랑하는 후배가 아니라 세기에 소금과 빛을 발하는 참된 목회지가 나오는 그 날을 기대한다.

미국 뉴저지 개신교 수도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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