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0년 7월 13일(음력)에 만주국 신경특별시(지금의 장춘)에서 감리교 목사인 김동철목사와 안마리아 사이에서 여섯 아들 중 다섯번째로 태어났다. 내 위로 누님들 4명을 낳았는데 그만 모두 잃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
아버지는 용정에서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접고 조선의 한양의 협성신학교(감리교 신학대학교 전신)에 유학하였다. 아버지는 신학교시절 배구와 축구선수였으며 미모가 뛰어난 미남이었다. 당시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어 어머니에게 동의를 얻으려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당신은 미국유학 갔다 와서 나 보다 더 똑똑하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만 미국유학을 포기했단다. 엄마와 아버지는 한살 차이로 엄마는 18세 였고 아버지는 19세 때에 양가 오라버니의 중매로 결혼했다. 큰 아버지와 외삼촌은 독립운동 하시다가 감옥에서 만난 동지들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정규학교에 한번도 다니지 못했고 그 당시에 여자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그저 '갖나'라고 불려지던 암울한 세대였다. 엄마가 주일학교에 다니다가 캐나다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이름이 없는 걸 보고 선교사가 지어 준 세례명이 본명이 되어 평생 안마리아로 불려지고 쓰여지게 되었다. 첨 엄마는 시집와서 시집 식구들의 부엌일과 논밭일로 눈코뜰새가 없었단다. 한양으로 유학와서는 신학교 아랫 동네 냉천동 셋방을 얻어 하숙생을 치며 빨래를 하며 아버지의 학비를 조달했다. 낮에는 틈을 내어 화신백화점 뒤에 있는 태화관 한글학교에 걸어가 공부하고 졸업식 날엔 학교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는 일도 있었다.
난 10살 적 6.25전쟁 중에 아버지가 공산당에 납치되어 잃어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리 생생하지 않지만 오늘날까지도 보고싶고 그립다. 추운 겨울아침 방 안에 있던 오강의 오줌이 꽁꽁얼어 붙은 찬공기 속에 언 손을 비벼가며 아버지 발 위에 내 발을 올려놓고 다다미방 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내 발을 녹여주시던 아빠, 6. 25전쟁 2년 전인가 형들은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넷째 형과 동생과 남산에 엄마가 싸주신 김밥을 들고 소풍가서 아빠랑 단풍 줍던 일 그게 아버지와 마지막 소풍이었다. 종종 아빤 우리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 볼을 차며 축구를 가르치곤 했다.
아버지는 말이 적은 편이었고 성품이 곧으시고 사회정의구현과 가난한 자를 돕는데 애쓰셨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은 기둥 빠진 집 같아서 슬프고 허전하고 막막했다. 우린 당장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또 누가 우릴 도와 줄 수있을 지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엄마는 동분서주 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체면 차리지 않고 덤벼드셨다. 대학에 들어간 형들은 흩어져 군인으로 입대하고 서울의대에 재학중인 둘째 형은 국가가 졸업할 때까지 징집을 면제시켜 주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세 아들을 데리고 살기 위하여 부산 피난시절에 자유시장과 자갈치시장 바닥에 옷가지를 펴놓고 파셨는데 버는 것 보다 도둑맞아 믿지는 게 더 많았다. 그 다음엔 삯 바느질을 하셔서 등록금을 마련하였다. 그게 잘 안될 땐 밤새 교회당에서 금식기도를 하셨는데 그 때마다 기적같이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도움이 생겼다. 어머니는 학식이 부족하고 가난하고 가냘픈 여인이었지만 교회당에 가셔서 눈물로 기도드리면 문제들이 말끔이 해결되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대로 마다하지 아니하고 감사히 감당하셨다.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도 믿고 기댈수 없는 각박한 세상에, 먹고 사는 일이라면,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감내하며 뛰셨다. 그녀에겐 불가능이 없었다.
사실 난 아버지에게 영향받은 것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엄마는 나와 함께 오래 살면서 아픈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눈물로 기도하시던 모습, 무댓보로 믿고 맡기고 사시는 빈 마음, 매사에 소망을 가지시고 확신과 긍정적인 자세, 하찮은 것 가지고도 감사하며 기쁘게 나누시는 여유, 현실의 냉대와 가난과 부조리를 이겨내신 믿음의 어머니시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믿음을 배웠고 이런 믿음으로 목회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 정릉으로 야외예배를 갔었을 때였다. 연못가에서 예배를 마친 후 난 한적한 곳에 떨어져 울고 있었다. 학생회 부회장인 이선자누나가 찾아와서 즐거운 야외예배에 와서 왜 우느냐고 물었다. 누나에게 옛날 아버지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운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교인들이 몰려와 위로해 주었고 형도 나중에 찾아와 아무말 없이 보고 갔다. 그때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후일에 난 그 일을 생각하면 민망하고 얼굴이 붉어진다. 철없던 시절이다. 아직 어머니는 부산에서 보따리 장사하여 서울로 송금해 주고 동생과 나는 교회가 얼마동안 빌려준 사택에서 자취하고 형들은 가정교사로 남의 집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 막 개학했을 때이다. 내 짝 김영봉이 며칠간 결석하더니 며칠 후에 뇌막염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나에겐 말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영봉이는 충주의 갑부의 아들로 블라스터 하모니카를 잘 부는 착한 아이였다. 과목시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은 반에 들어오셔서 인사를 받은 다음 "죽은 김영봉 자리가 어디지?" 하면 백 여개 넘는 또렷한 눈망울들이 단번에 내 옆책상 위에 쏟아 붙는다. 나는 몇 번식 차갑게 쏟아지는 눈총을 의식하면서 나도 모를 상념에 사로 잡힌다. 그리고 맘이 이상해지더니 두려움이 나도 모르게 스며 들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산다는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실존은 어떤 존재인가? 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내면에서 질문이 물어온다. 마음이 아려왔다. 말 없는 고독이 스며든다.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번민이 엄습한다. 신앙의 근본적인 회의가 흔들림으로 방황으로 솔직한 질문이 시작된다. 모두들 생명을 걸고 긴장하여 얼굴이 하얀 백지장이 되도록 밤잠을 줄이는 바쁜 대입준비 기간에 "창길아! 넌 팔자좋게 사치한 낭만과 허무에 빠질 여유가 있느냐? 대학 떨어지고 울고 후회하지 마라. 자식아 좀 정신차려라. 야, 임마 찬 물로 머리감고 와! 한심한 놈 , - - - " 친구들의 호통. 친구들의 어떤 말도 아랑곳 없었다 삶의 의욕도 상실 되었고 모든 욕망도 거품이다. 아무도 나와 이야길 나눌 친구가 주위에 없다. 말이 통할 사람이 없다. 눈물도 나지 않는 혼자만의 고독이다.
이렇게 6개월이 흘렀을 즈음에 성경시간이였다. 교목이신 김창일 목사님께서 칠판에 사람인자를 쓰시면서(ㅅ) 작대기 둘이 합하면 비로서 사람이 된다 'ㅅ' 'ㅅ' 'ㅅ' 'ㅅ' 'ㅅ' 5번을 쓰시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살면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 혼자있는 작대기는 그냥 막대기지만 두 작대기가 합해서 받쳐주고 덮어줄 때 비로서 사람(人)이 된다. 여자와 남자가, 임금과 백성이, 주인과 종업원이, 선생과 학생이 그리고 몸과 영혼이 합해질 때 완전해 진다. 교목님은 나에게 두권의 책을 읽고 와서 이야기 하자고 주셨다. 페이퍼백으로 된 처음 책은 헤르만 헷세의 '싣달다'로 두 사람이 구도의 길을 걸으며 이해와 아량과 포용과 겸손이 아름다운 부다의 철학이 였고 또 다른 책은 하천풍언의 '사선을 넘어서'로서 저자의 구도자로서의 자전적 이야기다. 불치의 병을 이겨내며 빈약자를 위해 빈자로 사는 기독인의 절대적 가치관을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3층 교목실에 불러놓고 나를 위해 울면서 기도해 주신 목사님이다. 지금까지 그 때처럼 흐느끼며 크게 기도한 적은 아직 없다. 기도 후 선생님은 나에게 주님이 지금 너를 부르신다고 하면서 신학대학으로 가서 주의 종이 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예"로 대답했다. 교목실 문밖을 나올 때 새가 파란 하늘을 펄펄 나는 것처럼 발 걸음이 홀가분하고 가벼웠다. 선생님은 만일 감리교 신학대학이나 연세대 신학과를 지망하면 장학금을 알선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본래 나는 농과대학을 지망해서 이과반에 속해 공부했다.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심기를 좋아 했는데 마당없이 자랐다. 그리고 짐승들을 보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서울서 뜰 없이 가난하게 자란 나는 학교 화단과 교회 꽃밭을 좋아했다. 자연 속에서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수수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일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삶의 목표가 새로워 졌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과 형님들과 이야길 나누었다. 아버지가 떠나 가신 후 큰 형님은 마포국민학교 교사와 음악공부를 그만 두고 부산 피난시절에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후 거제중고교에 교목으로 일하며 동생들의 학비를 도왔다. 큰 형님도 환영했다. 어머님은 네가 소명을 받았으면 어려운 십자가를 지는 길이지만 아버지가 가신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넷째 형님은 반대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것은 가난과 고생과 어머님의 아픔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왜 이렇게 사니? 아버지 때문이야. 제발 목사되지 말고 나와 함께 장로가 되어 교회봉사하자, 응!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다니던 셋째 형님은 신학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감정적인 것 보다는 지성적이어야 하고 먼저 소명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계신 둘째 형님은 나도 언젠가 신학을 하고 싶은 꿈을 가졌는데 네가 한다니 축하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에 유학오라. 동생은 아무 말없이 형의 결정에 따랐다. 어머니는 목회자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 가문의 축복이요, 너의 아버지께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총이요, 영광이다고 하셨다.
다음날 담임목사님이신 서금찬 목사님을 찾아가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창길이가 신학교에 갈 것을 믿었단다. 그리고 기도해 주셨다. 신학교는 우리 교회가 속해있는 남산에 있는 장로회 총회신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통합측 목사가 된 것이다. 서소문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서금찬 목사님은 나에게 영적인 아버지 같은 목사님이시다. 아버지를 잃은 나를 중학교시절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전도사 시절과 부목사 과정을 거치도록 가르쳐 주신 분이다. 나만큼 오랫동안 서목사님 밑에서 사역을 배운 사람이 없다. 그는 신앙과 인격적인 면에서 존경 받으실 목사님이시다. 순수하고 진실한 진짜 목사이다. 그의 중심엔 하나님과 교회와 교인 뿐이다. 진리에 대해선 올곧지만 다른 의견을 포용하신다. 복음적이지만 에큐메니칼 하시고, 말씀과 이론은 적게하시지만 행동과 삶은 길고 깊다. 말보다 실천가이시다. 당신의 주머니는 비어있지만 늘 남에게 베풀며 부자로 사신다. 아픔이 있으면서도 바보처럼 웃으며 사신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시면 연세고하를 막론하고 아이들 처럼 " 아바이 옵세 , 아바이 이리 안즈매" 싱글벙글하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한다.
서목사님은 교회의 직위적인 목사 이전에 영적인 아버지로, 진정한 아버지로 불리어 진다. 목사님은 그냥 계시는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맘에서 우러나와 아버지, 아빠 한다. 한번은 해방촌에 사는 어느 여집사님댁에 강전도사님과 함께 심방을 갔다. 그 집사님은 폐병으로 앙상한 뼈만 남고 입가에는 각혈하여 붉은 피가 흥건히 적셔있고 가끔 기침하며 겨우 사람을 알아 볼 정도였다. 딸은 직장에 나가 없었고 남편은 그곁을 떠난지 벌써 몇 년이 된다. 목사님은 판자 문을 열고 나가 대야에 물을 담아 수건을 적셔 얼굴을 말갛게 씻어 주신다. 전도사님과 나는 방바닥을 걸레질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식품을 사다 놓고 예배를 드렸다. 집사님의 깡마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미소를 머금은다. 그리고 서목사님은 안 주머니의 돈을 꺼내어 봉투에 넣고 쪽지 글을 쓰고 머리 맡에 놓고 나오셨다. 이 심방은 심방대원 없이 교역자들만 다녀왔던 심방이었다.
한 교회에서 30여년 넘게 목회한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이 못 갖는 고결한 인격이 있으시다. 어떻게 수백명, 천명되는 교인이 다 목사님을 좋아하고 맘에 들어 하겠는가? 양 100마리 중에 자기 고집대로 튀쳐 나가는 한 마리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직접 뽑은 12제자 중에도 가롯인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옥에도 티가 있듯이 목회자에게도 약점이 있다. 목사는 천사도 예수도 아니다. 교인들이 착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날 한 청년이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투덜됐다. 목사님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책방에 가셔서 신간서적을 사오셔서 밤 두세시 되도록 설교준비 하시고 새벽기도 하시며 말씀을 전하셨다. 그 후 그청년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난 사택에서 살면서 목사관에 전등불이 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60이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목사의 설교 가지고 이야기 할 때 목사는 제일 아프다. 그러나 서목사님은 청년의 입장에 서서 그 분이 은혜받도록 설교를 준비하셨다. 60대가 20, 30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묵묵히 목회자의 길을 걸으시는 모습을 보며 목사의 고독과 인내와 노력을 배웠다.
한 번은 서울 영락교회의 선교부장이신 송성찬 장로님에게서 선교부 담당 부목사를 청빙하는데 나를 청빙하기로 결정했으니 오라는 것이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서목사님을 찾아 의논드렸다. 목사님은 내 말을 들으시고 잠간 눈을 감으시고 나시더니 "목사는 더 큰교회, 더 유명해 질수 있는 교회를 찾아 가면 안 된다. 이 교회가 김목사님의 선친이 세운 교회이요 여기서도 일을 잘 하고 있는데 말이다 조금 있으면 유학하러 떠날텐데 움직이지 마라. 목사는 당장 보이는 기회가 좋다고 쉽게 자리를 바꾸면 안된다. 한 자리에 그냥 있는 게 좋다" 하시면서 당신에게도 더 좋고 큰 교회가 청빙하는 자리가 몇 번 있었지만 그걸 사양하고 여기가 하나님이 주신 자리라 생각하고 일하셨단다. 그래서 나는 서소문을 떠나 영락으로 가지 않고 서소문에 있다가 캐나다를 지나 미국에 왔다.
뉴저지장로교회에서 31년 동안 별 탈이 없이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고 약점 투성인 나를 뽑아 주시고 세워 주시고 사용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뉴저지장로교회의 교인들의 사랑과 격려였다. 그리고 내가 자라고 성장한 서소문교회 교육이다. 외람된 말이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나의 목회에 서목사님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 못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남이 없는 심방 Talent가 있다고 한다. 혹자는 심방으로 교회를 부흥시켰다고도 한다.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도를 어떤 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가 있다. 그이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저이가 괴로워 하면 내가 못 살겠다. 저들이 좋아하면 괜히 좋아지고 이들이 슬퍼하면 내가 혼자 운다. 이 맘은 하나님이 주셨고 서금찬목사님을 뒤따라 다니며 익힌 것이다. 한 때는 난 당회장이 되면 심방에 중점을 두지 않고 설교와 교육과 상담에 두리라고 다짐했지만 나도 모르게 서목사님을 닮았다. 서목사님은 교회정치에 야심이 없으신 당신의 교회만 목양하시는 청빈한 참 목자시다.
7년 6개월 만에 목사를 6번이나 바꾼 교회,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던 본보기나 믿음의 전통이 없어 사회기관 같았던 힘든 교회, 예배를 마치면 어느 집에 몰려가 맥주와 담배를 태우며 제직회를 평가하는, 교회직분이 관료화 되어버린, 목소리 크고 기득권을 잡으면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풍토 등, 초기 이민교회에서 견뎌내려면 정말 강인한 믿음을 가져야 했다. 양같이 순진하기만 하면 어렵다.
나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 주신 분은 바로 어머니 안마리아 권사님이다. 6.25 전쟁으로 갑자기 아버지를 잃고 아들 6형제를 대학교육까지 시켜내신 보통 여인이 아니다. 정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고 집 한간도 없고 돈 한푼도 없이 맨 주먹으로 일궈 내셨다. 도와 줄 일가친척도 없었다. 목사님이 안 계시니 교인들도 찾아 오거나 도와 주는 이 없는 상황에 믿음과 기도로 버티어 가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란 나는 아버지가 교회 위해 순교하시고 어머니가 믿음과 기도로 끝까지 매달리신 것을 보면서 이민목회를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냈다. 죽기로 했더니 살게 됐고 인내하면서 했더니 쉬워졌다. 문제를 보지 않고 해결을 생각했고 현재 집착보다 미래를 상상하고 이뤄질 꿈을 꾸웠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목회는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을 알았다. 엄밀히 말해 목회는 내가 한게 아니다. 목회엔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본래 나는 수줍고 내성적이고 목소리는 작고 여성적인 면이 많았다. 누가 나를 인정해 주겠는가? 그러나 목회를 위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난 변했다. 본래 태어난 나 아닌 내가 되었다. Leadership의 하나인 카리스마가 생기고, 너그럽지 못한 내가 포용하게 되고 , 강한 남성적인 인물이 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본래의 목소리와 수줍음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다. 작은 키, 체구가 외소한 열등감 , 형제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지적 열등감은 학벌을 따지는 것으로 남아있다. 설교는 그럴듯하게 외치면서 난 열등감 때문에 이중적인 잣대로 살았다.
그러나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덕분에 모든 면에서 치유가 되고 용기와 위로와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나의 조그만 자존심으로 아내에게 정말 제대로 못하고 있어 미안하다. 은퇴 후 수도원 사역을 함께하면서 난 정말 버겁게 아내에게 감사한다. 하나님과 Esther 앞에서 참말로 모든 것에 정직하며, 모든 일에 성실이 행하며, 그에게 겸손하기란 아직도 나는 캐노시스 (keno sis ), 자기를 비우는 영성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있다.


